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잃게 되면 잃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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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잃게 되면 잃으리라
본문: 창세기 43장 1-15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지난 주간에 한국의 신문에 한국 부부들의 행복지수, 만족 지수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그 가운데 부부 싸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대답이 있습니다.
부부간의 싸우는 첫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부 싸움은 경제적인 문제, 돈 문제 때문이 제일 많다고 합니다.
저는 미국 와서 저의 아내와 많이 싸웠습니다.
싸우는 상황과 이유는 항상 정해져 있습니다.
몇 가지 문제 때문에 싸웁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싸울 때가 언제인지 아십니까?
운전할 때 입니다. 저의 부부 싸움은 대부분 운전할 때 이루어 집니다.
저는 비교적 길 눈이 밝아 어디든지 잘 찾아 갑니다.
때로는 길을 갈 때는 빠른 길을 가기 위해 아는 길이 아니라 새로운 길을 개척합니다.
그러다가 길을 잘못 들어 서서 더 늦어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성미가 급한 편이라 교통이 막히면 대부분 기다리지 못하고 샛길로 갑니다.
그러다가 더 늦어집니다.
때로는 빨리 가려고 새치기를 하면서 차선을 바꾸었는데 앞 차 때문에 더 늦게 갑니다.
그러면 항상 아내의 잔소리가 뒤 따라 옵니다.
“당신이 하는 것은 항상 그래! 항상 줄을 잘못 써서 나 까지 고생한다”라는 말 등.
그러면 차 안에서 말로 전쟁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처음 가는 낯선 길을 갈 때는 아내에게 지도를 보고 방향을 말해 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내가 우물주물 거리거나 혹은 아내가 가르쳐 준 것이 틀린다고 생각하면 내 임의대로 내가 생각한 길로 그냥 가버립니다.
그러다가 길을 잃고 헤맵니다.
그러면 아내의 신경질이 또 시작됩니다.
“길을 그렇게 잘 알면 당신이 지도 봐!” 하면서 지도를 덮습니다.
운전하면서 어떻게 지도를 봅니까?
그러면 이번에도 저의 고성이 아내를 향해 돌진합니다.
어떨 때는 화가 나서 지도를 빼앗아 지도를 보면서 운전을 합니다.
이런 상황이 길을 갈 때마다 자주 되풀이 되니까 운전하면서 자주 싸웁니다.
모르는 길을 갈때 그 길이 맞는 길이라는 보장도 없지만 그 길이 틀렸다는 증거도 없습니다.
기왕 주어진 길이기 때문에 그 길이 맞냐? 틀리냐? 다툴 필요가 하나도 없는데도 단지 모르다는 이유 때문에 서로 다투며 불평하면서 갑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는 야곱과 그의 아들들이 다시 양식을 사러 가는 문제를 두고 두려워하면서 심하게 다투는 모습이 나와 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 양식을 사러 가는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정해 놓은 올바른 길입니다.
아주 심한 흉년이 임할 줄 알고 미리 요셉을 애굽에 보내서 그 길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의 길을 가면서도 서로 싸우고 다투고, 원망하고 상처를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길이 하나님이 예비하신 축복의 길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감사해야 하는데 오히려 두려워하고 불평하고, 기뻐해야 하는데도 기뻐하지 못하고 서로를 원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인데도 나는 알지 못하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시려고 지금 잠시 어려움을 주는데 나는 그것이 싫다고 안 가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에 나타난 야곱과 그의 아들들의 모습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면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축복이 축복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첫째로, 예기치 않은 일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2년째 심한 기근이 계속 되어 양식을 전혀 얻을 수가 없습니다.
애굽에서 가져온 양식은 다 떨어졌습니다.
다시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 와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누구 하나 애굽에 가서 양식을 구해 오자는 말을 하지 못합니다.
애굽의 총리가 너무 엄하게 아우 베냐민을 데려오지 않으면 자기 얼굴을 보지 못한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베냐민을 보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그냥 있으면 굶어 죽게 될 것이고 막막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을 얼마나 많이 당합니까?
이 힘든 이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지 두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아 가고는 있는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살아갑니다.
진퇴양난입니다.
때로는 너무 힘들어서 죽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가 선택할 길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 길은 하나님 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찾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 주시는 길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구원자이시고 나의 목자입니다.
이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혼자 힘으로 빠져나갈 방법이 전혀 없는 인간에게 유일한 출구는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내가 당하는 이 모든 예기치 못한 어려움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고통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고 의미가 있습니다.
고통을 다루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식구들은 이 어려움속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합니다.
