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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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세속적인 그리스도인
본문 : 창세기 13장 5-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엘림교회)
우리가 성경을 볼 때 어느 관점으로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 집니다.
가령 우리가 지금까지 아브라함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브라함을 보는 관점은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고 대단히 훌륭한 믿음의 사람이고 순종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고 나가자"라는 관점으로 늘 보아 왔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브라함을 그런 관점에서 보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저나 여러분처럼 형편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아주 보잘 것 없었고 그도 우리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고 자기 생각, 자기 주장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나갑니다.
그런 형편없는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 나갑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노력의 결실이 아니고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한 것이 아니고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만든 하나님이 위대합니다.
아브라함이 훌륭한 것이 아니고 그가 존경받기까지 그를 잘 훈련시키는 하나님이 훌륭합니다.
중심 인물이 아브라함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성경을 어디에 중점을 주고 어는 관점을 보느냐?에 따라 그 중요성이 달라집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실 때 보통 아브라함의 아름다운 양보의 미덕을 칭찬할 것입니다.
예, 맞습니다.
오늘 본문은 애굽의 실패 이후, 한층 믿음과 인격이 성숙하여 양보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아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그냥 빠뜨리고 넘어가기에 아까운 한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습은 우리의 모습과도 너무나 흡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롯의 모습입니다.
롯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을 쫓아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
애굽에서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도 체험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도 거기에 같이 동참하며 하나님을 찾습니다.
아브라함 때문에 큰 부자도 됐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때가 오니까 신앙이고 뭐고 다 상관없습니다.
자기의 이익이 결부가 되니까 큰 아버지고 뭐고 다 상관이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이익을 보고 자기가 부요해 지는 길만을 찾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나도 매주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께 예배 드립니다.
예수님의 이름도 부릅니다. 경건의 모습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익이 결부될 때는 신앙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그저 내가 이익을 보는 것을 쫓아 갑니다.
그것이 나의 신앙에 나쁜 줄을 알면서도 목적을 쫓아가고 세상을 쫓아 갑니다.
바로 이것이 롯의 모습이고 우리의 모습입니다.
롯이 아브라함과 함께 애굽에서 나올 때 그는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13장 1,2절,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 하며 남방으로 올라가니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5절,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롯은 아브라함 때문에 애굽에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서로 양과 소와 많고 땅과 초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같이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이 서로 자기 양과 소에 풀과 물을 먹이려고 싸웁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은 아브라함이 롯에게 싸우지 않게 하기 위하여 롯에게 좋은 땅을 택하라고 선택권을 줍니다,
롯은 선택하게 됩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 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모 여호와의 동산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본문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롯이 어떤 태도와 관점으로 그 문제를 대처하는 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롯은 아브라함이 희생적으로 양보하는 제안을 할 때 마땅히 조카로써 즉석에서 사양을 해야 하는데도 사양은 커녕 아브라함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눈을 들어' 선택할 땅을 바라 봅니다.
그런데 롯이 무엇을 바라 보았습니까?
'온 땅이 물이 넉넉하여 거기가 살기에 마땅한 것을 바라 봅니다'
그의 관점은 온통 육신적이고 세속적이고 이기적이었씁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떤 사물이나 세상을 보는 가기 나름대로의 독특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똑같은 대상을 놓고 볼 때도 어떤 사람은 신앙적으로 보고 어떤 사람은 세상적으로 봅니다.
혹은 어떤 사람은 긍정적으로 보고 어떤 사람은 부정적으로 봅니다.
그래서 내가 보는 나의 관점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불신자들에게는 세속관, 육신관이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앙관이 있고 교인관이 있습니다.
여러분, 신앙이란? 혹은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하나님의 눈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관이란? 내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내 눈만을 가지고 지금까지 살았습니다.
그러내 내가 신앙을 갖는 순가, 하나님을 내 마음 속에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내 마음에 영접하여 성령님이 내 마음 속에 거하여 그리스도인이 되는 그 날부터 나는 하나님의 눈을 갖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내가 신앙 생활을 하며 믿으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보니까 달라 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니까 단지 눈에 좋은 것만 그것이 나에게 좋은 줄 알고 쫓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보니까 당장 좋은 것보다 미래의 좋은, 영적으로 좋은 것, 하나님께서 좋아 하시는 것을 쫓아 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니까 참 나쁘고 살만한 땅이 못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보니까 참 아름다운 땅입니다.
