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팔려 가는 꿈쟁이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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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팔려 가는 꿈쟁이 요셉
본문 : 창세기 37장 25-36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저는 요새 뉴스를 통해 보면서 ‘인간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영화나 TV에 보면 액션이나 폭력 영화가 나옵니다.
거기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너무 보편적이고 쉽습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쉽게 죽입니다.
영화를 볼 때는 그냥 영화로 보았지만 그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하니까 끔찍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건이 단순히 영화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의 현실속에서 많이 일어납니다.
한국에서 이런 기사가 났습니다.
고등학교 1학년의 한 학생이 선천성 판막증이라는 일종의 심장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중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몸이 많이 허약했고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악용하여 그 반에 있는 다섯 명의 학생들이 1년여동안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그 아이를 학대했습니다.
걸핏하면 한적한 곳으로 끌고 가서 두들겨 패고 라이터 불로 손을 지지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서 비틀고 원산폭격을 시키곤 했습니다.
결국 견디다 못해 경찰에 고발을 했고 이 다섯명의 학생들이 연행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런 짓을 했느냐?”는 질문에 한 아이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통을 못 이겨 비명을 지를 때 쾌감을 느꼈습니다.”
얼마나 섬뜩하고 잔인한 말입니까?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잔악상을 보여 주는 단편적인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4천년 전에도 그대로 있었습니다.
옛날이나 오늘이나 부패한 인간의 죄된 모습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형들의 모습속에서 인간의 잔악상이 그대로 나옵니다.
어떻게 동생을 죽이려고 합니까?
어떻게 부모를 죽이고 자식을 죽이고 남편과 아내를 죽일 수 있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궁덩이에 쳐 넣은 다음에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요셉이 그 안에서 죽어 가고 있는데도 그들은 태연하게 자기들끼리 음식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굳어 있었고 도대체 무엇이 죄이며 자기들이 지금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깨달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이 비단 요셉의 형들만의 이야기 입니까?
아닙니다.
나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이 형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될 수 있습니다.
나도 상황과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 형들처럼 이렇게 잔인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팔려 노예로 끌려 갑니다.
참으로 슬프고 비참하고 가련한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속에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이 사건 속에는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가는 섭리가 있습니다.
그 사건을 다루시고 요셉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습니다.
사람이 악한 일을 행하지만 그 사건에 개입하셔서 선한 일로 이끄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오늘 이 사건에 나타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살펴 보면서 우리 자신의 추한 모습을 발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을 잃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이들이 어떤 사람입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악의 화신입니다.
이들 속에서 무서운 죄성을 발견합니다.
시기심과 질투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시기심이 미움과 분노로 바껴서 결국에는 기회를 잡아 동생까지 죽이려 하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들은 마치 죄로 뭉쳐지고 죄로 빚어진 듯한 사람들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죄만 보여 주는 사람들입니다.
자기 동생을 잡아서 죽이려고 하면서도 이것이 얼마나 엄청난 죄인지 모르고 있습니다.
25절,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떼의 이스마엘 족속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약대들에 향훔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그들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지금 동생은 구덩이 속에서 두려움과 허기로 죽어 가고 있는데 형이라는 사람들은 밖에서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음식은 원래 편하게 먹어야 체하지 않습니다.
동생을 죽이려는 미움이 가득차 있고 옆에서 동생이 죽어 가는데도 음식이 목구멍으로 들어 갑니까?
“형님들! 살려 주세요”라는 동생의 피꿇는 외침이 귀를 찌르는데도 편안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정상적인 사람입니까?
이렇게 태연하게 음식을 먹고 있다는 것은 동생을 죽이는 일이 전혀 마음에 고통스럽지 않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들은 이 엄청난 죄 앞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누렸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을 전혀 의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의식하는 신앙이 있다면 두려워서 감히 어떻게 그렇게 합니까?
또한 마음속에 있는 양심의 등불을 다 꺼 버렸기 때문입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살아 있다면 마음이 약해지고 갈등이 생기니까 아예 철저하게 마음문을 닫아 버리고 양심을 죽여 버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옆에서 동생은 죽어 가고 있는데도 편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습니다.
지금 요셉의 형들은 철저한 어두움에 빠져 있습니다.
이들은 한마디로 말하면 사람을 죽이고 그 인육을 먹은 지존파 같은 고대 가나안땅의 지존파들입니다.
막가는 인생을 살았던 막가파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흥분되지 않습니까?
“어떻게 저렇게 나쁜 놈들이 있을까?”하고 분노가 일어나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말씀은 그런 악인들을 보고 분개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런 악인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의 모습은 오늘날 나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사람들처럼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이들과 똑같이 행동은 하지 않지만 우리 모두가 우리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왜 이렇게 잔인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그것은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아주 작은 문제, 시기심 때문입니다.
