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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신앙적인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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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신앙적인 그리스도인

본문 : 창세기 13장 5-18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싸움이 없고 평화만 지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너와 내가, 우리 모두가 생활하면서 서로 다투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항상 서로 도와가며 웃음 꽃을 피면서 사이좋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실제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서로 싸움과 미움과 시기가 끝나지 않습니다.

한 때는 서로 도와가며 사랑하던 사람들이 어느 자그만한 사건 때문에 이제는 원수가 되어 등을 돌리고 서운함과 원망 속에서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지닌 채 살아 갑니다.

그렇게도 다정하고 자기 목숨까지도 내어 줄 것 같이 사랑하며 지내던 친구와 친턱들이 어떤 오해 때문에 '죽일 놈, 살림 놈' 하면서 얼굴을 붉이며 앙심을 품고 고통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더욱 더 안타까운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천국을 기업으로 나누어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조차 서로의 미움과 원망속에서 화해를 거절하고 불신자들보다 더 가시돋힌 말로써 서로를 미워하고 욕하고 중상하는 모습들을 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와 공동체의 현실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차피 문제투성의 세상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는 어디에나 어느 상황속에서나 우리에게 계속 찾아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런 문제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어서 무덤에 묻여 있는 사람뿐입니다.

나에게 계속해서 어려움과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나에게 다가오는 이런 어려움을 피하는 것이 상책이 아니라 나에게 다가오는 이 문제를 내가 어떻게 다루고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있습니다.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나의 신앙과 인격의 성숙의 기회로 받아 들이고 잘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임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똑같은 종류의 인간 관계의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본문에는 아브라함이 자기의 조카인 롯과 물질 문제로 땅 뺏기 싸움을 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똑같은 문제로 아브라함과 옷이 서로 다투게 될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본대로 롯은 그가 신앙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양보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세속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이익만을 구합니다.

그러나 똑같은 문제를 놓고도 아브라함은 그것을 해결해 나가는 방법이 롯과는 달랐습니다.

롯은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지만 아브라함은 신앙적인 방법으로 인간 관계의 갈등을 성공적으로 해결해 나갑니다.

사실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한번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애굽에서의 한번 실패한 후에 아브라함은 신앙적으로 인간적으로 한 층 성숙해 졌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을 떠나서 하는 결정들이 얼마나 내 삶에 어려움을 가져다 주는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다가온 인간 관계의 어려움을 이제 성숙한 사람답게, 하나님의 사람답게 처리해 나갑니다.

이 아브라함의 모습들을 보면서 우리는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어려움을 신앙인답게 해결해 나가는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게 정직하고 솔직했습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 땅 문제로 서로 싸웁니다.

이것으로 인해 아브라함과 옷 사이에는 서로 좋지 않은 감정이 생깁니다.

서로를 원망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완전히 등을 돌려 원수처럼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8절, "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욕이라 나나 네나 네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지 말자"

아브라함은 자기의 감정을 숨기지 않고 롯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롯은 찾아가 솔직하고 진지하게 해결을 휘한 대화를 시작합니다.

서로이 인간 관계가 뒤틀리고 문제가 생기기 시작할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대화의 중단입니다.

내가 저 사람과 사이가 나빠지고 저 사람이 싫어지고 미워지면 피차에 말을 안하고 침묵을 지킵니다.

말을 하기사 싫습니다.  내가 말을 건다는 것이 지는 것 같고 자존심이 허락을 안합니다.

그러다 보니 서로가 더욱 더 오해가 생기고 나중에는 그 곳이 더욱 깊어서 해결할 수 없게 되고 영원히 원수로써 등을 지고 헤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침묵은 해결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고 사건을 더욱 더 악화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아브라함은 문제를 풀기 위해서 자기가 먼저 대화를 시작했다는 사실이 아주 중요합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아브람이 먼저 대화를 시작합니다. 아브람이 윗사람입니다.

우리의 일반적인 사고는 잘못 여부를 불문하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에게 먼저 와서 빌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자기가 윗사람이고 높은 사람임에보 불구하고 먼저 자기 아랫 사람 조카 롯에게 찾아가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의 비극은 대화의 결핍입니다,  대화가 없습니다.

친구와 친구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부모와 자식사이, 심지어는 부부 사이에도 대화가 사라집니다. 

거로 바쁘고 자기 할 일이 많다보니 대화가 부족하고 대화가 부족하다보니 상대방을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것 때문에 오해와 원망이 생기고 싸움이 일어납니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은 대화보다는 대결을 먼저 생각하고 타협과 공통점을 발견하여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것보다는 자기의 주장이 상대방을 누르므로 싸워서 이기기를 더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사회도, 가정도, 교회도 모두 삭막해 지고 냉냉합니다.

정도 사라지고 사랑도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하신 말씀 기억나시죠?

마 5:23,24. "그러므로 예물을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님께서는 친구가 찾아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상대반이 항복하고 들어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는 우리가 화해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보세요.