6절, “이스라엘이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너희에게 오히려 아우가 있다고 그 사람에게 고하여 나를 해롭게 하였느냐”
아버지 야곱의 말의 뜻이 무엇입니까?
“왜 하필이면 베냐민 애기를 꺼냈어? 베냐민 애기만 하지 않았어도 이런 일이 없을 거 아냐?”
“왜 너희가 진실을 말해서 나를 괴롭게 하느냐?”는 말입니다.
야곱의 지난 날의 모습을 잘 대변하는 말입니다.
야곱이 어떤 사람입니까?
거짓말의 명수, 속임수의 대명사입니다. 그는 일생을 거짓말로 살아 온 사람입니다.
아버지를 속여 형의 축복을 가로 챕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 삼촌을 속여 거부가 됩니다.
평생을 속임수로 살아 왔던 야곱입니다.
그의 문제는 하나님을 믿고 은혜를 받고 난 뒤에도 여전히 그 모습이 변화되지 않아서 기회만 되면 세상적인 사고가 살아 납니다.
“왜 너희는 속임수를 좀 쓰지! 애굽 총리에게 속임수를 쓰지 못했는냐?”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야곱의 모습이 나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내가 예수 믿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은 부분은 없습니까?
예수를 이만큼 오래 믿었으면 변해야 하는데 세상적인 생각과 방법이 아직도 내 속에서 그대로 나타납니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 사람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제가 우리 김명수 성도님과 주일 아침마다 차를 같이 타고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눕니다.
김명수 성도님이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답니다.
“교회 나와서 그 좋은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었으면 변해야 하는데 도무지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고 합니다.
신앙 생활을 한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바뀌지 않는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사악한 인생인가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변화 되어야만 합니다.
물론 우리의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끊임없이 씨름하면서 성령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어 우리의 삶이 근본적으로 바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야곱은 문제의 본질을 자꾸 회피하면서 자꾸 아들들을 나무랩니다.
그러자 아들들은 듣다 못해서 이렇게 항변합니다.
7절, “그들이 가로되 그 사람이 우리와 우리의 친족에 대하여 자세히 힐문하여 이르기를 너희 아버지가 그저 살았느냐 너희에게 아우가 있느냐 하기로 그 말을 조조이 그에게 대답한 것이라 그가 너희 아우를 데리고 내려오라 할 줄을 우리가 어찌 알았으리이까”
아들들의 말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진실을 말하고 싶어서 진실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애굽 총리가 그렇게 말할 줄을 알았다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라는 말입니다.
어쩔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못 말한 것이 아니라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말려 들어간 것 뿐이라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성경의 이 사건을 자세히 보세요.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이런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어떤 때는 내가 만들지 않은 사건에 휘말려 들어 갑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자꾸 일어납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닌데 그런 일에 끼어들게 됩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닌데 가다 보니까 자꾸 휘말려 들어가 피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 어떻게 합니다.
그러나 기억 하세요.
내가 의도하지 않은 일이 일어나고, 전혀 생각하지 못한 일이 생기면 그곳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끼어 들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었는데 괜히 끼어들어 거기에 휘말립니다.
그러면 거기에는 어떤 하나님의 비밀이 있습니다.
영적인 눈을 떠서 그것을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전혀 생각지 않은 일에 휘말려서 할수 없이 베냐민을 애굽에 데리고 가야만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 결과는 22년간 헤어진 형을 만나고 아들을 만나는 축복된 사건입니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합니까?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의도하지 않는 사건, 내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내게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세요.
불평과 두려움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으로 받아 들이세요.
거기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의 손길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은 없습니다.
단지 그 당시에 설명이 안되는 사건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필연이고 하나님의 섭리고 하나님이 복주시는 사건입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아시지요?
내가 약한 그 때가 곧 강함이라.
사도 바울의 몸에 병이 있어서 하나님께 간절히 크게 간구했는데도 그의 병이 났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뜻과 축복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한다.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곤란을 기뻐 하노니 이는 내가 약할 그 때에 곧 강함이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이런 감격과 고백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큰 은혜와 축복입니다.
어떤 상황과 환경속에서도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하여 믿음으로 승리하는 축복이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포기해야 축복이 있습니다.
포기해야 구원이 있습니다.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내려가는 문제에 대하여 야곱과 그의 아들들은 질질 끌면서 어떻게 하든지 끝까지 버텨 보자는 버티기 작전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 양식이 떨어져서 더 이상 버틸려야 버틸 수 없는 상황이 왔습니다.
이 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유다가 적극적으로 나섭니다.
