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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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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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본문 : 창세기 171-14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저는 가끔 저와 예수 믿는 여러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빠집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입니다.

소위 말해서 '예수쟁이' '예수 꾼'입니다.

'예수 쟁이'라는 말은 과히 좋은 말은 아닙니다.

이 말은 한국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깔보고 조롱하면서 부른 말입니다.

원래 '쟁이'라는 말은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천민들에게 붙이는 말입니다.

그래서 마치 '예수쟁이'하면 옛날에 '상놈' '백정'하듯이 낮고 천한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쟁이'라는 이름이 오늘날도 불려지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불신자들에 의해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부릅니다.

그런데 저는 저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합니다.

저는 '예수쟁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습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그러나 고민이 있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쟁이인가?' '이 이름이 나에게 합당한가?'

예수쟁이라면 내 몸에서 예수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예수 냄새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내 속에 예수가 철철 넘쳐야 합니다.

인천 시내에 가면 수봉산 남쪽의 용현동에 독쟁이가 있습니다.

왜 독쟁이 입니까? 독이 만들어 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쟁이'가 붙었다면 적어도 그 사람은 그것을 만들어 내거나 그것에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대쟁쟁이는 철로 삽, , 도끼를 만듭니다.

소금쟁이는 소금을 등에 지고 다니며 팝니다. 그 사람에게 소금이 항상 있습니다.

뻥쟁이, 거짓말쟁이는 그 사람이 매일 뻥만 튀기고 다닙니다. 하는 말마다 거짓말입니다.

욕심쟁이, 심술쟁이, 말쟁이, 요술쟁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면 예수쟁이는 그 사람은 예수님을 만들고 예수님을 지고 다니고 입만 열 때마다 예수만 전하고 다닙니다.

좋아도 예수, 나빠도 예수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고민이 여기에 있습니다.

내가 예수쟁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예수님을 만들지 못하고 내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쟁이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는 뭔가 좀 달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면 예수 믿음에도 불구하고 좋은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예수쟁이들의 병입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불구하고 '예수 믿는 사람답지 않다'는 것이 바로 병입니다.

보통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실망하며 한탄하는 말 중의 하나가 이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뭐 저래" "집사가 왜 이 모양이야!" "목사가 뭐 저럴 수 있어!"

내가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되어야 하는 수준이 있고 그 수준을 알고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며 병입니다.

그래서 이 병을 이렇게 해결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바로 "---인척" 하는 것으로 해결합니다.

나는 고민이 없는 척,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척.

나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바로 생활하는 척, 나는 경건한 척. 봉사를 많이 하는 척. 신앙이 좋은 척.

"--- 하는 척"

그래서 교회에 나올 때는 가장 그럴 듯한 얼굴을 하고 나옵니다.

"나는 일주일동안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살았어!

그리고 이제 하나님께 예배 드리러 나옵니다"

그리고 가능한한 엄숙을 떨면서 가장 경건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자기 삶이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자기 위안'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 뒤에는 눈물이 배어 나올 만큼 안타까운 진심이 숨어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이만큼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기에 이렇게 ''이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대로 안 되기에 회개하는 척, 예배를 잘 드리는 척합니다"

"설교를 잘 듣고 이제 그 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하는 척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과 행동이 다를 때 이것만큼 큰 괴로움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속의 자기를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갈등을 이기지 못하여 고민하고 괴로워 합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이런 내용입니다.

이것이 바로 본문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고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시고 그를 지켜 주시는 모습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도 믿어서 하나님으로 부터 '의로 여겼다'라는 칭호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사람인 아브라함이,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팽개치고 자기 방법으로 하갈을 통해 아들 이스마엘을 납니다.

그리고 그 후에도 하나님께서 13년동안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시지 않고 침묵을 지킵니다.

1616(마지막절)"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 아브람이 86세이었더라"

171, "아브람이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은 13년동안 아브람에게 침묵하십니다.

어떤 말씀도 어떤 약속을 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도 아브라함처럼 믿음 생활을 곧 잘 해 나가다가도 그만 넘어지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 우리들은 내가 잘못했으니까 하나님이 더 이상 나를 축복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나무라고 힐책하고 때로는 우울증에 빠지고 자포자기 합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나와는 한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고 내게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는 듯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침묵하신다고 해서 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내 믿음을 정돈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줍니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우리를 찾아 오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잘못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너는 이제 필요 없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죄를 범했다고 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너를 축복하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해도 하나님은 나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나를 다시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내가 넘어지고 실패한 것보다 오히려 더 많은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실패한 나에게, 죄를 범한 나에게, 더 큰 축복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나를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다시 본문 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브람의 99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보세요, 아브라함은 드디어 99세입니다.

이제는 인간적인 희망이 다 사라졌습니다.

더 이상 자식을 낳을 능력이 없는 완전 절망 상태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말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못하실 것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인간적인 불가능한 상황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자기 자신을 가르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나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누군인가?를 가르칩니다.

"내가 불가능하고 도저히 이제는 어떻게 할 수 없어서 포기하고 절망했을 때 하나님은 내 속에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니 네가 이 사건을 통해서 내가 전능자라는 사실을 알기를 바랍나"라고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 닥쳐 올 때는 하나님의 위대성을 배울 수 있는 기회 입니다.

여러분!

인간의 극한 상황은 하나님의 기회입니다.

인간의 끝이 하나님의 시작입니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포기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시기 시작하십니다.

내가 절망했을 때, 내가 낙심할 때, 내가 소망이 없다고 포기할 때, 내가 이 때가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고통을 통해여 하나님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합니다. 말씀 한마디로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금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비다.

그런데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일 때 모든 문제가 달라 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분이 여러분의 하나님이십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십니까?

아니면, 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 목사님의 하나님만 되고 우리 어머니의 하나님만이 되고 나의 하나님은 되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름을 바꾸어 주십니다.

174,5, " 내가 너와 내 언약을 세우니 너는 열국의 아비가 될지라.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마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열국의 아비가 되게 함이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삶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어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어 줍니다.

본래 이름인 '아브람'의 뜻은 '높으신 아버지'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이름 때문에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교만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아브라함'의 이름의 뜻을 '많은 민족의 아버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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