이것은 사실 별 것 아닙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는 아주 작은 문제이기 때문에 더 무섭습니다.
우리에게도 있고 우리도 충분히 이들처럼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기심과 질투심, 그리고 미움과 분노를 극복하지 못하면, 우리도 언제든지 이와 같은 무서운 모습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육신의 정욕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 그것이 발동하여 나를 사로 잡으면 나도 무서운 ‘지존파’가 될 수 있고,
요셉의 형들과 같이 잔악한 괴물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있는 죄의 뿌리와 육신의 정욕을 어떻게 처리하느냐?’하는 것입니다.
악한 생각은 자랍니다.
악한 생각은 초기에 그 생각을 통제하고 다스리지 않으면 계속 자라납니다.
그래서 그것이 악한 말로 나타나고 나중에는 약한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악한 생각이 악한 말을 낳고 결국에는 악한 행동으로 발전합니다.
우리의 삶이 경건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의 하나는 생각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이 내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도구도 될 수 있지만 사탄이 사용하는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가 무너져 가는 과정을 보면 사탄이 가룟 유다의 마음속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습니다.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나중에 행동으로 옮겨졌습니다.
생각부터 시작됩니다.
나쁜 생각, 악한 생각은 초기에 그 생각을 붙들고 주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그 생각을 없애거나 성령으로 조절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 생각을 그대로 놓아 두면 자꾸 자라게 됩니다.
요셉의 형들은 악한 생각을 통제하지 못하여 끔찍한 범행을 저지릅니다.
형들은 요셉을 죽이려고 하다가 맏형인 르우벤의 제안에 따라 요셉을 구덩이에 던집니다.
그러다가 이스마엘 상인이 지나가자 그들에게 은 20개를 받고 팔아 버립니다.
이들이 요셉에게 관대해서 죽이지 않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26,27절,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자 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아들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분명히 죄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직접 죽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서 죽게 하는 편이 훨씬 더 책임을 줄일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책임이 줄어 듭니까?
세상에서는 그것을 문제 삼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직접 살인이나 간접 살인이나 똑같이 유죄입니다.
유다가 다른 형제들에게 요셉을 죽이지 말고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자고 제안한 것은 그의 마음이 관대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자기들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지 않고 요셉을 제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말은 그럴듯하게 합니다.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정말 동생이요 골육으로 생각한다면 왜 노예로 팔아 먹습니까?
그 당시 노예로 팔려 간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한 고통입니다.
정말 자기의 동생으로 생각했다면 노예로 팔지 말아야죠?
직접 죽이는 것보다는 팔아 버리는 편이 양심의 고통도 적고 경제적으로도 득이 되니까 이런 제안을 한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 중에서 요셉을 살리려고 했던 유일한 인물은 가장 죄 많은 맏형 르우벤입니다.
그는 형제들이 요셉을 죽이자고 할 때에도 그러지 말고 구덩이에 던지자고 했습니다.
요셉이 상인에게 팔리고 난 후에 나중에 그것을 알고 애통해 했습니다.
자기 옷을 찢으며 “아이가 없도다 나는 어디로 갈까”하면서 절망했습니다.
르우벤이 왜 요셉을 살리지 못했을까요?
르우벤은 장자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혔습니다.
맏형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요셉의 형들이 어떻게 합니까?
31,32절, “그들이 요셉의 옷을 취하고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 채색옷을 가져다 가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얻었으니 아버지의 아들의 옷인가 아닌가 보소서 하매”
그들은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은 것으로 가장했습니다.
그래서 숫염소를 죽여서 요셉의 옷을 그 피에 적셔 자기들이 직접 가져가지 않고 다른 사람편에 아버지에게로 보냅니다.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들의 모습이 얼마나 간교합니까?
어떻게 10명이나 되는 형제들이 이 거짓 증거에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요셉의 형들은 멀쩡한 동생을 노예로 팔아 버린 후, 죽은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자신들의 기억에서 영영 지워 버리기로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요셉의 형들의 모습이 얼마나 사악합니까?
그러나 요셉의 형들만 욕하지 마세요.
우리도 얼마든지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가 교훈을 삼으라고 주셨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런 범죄를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하고 주신 것입니다.
두번째로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나옵니다.
요셉이 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말을 듣자 야곱은 크게 슬퍼 합니다.
33-35절, “아비가 그것을 알아 보고 가로되 내 아들의 옷이라 악한 짐승이 그를 먹었도다 요셉 이 정녕 찢겼도다 하고,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그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야곱의 애통은 그의 아들들이 생각한 것 이상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이렇게 운 적이 없습니다.
야곱은 지독한 사람입니다. 절대로 울지 않는 사람입니다.