지금까지 유나는 형제들 사이에서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는 요셉을 애굽에 팔자고 제안한 사람이었고, 한 때 타락하여 형제들을 떠나 이방 여자와 살았고 자기 며느리와 불륜의 관계를 맺어 자식을 낳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가 가장 어려울 때,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서 아무도 이 문제를 책임지지 않으려고 눈치만 보고 있을 때 전면에 나서서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이 사건으로 유다는 일약 야곱의 집에 지도자가 됩니다.
야곱이 죽기 전에 유다를 축복하면서 유다의 자손에서 이스라엘의 왕이 나온다고 예언했습니다
유다는 다른 형제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할 때,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이 어려운 문제에 뛰어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유다 지파를 통해 다윗 왕가를 주시고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를 보내셨습니다
자기가 책임지겠다고 나선 유다는 엄청난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의 거룩한 제사장 지파가 어느 지파입니까? 레위지파
왜 하나님께서 레위지파에게만 제사장과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종드는 일을 맡기신지 아십니까?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십계명을 받을 때 백성들이 산 밑에서 무엇을 했습니까?
금송아지를 만들고 절을 하면서 이것이 너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낸 신이라고 망령된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유일하게 하나님의 편에 섰던 지파가 레위 지파입니다.
그들은 모세의 명령을 따라 칼을 차고 나와서 우상숭배하는 동족을 찔러 죽여 하나님께 헌신하였습니다. (출 32장)
이것이 바로 레위 지파가 축복받고 제사장직이 주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는 언제 나타납니까? 가장 어려울 때입니다.
그럴 때 자신의 모든 인격과 생명과 재산을 걸고 나서서 책임지는 그 사람이 믿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에 지도자를 세울 때는 이런 사람들을 세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소에는 말을 번드르하게 하다가도 정작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는 뒤로 빠져 버립니다.
학벌이나 재산이나 사회적인 신분만 보고 직분을 맡기니까 교회에 문제가 많이 생깁니다.
그 삶이 위기 때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교회를 지킬 사람인가? 도망칠 사람인가?를 간파해야 합니다.
유다는 부족한 점이 많은 사람입니다.
허물투성이고 한 때는 신앙적으로 깊이 타락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곱의 집이 가장 어려울 때 가만히 있지 않고 자신의 모든 인격과 생명을 걸고 그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이것 때문에 축복을 받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실수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그 후의 행동입니다.
‘자신의 실수를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데서 그 사람의 진가가 나타납니다.
사실 주위가 어려울 때 가만히 있어도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가 어렵고 주위가 어려울 때 가만히 있었다고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누가 뭐하고 비난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결정적으로 어려울 때 입을 다물고 있으면 영원한 엑스트라로 남을 수 밖에 없습니다.
유다는 나서서 아버지 야곱에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인정하게 합니다.
야곱은 현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부분은 할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고 슬적 넘어 가려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는 설사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이 있더라도 현실을 현실로 인정하게 만듭니다.
아버지에게 베냐민의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것은 아버지를 죽이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서슴치 않고 베냐민 이야기를 꺼냅니다.
사실 우리는 그럴 때가 참 많습니다.
아프고 고통스러운 부분은 할 수 있는 한 건드리지 않고 긍정적이고 좋은 쪽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곪아 있는 부분은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연고만 잔뜩 발라 주는 것과 같습니다.
뻔히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을 아무리 상담을 많이하면서 위로하고 격려해 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잘못된 관계를 돌이키지 않는 이상 그는 치유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은 ‘회개’라는 말을 싫어 합니다. ‘치유’나 ‘상담’은 좋아해도 ‘회개’는 좋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회개를 말하는 것이 고통에 빠진 사람을 더 고통스럽게 한다고 생각해서 할 수 있는 한 입에 올리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지적인 결단으로 회개를 해야 합니다.
믿음은 현실을 외면한 채 무조건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유다의 모습을 보세요.
9,10절,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 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우리가 지체하 지 아니하였다면 벌써 두 번 갔다 왔으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라는 말이 무슨 말입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가 베냐민을 책임지겠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죽는 일이 있다고 해도, 자기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는 말입니다.
담보는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데 담보로 보증을 섰는데 그가 그 돈을 갚지 못할 때 자기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 써야 합니다.
은행에서도 담보가 있으니까 돈을 빌려 줍니다.
담보를 서면 그 사람이 빚진 자의 모든 채무를 다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보증을 서 줄 때에는 “그 사람이 빚을 못 갚으면 내가 다 갚겠습니다. 저 사람 때문에 자신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생각할 때 서 줍니다.
르우벤과 유다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다는 자기 두 아들을 담보하겠다고 했지만 유다는 자기 자신이 담보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유다가 왜 베냐민을 담보하겠다고 나셨습니까?