그 분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래서 나의 잘못, 나의 실수, 나의 허물을 오히려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오히려 자기를 못 박아 죽이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해자고 되시고 내 죄를 용서 하셨다면 내가 왜 화해자가 될 수 없습니까?

왜 내가 먼저 찾아가서 못하십니까?

하나님이 내가 먼저 무릎을 꿇지 못합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믿지 않는 사람이 우리의 모습을 볼 때 내가 교회에 가서 열심히 예배를 드린다고 큰 감명을 받고 예수님을 믿을까요?

내가 기도를 오래 한다고 그들이 나를 칭찬할까요?

우리가 하루종일 예배당에 가서 산다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감격해서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라고 말하면서 교회에 나올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은 그런 나의 모습을 보고 "미쳤군!"하면서 조롱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하지 못할 사람들을 용서하고 사랑을 실천할 때 그들은 압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는 모습을 압니다.

내가 당연히 미워하고 싫어해야만 하는 사람을 그래도 사랑할 때 그들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 다르다는 것을 압니다.

나를 괴롭히고 나를 못살게 한 원수같은 사람을 그래도 내가 용서하며 사랑할 때 그들은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예수 믿어야겠다"라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간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좀더 정직하세요.

그리고 상대방을  먼저 찾아가 그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세요.

대화의 문이 열리면 마음의 문도 열리고 때로는 이해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먼저 찾아 갔습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은 물질보다 화목을 더 중요시했습니다.

지금 아브라함과 롯 사이의 문제는 땅 문제입니다. 즉 물질, 재산 싸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재산 싸움의 물질보다도 형제 관계의 화목을 더 중요시 했습니다.

여러분! 

사람은 어떤 가치관을 가지느냐?에 따라 그의 인생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러나 보다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람이 됩니다.

어떤 사람은 돈에 인생의 가치를 둡니다,

그래서 성공의 기준을 더 많은 재산을 모아 부자가 되면 그것으로 성공한 것으로 압니다.

그러다 보니 돈 때문에 남을 속이고 남과 싸우고 남의 것을 빼앗고 돈 때문에 죄를 범합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공의 기준이 재산이 아니라 좀더 많은 사람을 사랑하며 더 많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라면 그는 설령 재산을 잃는다고 해도 사람을 얻고 그를 섬기는 것으로 인생의 보람을 찾으며 살아 갑니다.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가치관을 보다 높은 곳에 두세요.

재산을 얻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을 얻는 것에 두세요.

물질을 모으는 것보다는 그 물질 가지고 사람을 섬기는데 두세요.

우리의 물질이 우리 인생을 결코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돈이 나의 생활을 좀 편하고 호화스럽게 만들지는 모르지만 나에게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가져다 주지는 못합니다.

세계적인 거부 록펠러가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의 재산은 천문학적 숫자입니다.

"나는 억만불을 모아 보았으니 그것이 나에게 행복을 주지 않았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돈과 행복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내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젊어서 자동차 정비공으로 일할 때였다"

오래 전에 신문에 교통사고로 숨진 홍현자 여인의 기사가 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부모 친척 하나 없는 천애고아로 그의 오빠와 같이 오누이가 결혼도 하지 않고 동냥에서 부터 구두딱이며 쌀 배달이며 가리지 않고 일을 하여 돈을 모았습니다.

그래서 그 전해에 전국에서 가장 착실한 저축왕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그 날도 홍여인은 한 푼이라도 더 버러 쌀가마니를 자전가에 실고 한길을 가로질러 달리다가 그만 사고를 당한 것이었습니다. 그 사건이 알려지지 그의 빈소에는 각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조의금을 가지고 찾아 왔습니다.

그런데 그 돈봉투를 받아둔 홍여인의 오빠는 "이 놈의 돈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다"고 그 자리에서 돈을 찢어 버렸습니다.

돈이 전부인 줄 알고 자신을 송두리채 내던져 몸부림 쳤는데 그 결과가 이렇습니다.

모아도 모아도 끝이 없고 더 모르고 싶은 것이 돈에 대한 인간의 욕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물질 문제보다 보다 중요한 문제에 우리의 가치관을 두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백성답게 세상을 살아갈까?

내가 어떻게 하면  주님 뜻대로 살아갈까?

내가 어떻게 하면 복음을 전하며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며 살아갈까?

아브라함은 더욱 중요한 문제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인간 관계,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이 관계가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가치관을 가지고 그 문제를 바라 보았을 때 아브라함은 물질 문제를 초월할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이 어떤 문인가?를 알고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내가 정당하게 살면, 내기 이웃을 사랑하고 양보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바른 삶을 살기만 한다면 살아계신 나의 하나님이 애굽에서도 내 아내를 치키시고 나에게 돌려 주신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비고 돕지 않겠는가?"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롯에게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었습니다.

13:8,9 "아브람이 옷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물질에 초월하면서 보다 높은 가치관을 가지고 담대히 나가는 사람을 보세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유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배짱입니다.

손해는 보면서도 짖밟히면서도 찬송하며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이 합당한 하나님의 사람, 아브라함을 보세요.