내 눈을 가지고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가능합니다.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의 눈을 갖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참 안타까운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눈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가지 않고 내가 그리스도인이 되고도 신앙의 눈,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내 관점의 눈을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고 모든 일을 합니다.
롯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롯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고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의 눈인 신앙이 관점에서 선택하지 못하고 자기의 관점에서 선택합니다.
바로 이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인생을 망친 잘못된 선택입니다.
자기의 눈으로 좋은 것을 선택하면 처음에는 잘 되는 것 같지만 꼭 실패합니다.
롯이 좋은 땅인 소돔과 고모라를 선택하므로 어떻게 됩니까?
14장 11,12절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소돔에 거하는 아므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그는 결국 이웃나라에 포로로 잡혀가고 그의 재물을 빼앗깁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죄악이 관영한 소돔과 고모라를 하나님께서 치실때 그의 모든 재산은 다 유황불에 불타고 그의 사랑하는 아내까지 잃게 됩니다.
그러면 롯이 본 세상적인 관점 즉 자기의 관점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롯은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아브람이 롯에게 선택권을 주여 양보할 때 롯은 조금도 미안한 생각도 없이 즉석에서 자기가 차지할 땅부터 바라 봅니다.
롯은 당연히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아브람이 집안의 어른이고 가장입니다. 롯은 조카로서 아브라함의 지시만 따라야 합니다.
롯이 부자가 된 것이 누구 때문입니까? 아브라함 때문에 애굽에서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브라함에게 양보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만 채웁니다.
우리의 주위에도 이런 사람을 종종 대하게 됩니다.
내가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 친구의 도움을 받아 그래도 여유있는 지금의 위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내가 살만하고 혼자 설 수 있고 성공하게 되면 나를 도와 준 그 사람의 위치와 자리까지도 빼앗아 버립니다.
이제는 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면서도 내 재산을 불려 나가고 욕심을 채우게 됩니다.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사회는 항상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이 많으면 그 사회는 삭막해지고 불신과 불의가 팽배해 집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적인 삶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에서는 '우리'라는 이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도 혼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기주의적인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같이 하는 것입니다.
나만 잘 되고 나만 축복받고 나만 구원받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면 그것 때문에 하나님의 사역이 제한되고 늦어 집니다.
나 자신만의 이리적인 욕심을 가지면 나도, 이웃도, 모두 신앙에서도 생활에서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우리를 중요시하게 되어 우리가 잘 된다면 저절로 내가 잘 됩니다.
갈렙을 보세요.
갈렙은 하나님으로 부터 놀라운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는 가데스 바데아에서 가나안땅을 정탐할 때 하나님의 눈으로, 신앙의 눈으로 보고하여 여호수아와 더불어 가나안 땅에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 들어 와서 그들이 차지한 땅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질 때에 갈렙만은 제비 뽑아 땅을 얻지 않고 그가 요구하는 땅은 무엇이든지 가질 수 있는 특권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습니다.
그런데 갈렙이 어느 땅을 요구합니까?
여호수아 14장 12절,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혹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필경 여호와의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좇아 내리이다"
아낙 사람들이 사는 험한 산지를 요구합니다.
아낙 자손이 어느 자손입니까?
40년 전에 정탐군이 보고할 때 아낙 자손은 너무 강해서 자기들은 메뚜기 같다고 말해 이스라엘을 크게 공포에 몰아 넣어 낙심케 만든 그 아낙 사람들이 사는 땅을 요구합니다.
그것도 좋은 평야가 아니가 험악하고 쓸모 없는 산지입니다.
그것이 이미 점령한 땅이 아니라 또는 이스라엘로 빼앗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가서 직접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갈럽은 자기에게 주어진 가장 큰 특권을 자기의 유익이나 자기의 후손들의 행복을 위하여 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 특권을 전체 이스라엘의 평화를 위하여 이스라엘의 행복을 위하여 바쳤습니다.
자기는 오히려 그 특권 때문에 죽음도 각오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여호수아 14장 15절에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
갈렘이 그의 생명, 그의 특권, 그의 기업의 모든 것을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사용했더니 하나님께서 갈렙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큰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승리하고 그 땅에 드디어 전쟁이 그쳤습니다.
이스라엘의 최후의 승리는 위대한 갈렙의 헌신으로 이루어 졌습니다.