누군가가 희생하지 않으면 이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베냐민을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형제들 중에서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사람도 없습니다.
애굽 총리의 마음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유다는 자기가 희생하지 않으면 이 집안을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모든 것을 걸고 가족들을 다 살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모습이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뛰는 사람을 당할 수는 없습니다.
세계에서 한국 사람들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영국 사람들은 ‘너 살고 나 살자’고 합니다. 유태인은 ‘너 죽고 나 살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너 죽고 나 죽자’라고 합니다.
너 죽고 나 죽자는 것만큼 무서움은 없습니다.
그러나 왜 너 죽고 나 죽습니까?
모든 일이, 심지어는 싸우는 일이 나 살자고 싸우는 일 아닙니까?
그렇다면 너도 살고 나도 사는 방법을 택해야만 합니다.
같이 사는 방법이 있는데 왜 다 죽는 방법을 택합니까?
모두 사는 제일 좋은 방법은 ‘너도 이기고 나도 이기는 방법’입니다.
나 죽고 너 살자면 모두가 다 삽니다.
두 쪽 모두가 사는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성공합니다.
드디어 유다의 말에 의해 야곱의 마음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애굽의 국무총리에게 줄 뇌물을 보냅니다.
가나안 땅의 좋은 물건들과 돈을 싸 가지고 갑니다.
이것이 야곱의 주특기입니다.
문제가 있으면 뇌물을 싸들고 가는 것입니다.
형 에서를 만날 때도 그 방법을 썼습니다.
물건으로 사람의 마음을 사로 잡고 돈으로 사람의 마음을 구워 삶으려는 처세술을 쓰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모든 것이 두려웠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두려움에 사로 잡히면 인간은 물질고 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을 쥐어야 안심합니다.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합니다.
멀리 계신 하나님보다는 가까이 있는 돈이 자신을 구원할 것 같이 느낍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만나면 마음에 자유함이 있습니다.
야곱이 드디어 베냐민을 포기합니다.
13절,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14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이것이야말로 야곱에게는 최대의 결단, 피눈물 나는 결정입니다.
진퇴양난의 상황이 되었어도 안 내놓겠다고 아등바등하다가 마지막 죽을 때 다 내놓고 갑니다.
그러나 이 결단이 야곱을 위대한 믿음의 사람으로 남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기해야 축복이 임합니다.
포기해야 구원이 임합니다.
야곱이 베냐민을 포기하는 것은 그를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축복이 임하고 그의 가족에 구원이 임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가진 것을 포기해야 축복이 임합니다.
예수 믿으면서도 기쁨이 없고 평안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포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세상을 모두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니까 안됩니다.
어떨 때는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어떨 때 우리에게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하게 만듭니다.
반드시 포기해야만 축복이 임할 때가 있습니다.
결국 일찍 포기하느냐? 늦게 포기하느냐?하는 문제이지 어떤 일들은 어차피 포기해야 합니다.
억지로 뺏기느냐? 자진해서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신앙 때문에 잃는 것이 많습니다.
때로는 친구도 잃고 세상적인 욕망도 잃고 자신의 계획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채움 받는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포기하면 채워 주십니다. 비우면 채움이 있습니다.
비우는 것을 거부하면 채워질 수가 없습니다.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복을 더 채웁니까?
은혜라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그릇을 만들어야 담을 수 있습니다.
비우는 사람에게 주시는 복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자식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식이 아무리 소중하다 해도 24시간 늘 붙어 있을 수는 없습니다.
결국 결정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자녀를 책임져 주신다는 것을 믿으세요.
내가 키우면 나 정도밖에 안됩니다. 양육권조차도 하나님께 드리세요.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라”
어차피 우리는 이 세상에 빈손으로 오지 않았습니까?
어차피 이 세상에 ‘나의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그 분의 것을 가져 가실 수 있습니다.
특별히 주님을 위해 포기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냥 잃게 내 버려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포기한 것 이상으로 채워 주십니다.
내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을 포기하면 하나님은 기뻐하시면서 포기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을 베풀어 주십니다.
포기가 잃는 것이 아니라 얻는 것이라는 것을 믿으시고 주님을 위해 세상 것들을 포기함으로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째로,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14절,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 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결코 포기할 수 없고 맡길 수 없는 베냐민을 이제는 손을 펴서 하나님께 맡깁니다.
야곱이 포기하니까 이제 자녀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러자 이제 하나님이 보이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하노라”
얼마나 멋있습니까?
이것이 야곱이 항복한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복받는 순간입니다.