형 에서가 사백명을 거느리고 자기를 맞으러 올 때도 자기의 가족들을 먼저 보내면서 자기는 살려고 한 사람입니다.
그는 부모님이 돌아 가셨을 때에도 울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는 딸이 강간을 당했을 때도 울지 않은 사람이고 아들들이 죄를 범해도 울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그토록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죽었을 때도 울었다는 기사가 성경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없어졌을 때에는 오래 오래 울었고 그의 슬픔은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열명의 다른 아들보다도 한 아들 요셉이 더 소중했습니다.
마치 이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과도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것은 너무나도 큰 사랑의 표현입니다.
하나님에게는 이 아들이 전부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를 살리기 위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는 하나님은 너무나 마음이 아파서 해도 빛을 잃게 만들었습니다.
야곱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요셉의 죽음은 다른 아들들의 모든 죄보다 더 큰 슬픔을 야곱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지어 온 모든 죄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하나님 앞에서 더 고통스럽고 안타까웠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우리의 그 어떤 죄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큼 값지지 못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요셉을 은 20개에 팔았지만 야곱에게는 요셉이 그의 모든 재산이었고 모든 삶입니다.
야곱은 요셉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옷을 찢고 슬퍼했습니다.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옷을 찢을 때 그 한 사람의 옷만 찢는 것이 아닙니다.
그 형제와 그 아비의 옷도 찢고 결국에는 자기 옷도 찢습니다.
요셉의 옷이 찢어 질 때, 르우벤의 옷도 찢고, 아버지 야곱의 옷도 찢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누군가의 꿈을 키워 줄 때 그 한 사람의 꿈만 키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가족 전체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그를 통하여 축복받게 될 많은 사람의 꿈을 키워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에서도 그렇지 않습니까?
한 사람이 잘 되면 다른 형제들이 그 그늘 안에서 먹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는 남의 옷을 찢는 것보다 그의 큰 꿈을 이루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의 꿈을 키워 준 것이 아니라 꺾어 버렸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범했지만 지금이라도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잘못을 빌고 용서을 받아야 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지금이라도 아버지 앞에 사실을 말하고 용서를 빈다면 해결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인류가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내 고집대로 살아왔음을 고백하고 나의 남은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해서 멸망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죄를 범했다 할찌라도 하나님 앞에 나와서 자복만 하면 하나님은 용서해 주십니다
성경은 분명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이 말은 신실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나의 실수와 잘못과 죄악을 아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실하신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의로우신 하나님이십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처벌해야 마당합니다.
의롭다면 죄를 면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죄를 처벌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용서하시는 것이 아이라 이미 그 죄릎 처벌하셨기 때문에 용서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처벌하면 나는 끝장입니다. 도저히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기에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고 예수님으로 하여금 내 죄를 대신 담당케 하셨습니다.
용서는 선물입니다.
주님께서는 값없이, 조건없이 용서하십니다.
이것은 무조건적인 약속입니다. 그러나 값싼 용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다신 것입니다.
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하시고 나서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내가 너를 용서 하노라”라고 말하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용서와 은혜가 있기에 오늘도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찬양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용서를 믿음으로 받아 들이시고 주님 앞에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보세요.
야곱의 이 비극적인 슬픔의 원인 제공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야곱 자신입니다.
자녀들을 편애했습니다.
자녀들의 잘못을 야단치지도 못하고 제대로 감독도 못하는 무능한 아버지였습니다.
종종 가정에서 그런 일이 발생합니다.
가정에서 아버지가 가장으로서의 권한과 의무를 행사하지 못하고 무능한 상태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부부사이, 아버지와 자녀들 사이에 대화가 단절되고 아내와 자녀에게 무슨 일이 일아나고 있는지 조차 모를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지금 나의 가정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습니까?
나의 자녀들이 지금 아빠 엄마인 나에게조차 말 못하는 어떤 아픔 속에 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의 아내의 외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나의 남편의 괴로움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제가 서울에서 목회할 때 다른 교회에 다니시다가 저의 교회에 나오신지 1년 정도된 안수집사님 가정이 있었습니다.
생활은 여유가 있는 가정이고 딸도 프랑스에 유학을 보낸 가정인데 그런데 대학 다니는 아들이 집 문지방에 목을 매여 자살했습니다.
유서 조차도 남기지 않았습니다.
그 때 저는 그의 어머니의 모습을 똑똑히 기억합니다.
부모는 경악하여 얼굴이 사색이 되어 땅을 치며 통곡합니다.
“도대체 무슨 고민이 있었길래, 죽을 일이 뭐가 있기에 그렇게 죽느냐?”
제가 그 장례를 치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습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을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야곱처럼 무능하고 무책임한 가장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 같은 가장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야곱의 아들들의 거짓말은 사실 야곱의 죄의 결과이다.