자기의 이익을 위한 이기적인 욕심이 아니라 남을 위할 때 자기도 잘 되고 남도 잘 되고 우리 모두가 잘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 혼자 예수 믿고 천국 사는 신앙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나의 욕심만 채우고 내 이익이 결부되는 곳이라면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두 눈을 무릎쓰고 싸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기독교는 남을 위한 희생의 종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한 십자가가 아니라 남을 사랑하고 남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린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나의 관점에서 어떤 것을 보지 말고 남을 위해 희생하신 이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모든 사물을 바라보고 판단해야 합니다.
둘째로, 롯은 물질적인 욕심이 있는 사람입니다.
롯이 요단 계곡의 들판을 바라보고 느낀 점이 무엇입니까?
10절, "온 땅이 물이 넉넉하니 애굽땅과 같았더라"
롯의 마음은 온통 물질에만 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부자가 될까?" "내 양과 소가 늘어 날까?" "어떻게 하면 내가 돈을 벌까?'
물질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 가면서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힘써 일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종종 물질에 실패하면 신앙에도 실패합니다.
물질은 결코 내가 소유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위탁한 것입니다.
물질은 내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겨 준 것이니 내가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을 얻는 것은 내 능력, 내 손이 아니라, 물질을 얻으면 얻는 순간마다 하나님을 기억하며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에게 물질의 축복을 주셨군요, 참 감사합니다.
이 물질을 주님을 위하여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선하게 사용하겠습니다"
감리교 창시자인 웨슬레가 설교를 하는데 어느 노인이 자기 친구를 자꾸 교회 가자고 졸라서 믿지 않는 부자 영감을 교회에 데리고 갔습니다.
목사님의 설교 가운데 "첫째로 돈을 잘 벌어야 합니다" 그러자 부자 영감이 고개를 끄덕끄덕 거렸습니다.
"두번째로 돈을 절약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을 하자 부자 영감이 친구 영감의 허리를 쿡쿡 찌르면서 "목사님! 설교 참 잘하시는군요!" 라고 말을 했습니다.
"세째는 벌어 놓은 돈을 선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라고 말하자, 그 영감이 "어허, 그 마지막 대목이 아까운 설교를 버렸어!"라고 말을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부분의 사람은 버는대는 열심입니다, 내 것으로 만드는데 열심입니다.
그러나 내 것으르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데는 인색합니다.
프랑스의 문학가 까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 '페스트'로 노벨 문학상을 탄 사람입니다.
그가 노벨 문학상으로 상금을 십만불을 받고 파리 근교에 집을 사고 부푼 마음으로 승용차를 몰고 집으로 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아프리카 성자의 슈바이처 박사도 노벨 평화상을 탔습니다.
상금으로 13만불을 받고 덴마크에서 3등 기차를 타고 파리까지 와서 아프리카로 가서 문둥병자를 위한 치료 병원을 지었습니다.
같은 물질이지만 자기를 위해서 쓰여 질 때는 보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쓰여 질 때는 보람이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물질에 욕심을 내다 보면 이 물질 때문에 내 신앙도 다 잃어 버립니다.
우리를 위해, 그리고 이웃과 주님을 위해 잘 사용하라고 준 물질을 잘못 사용하면 내가 물질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나를 지배해 버립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우면 신령한 것을 보지 못합니다.
롯은 그 푸른 풀밭, 기름진 동산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 죄로 말미암아 썩어져 가는 소돔과 고모라가 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13절에 뭐라고 말합니까?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비단 롯만의 일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나의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롯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 일 수 있습니다.
롯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는 구속받은 성도 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직도 세상을 더 사랑하는 성도였습니다.
신령한 것에는 눈이 더 어두어지고 물질에만 눈이 밝았습니다.
오늘날 롯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셋째로 롯은 세속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롯은 세상적인 것을 바라보고 세상적인 것을 취했습니다.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의 눈에는 신앙적인 것과 세상적인 것이 같이 들어 왔습니다.
'여호와의 동산 같고'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신앙적인 곳입니다.
그리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이 없고 하나님이 무시되고 죄악이 있는 세상적인 곳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롯의 눈에는 이것이 똑같은 것으로 보였습니다.
"여호와의 동산"과 "애굽땅"은 서로 같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도는 성결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께서 따로 구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롯의 눈에는 이것이 다 똑같이 보였습니다.