물론 그가 이것 저것 다 해보다가 안 되니까 마지막에 하나님을 바라 보지만 그가 하나님을 바라 보는 순간은 그에게 축복의 순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역사는 항상 이렇습니다.
나의 두손을 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 나의 문제를 맡겨 드릴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인생의 노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 볼 때 하나님의 축복이 임합니다.
신기하게도 문제는 풀리고 말할 수 없는 평화가 찾아 옵니다.
한국의 목욕탕에 가면 반드시 이런 말이 써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시기 바랍니다. 맡기지 않은 물건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않습니다.
주인 백”.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냥 지나가지만 물건을 잃어 버린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 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게 됩니다.
맡기지 않고 잃어 버렸을 때 후회하게 됩니다.
우리 인생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삶속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을 것 같이 설쳐 대지만 사실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내가 최선이라고 한 선택들과 결정이 나로 하여금 궁지에 몰아 넣기도 하고 최악의 상황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내가 관리하고 있다가 실패 한 후에 후회해도 소용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생애, 나의 자녀, 나의 미래, 나의 모든 것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나 내가 붙잡고 있으면 내가 책임져야 합니다.
나에게 걱정이 많고 스트레스가 많은 것은 내가 모든 것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맡으면 걱정 없습니다.
마음의 평화가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길 때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십니다.
더 이상 이 문제는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가 되십니다.
내가 문제에 대하여 관심 갖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오히려 더 관심을 가지십니다.
내가 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하여금 내 일을 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고갯길을 질주하는 버스가 있었습니다.
승객들은 긴장하며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주하는 버스 안에 열살쯤 된 꼬마가 아주 천진난만하게 울으며 놀고 있었습니다. 옆에 있던 어른이 물었습니다.
“꼬마야 무섭지 않니?”
“아니요” 꼬마가 대답했습니다.
“정말 안 두려워?” “녜”
“왜 안 두려우니?” “아빠가 이 차를 운전하시는데요”
이 꼬마는 운전하시는 자기 아버지를 믿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하면 실수하고 실패할 수 있지만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결코 실패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왜 못 맡기십니까?
그것은 나의 삶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할 할 만큼 절박함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일이 잘 안되고 내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긴다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맡길텐데 하나님 없이도 모든 일들이 잘 되어 갑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이 모든 것들을 내 마음대로 해 버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축복이 아닙니다.
하나님 없이 이룩한 성공은 축복이기 보다는 오히려 저주입니다.
때로는 나의 삶이 막히고 잘 안될 때가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구할 수 있고 하나님을 찾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자신감이란 말이 소용 없습니다.
자신감이 아니라 주신감, 주님을 믿는 주신감이 필요하고, 자존심이 아니라 주존심이 필요합니다
여러분! 오늘 성경 창세기 43장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43장에 들어가서 가장 큰 변화를 못 느끼셨나요?
이름이 바뀝니다.
누구의 이름입니까? 야곱의 이름입니다.
야곱의 이름을 뭐라고 부릅니까? 이스라엘
42장에서는 “야곱이”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5절에 한번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부르고 다 ‘야곱’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다가 43장에 와서는 ‘야곱’의 이름을 다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어 부릅니다.
이스라엘은 누가 주신 이름입니다.
창세기 32장의 브니엘에서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이름입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간사한 자’, ‘남을 속이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놀라운 축복의 이름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좋은 이름을 하나님으로부터 받고도 계속해서 야곱이라고 불렀는데 오늘 이 사건 이후로는 성경이 계속해서 야곱의 이름이 ‘야곱’이 아니라 드디어 ‘이스라엘’이라고 부릅니다.
이 어려운 상황을 맞이하여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 ‘드디어 하나님께 축복을 받아냈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부릅니다.
그의 삶이 이 후부터 달라졌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고 난 후의 나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예수 쟁이” “성도”아닙니까?
나의 이름이 백의흠, 아무개가 아니라, 예수 믿는 아무개, 혹은 백목사입니다.
이제 우리의 이름대로 불러야만 합니다.
내가 예수 믿고도 그 이름의 값을 하지 못했는데 이제는 이름값을 해야 합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아무개라는 말이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일에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세상적인 적인 욕심은 포기하고 하나님께 나의 삶
전체를 맡길 때 가능합니다.
이제까지는 예수 믿으면서도 예수 믿는 모습이 우리 속에 나타나 있지 않았지만, 이제부터는 이스라엘처럼 “잃으면 잃으리라”는 신앙으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이 잃는 순간이 아니라 얻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이 고통의 순간이 아니라 축복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우리 모두에게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넘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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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