셋째로 아브라함은 불신자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생활을 하기를 원했습니다.

7절,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와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세요.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있는 장면을 말하면서 그냥 그들이 다투었다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다"고 기록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주님의 백성이 다투고 있었을 때에 거기에 불신자인 가나안 사람도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가 싸우고 죄를 짓고 있을 때 불신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이 싸우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모습을 주목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의 잘못은 그냥 넘기면서도 우리가 잘못을 범하면 금방 뉴스의 촛점이 됩니다.

그들은 우리를 주목합니다.

우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감시당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숨길 수 없는 공인입니다.  공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한번, 믿지 않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 보는 모습을 보세요.

그들은 우리의 삶이 그들과 어떻게 다른가?를 끊임없이 지켜 봅니다.

그러다가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서 "나도 어떻게 하면 저렇게 살 수 있을 까?"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들은 우리가 외치는 말에 의해 감동을 받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가?"를 봅니다.

그리고 나의 말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은 우리를 평가합니다.

저는 가끔 '어떤 사람이 과연 신앙이 좋은 것인가?' '신앙 좋은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하는 고민에 빠집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신앙 좋다는 사람과 성경을 통해 제가 판단하는 신앙좋은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보통 예배 빠지지 않고 기도 많이 하고 십일조 생활하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의 봉사에 열심이면 신앙 좋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원에 가보면 대부분 신앙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옵니다.

기도 많이 하고 열심 있는 사람들, 이 무더운 날씨에 모처럼 얻은 휴가도 기도원에 서 땀을 뻘뻘 흘리며 새워도 제대로 못하고 고생하며 지냅니다.

그들은 대단히 신앙적인 열심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저는 기도원에 갈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 신앙 좋다는 사람들이 자기만 압니다.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이, 좀 더 잘 믿어 보겠다고 해서 온 사람들이 더욱 더 얌체질하고 자기만 알고, 자기 이익만 차리고 양보하지 않으려고 서로 싸웁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 생활이 은혜 받고 속이 시원한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컬컬하던 심렬이 내가 찬송 부르고 기도했다는 것으로 확 뚫리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자기 도취는 되지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서는 아무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있어야만 합니다.


예수 믿고 천국 가는 것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인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천국가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말씀대로 살아 나간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신자들은 많습니다.

나혼자 예수 믿고 천국 가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는 적습니다.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 말씀대로 살려고 발버둥치는 사람, 주님의 인격을 닮아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야 합니다.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가 되어서 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보고 있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본을 보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믿지 않는 이방인 앞에서 믿는 사람들끼리 싸우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앙안에서 신앙인답게 모든 것을 양보합니다.

자기가 손해보고 남는 것이 없다하더라도 양보합니다.

그래서 롯에게 좋은 것을 선택하라고 선택권을 주고 그 지꺼기를 자기가 가지겠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내 삶에 모본을 보이고 있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신앙인답게 행동합니까?

내가 손해 보더라도, 말씀대로 살기 위해서 양보하고 포기합니까?

아니면 내가 손해 보지 않기 위해서 눈을 부릎쓰고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보잘 것 없던 아브라함이 신앙적인 사람으로 변해 갑니다.

아브라함은 신앙인답게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습니까?

13:14-17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

하나님이 더 큰 복을 주셨습니다.

먼저는 더 많은 땅을 주셨고 그리고 지금은 자식이 없어서 걱정중에 있는데 자손이 땅의 티끌처럼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모습을 보세요.

보이는 것을 양보했을 때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적을 것을 양보했을 때 더 큰 것을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나를 아십니다.

나의 사정과 형편을 아십니다. 내가 양보하는 모습을 아십니다.

내가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시는 내 마음을 아십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위하여 정당하게 살기를 원하면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십니다.

결국 오늘의 우리의 문제는 '내가 이기느냐? 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높아지느냐? 낮아 지느냐?'의 문제도 아닙니다.

문제는 '내가 올바로 사느냐? 올바로 살지 못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내가 주님 뜻대로 살겠느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겠느냐?'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기치 못한 어려움이 우리에게 다가 옵니다.

예기치 못한 인간 관계로 우리의 마음의 상처와 아픔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나의 신앙의 진짜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 때 나는 어떻게 행동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손해 보는 마당에서 보다 중요한 가치를 인식하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아브라함은 애굽의 실패를 통해서 용서와 사랑의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으로 가득찬 사람마다 사랑하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용서의 주님으로 가득찬 사람마다 용서하며 살아 갈 수 가 있습니다.

나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를,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을, 나는 용서하기가 힘들다면 내 잘못과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피를리며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절규하시는 주님을 생각하세요.

나를 위해 기도하시던 그 주님이 바로 내 주님이 되어 내 마음과 삶을 지배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용서하여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인간 관계의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주님 앞에 솔직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원인이 내게 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책임이 이웃에게 있다고 생각되면 그 이웃을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의 사랑으로, 주님의 성령으로 나도 용서하며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기도하시면서 신앙인 답게 살아서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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