그저 세상적인 축복에만 눈이 어두워, 이것이 마귀가 파 놓은 함정인 줄 모르고, 하나님이 주신 축복인 줄만 알고 무조건 선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성결한 목적을 위해 따로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는 애굽 땅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여호와의 동산'만 있어야 합니다.
내가 에수님을 믿고 에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여 새 사람이 되었으면 옛 모습은 벗어 버리고 새로운 모습으로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의 모습이 믿지 않을 때나 지금이나 똑 같습니다.
믿는 그리스도인 내가 믿지 않는 불신자들과 똑같이 생활합니다.
누가 예수 믿는 사람이고 누가 예수 안 믿는 사람인 줄 구분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집집마다 대문에는 교회 문패가 붙어 있고 한국에 기독교인이 천만이라고 하지만 삶의 현장속에는 그리스도인이 어디 붙어 있는 지 눈을 부릎뜨고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속화하는 것을 단호하게 배격해야 합니다.
사회가 그리스도화 되어야지 우리 그리스도인이 왜 세속화 됩니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아주 오래 전의 일입니다.
이 목사님이 선교부로부터 받은 돈을 교회마다 나누어 주러 시골 교회를 찾아 다녔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여관에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루도 여관에 들었는데 마침 독방이 없어서 어떤 사람과 함께 합숙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보니 꼭 그 관상이 도둑놈 상이라 시골 개척교회에 보조해 주는 그 헌금을 훔쳐 갈까 봐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먼저 있던 사람도 이 목사님을 보니 도독놈 상이라 이 사람도 “혹시 저 사람이 밤에 내 돈을 훔쳐 갈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돈 훔쳐 갈까 봐 목사님은 밤 이편에 누워서 잠을 자지 못하고 자기가 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에헴’ ‘헤헴’합니다.
상대편의 사람도 방 저편에 누워서 자기도 안 자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 계속해서 몸을 뒤적 거리며 부스락 거립니다.
두 사람이 밤새도록 ‘헤헴’ ‘부시락’ ‘헤메’ ‘부시락’ 거리며 잠을 한 잠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침이 되어서 밥상이 들어 왔는데 겸상이라 둘이서 같이 식사를 합니다.
이 때 목사님이 식사 기도를 하고 밥을 먹으려고 하니까 상대방의 사람이 묻습니다.
“선생님, 예수를 믿습니까?” “예, 나는 목사입니다”
그러자 상대방은 깜짝 놀라면서 “예, 저는 아무 교회 장로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서로 몰라서 상대방을 도둑놈으로 오인하고 밤새도록 ‘에헴’ ‘부시락’거렸습니다.
우리의 모습 속에서 이런 일들이 없습니까?
한 직장에서 수년동안 같이 있어도 상대방이 예수 믿는 사람인 줄 모릅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일로 그가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압니다.
왜 그렇습니까?
내 모습을 보니까 도무지 예수 믿는 사람 같이 보이지 않습니다.
세상 속에 푹 박혀서 사람들과 똑같이 적당히 거짓말하면서 적당히 살아 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를 거부해야 합니다.
사람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사람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세상을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극복하며 세상을 변화 시키며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마자 세속적이 되고 교회마저 세속화가 될 때 이 사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사회가 부패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한가락 남은 양심은 우리 그리스도인이고 한줄기 남은 불빛는 바로 교회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속주의를 배격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교회에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비록 자기들은 세상 욕심에 찌들고 죄로 타락하더라도 교회만은 순결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세상이 타락할 대로 타락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보루는 진정한 교회입니다.
우리는 세상속에서 살아가되 세상에 속해 살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고 개혁시키며 세상의 죄악을 막고 사회를 정화 시키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이제 결론을 내리겠습니다.
내가 예수 믿으면서도, 내가 그리도인이면서 그리스도가 없는 것 같이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신앙인이면서 전혀 신앙인 답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롯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앙인답게 행동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쫓아가는 세속적인 성도 였습니다.
이런 롯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닙니까?
내가 예수 믿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법이 아닌 세상을 쫓아가며 세속화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빨리 이런 곳에서 벗어 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다시 찾읍시다.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나의 모습으로 말미암아 믿지 않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사회가 예수 믿는 나 때문에 복을 받는 사회가 될 것입니다.
세속화를 배격하는 바른 그리스도인, 예수를 닮은 참된 그리도인의 모습이 우리의 삶속에서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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