야곱의 아들들의 이 나쁜 습성은 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그 아들들의 거짓말은 아버지로부터 전수되었다.
아버지 야곱이 거짓말의 명수입니다.
아버지를 속이는데 명수입니다.
그는 아버지 이삭과 형을 속이고 형의 축복을 다 가로챘습니다.
삼촌 라반의 집에서도 삼촌을 속이면서 삼촌의 재산을 가로챘습니다.
이제 거짓말의 명수인 야곱이 그의 아들에게 속임을 당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을 거짓말을 그의 아버지 야곱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부전 자전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이 없습니다.
야곱은 요셉의 찢겨지고 피묻은 옷을 보고 슬픔과 고통으로 생의 기쁨을 잃고 일생을 보냅니다
요셉을 만날 때까지 야곱의 삶은 통곡과 탄식의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이것은 이미 엎지러진 일이며 일어난 사건입니다. 돌이킬 수도 회복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떠나 보내야 할 흘러간 강물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지나간 일만 되새기며 통곡하면서 한숨만을 쏟으면서 인생을 살수는 없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과거의 어두움이 어떤 것이든 그 어두움에서 벗어나 광명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승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 환난을 당하면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환난 속에서 탄식하고 고통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팔을 붙잡고 하나님이 주시는 힘을 얻고 살아야 합니다.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주님만을 의지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세번째로, 요셉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주신 꿈이 큰데도 요셉에게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정반대로 가장 비참한 자리까지 낮아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요셉이 높아지는 꿈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에게 나타난 현실은 말씀과 정반대로 인생 밑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습니까?
왜 하나님의 꿈 때문에 오히려 인생의 가장 비참한 자리까지 떨어지는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인간의 생각과 다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르우벤은 요셉을 살리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르우벤이 없는 사이에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나중에 르우벤이 그것을 알고 옷을 찢고 “나는 나는 어디로 갈까”하면서 탄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르우벤의 생각과 같지 않고 하나님의 방법과 같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뺄셈을 할 때 뎃셈을 하시고, 덧셈을 하실 때 뺄셈을 하십니다.
세상 일이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세상 일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되는 되는 것입니다.
나의 생각은 잘못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좋은 것 같아서 그렇게 되면 좋을 것 같지만 나중에 그것이 나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이고 영원하신 계획을 가지고 계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입니다.
간혹 우리가 생각대로 잘 되지 않아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나?’하는 의심을 가지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하신 다른 길이 있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 일은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어느 상황에서든지 하늘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르우벤은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고 절망했습니다.
만일 르우벤의 생각대로 되어 요셉이 집으로 돌아 갔다면 애굽의 총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7년 기근 때 야곱의 가족은 굶주려 죽었을 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르우벤이 옷을 찢고 슬퍼했지만 요셉 때문에 자기도 살고 세상 사람들도 살았습니다.
르우벤의 생각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감사합니다.
우리의 생각과 다르고 르우벤의 생각과도 다르지만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감사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고 섭리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끝까지 하나님을 붙들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간혹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전능하심을 믿는 사람도 인생의 밑바닥 까지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서 다시 솟아 오를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전에 반드시 우리의 믿음을 달아 보십니다.
과연 어떤 장애나 어려움이 있어도 끝까지 말씀을 신뢰하고 붙드는지 시험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것을 그냥 주시지 않습니다.
말씀을 붙드는 사람들을 먼저 깊은 구덩이에 쳐 넣습니다.
나의 삶을 묶고 있는 밧줄을 결코 두려워 하지 마세요.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밧줄의 마디를 풀어 주십니다.
밧줄에 있는 마디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디는 풀리게 되어 있고 풀기 위해서 마디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의 훈련을 끝내시면 그 마디를 풀어 주십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쓴잔을 주시는 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쓴 잔을 기꺼이 마시는 사람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실수도 선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형제들의 나쁜 행동조차도 선용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신 그 꿈을 이루실 때까지 결코 쉬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께서 진행하시는 놀라운 역사는 항상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주님 안에서 가졌던 꿈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미국 오면서 가졌던 꿈을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광스런 황금의 면류관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의 강철 면류관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고난 중에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꿈을 생각 하세요.
밧줄에 묶여 애굽에 노예로 끌려 가는 요셉을 하나님은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요셉 혼자서 애굽에 내려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함께 애려 가십니다.
하나님이 기관차가 되어서 요셉을 이끌고 애굽으로 내려 가십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이 아니라 축복된 길이고 영광된 길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의 길에 어떤 어려움과 고통이 있다 하더라도 이 길이 하나님 함께 하시고 나에게 축복된 길이라고 믿으시고 꿈을 잃지 않아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