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지혜로운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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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지혜로운 선택
본문 : 마태복음 7장 24-29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 말씀은 예수의 산상설교의 마지막 부분입니다.
우리는 지난해 1월 첫주에 시작하여 지난 16개월동안 약 40여 주에 걸쳐 마 5장, 6장, 7장에 나오는 주님의 산상보훈에 대하여 살펴 보았습니다. 영국의 위대한 설교자 캠벨 몰갠의 증언처럼 이 산상수훈은 ‘왕 중 왕의 대선언’이고 ‘하늘과 땅을 진동시킨 교훈’입니다. 이런 복된 교훈을 연구하는 것이 얼마나 커다란 기쁨인지 모르겠습니다. 더욱더 이 교훈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은 저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특권이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저의 빈약한 지혜와 지식, 그리고 보잘것 없는 영적 능력으로 말미암아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주일 저녁 설교를 마치면 그 다음 주일에 해야 될 설교에 대한 부담이 먼저 옵니다. 월요일부터 설교를 마치면 그 다음주일에 해야 될 설교에 대한 부담이 먼저 옵니다. 월요일부터 고민하고 씨름하면서 책상에 앉아 몇시간을 헤매다가 단 한 줄도 쓰지 못할 때가 여러번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말씀에 사로 잡히면 밤을 지새우며 설교를 작성하다가 새벽에 저의 집 옆에 있는 절에서 울리는 새벽 타종 소리를 듣고 펜을 놓습니다.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발견하고 수없는 씨름과 고민속에서 한편의 설교가 완성되었을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저의 마음 속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이 말씀을 전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합니다. 제가 산상수훈을 강해하는데도 수많은 훌륭하신 선배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서적들을 읽으면서 그들이 말씀을 보는 각도와 강조점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말씀과 비교하면서 설교의 골격을 잡습니다. 이 작업이 저에게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동안 산상수훈만을 설교하기 위해서 약 30여권의 책, 오천 페이지에 달하는 책을 읽으며 그들의 사상을 취했습니다. 때로는 많은 부분이 그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의 독특한 한 면을 발견하여 그것을 확대시키기도 하고 축소시키기도 합니다. 너무 많은 시간들이 걸리는 힘든 일이었기에 저는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내가 앞으로 설교는 준비할 때는 이렇게 미련스럽게 안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산상수훈의 마지막 부분을 설교하면서 모든 것이 감사할 뿐입니다. ‘왕 중 왕의 대선언’을 보잘것 없고 부족한 제가 끝까지 설교할 수 있게 붙들어 주신 하나님께 모든 영광과 찬양을 드립니다. 그리고 주일마다 저에게 말씀을 전할 수 있도록 강단을 허락해 주신 우리 목사님과 또 지겹고 졸리고 듣고 거북한 말씀과 저의 목소리를 끝까지 인내하면서 들어 주신 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 말씀을 설교하면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여러분드렝게 주시는 말씀이기에 앞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이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는 말씀을 전하면서 제가 은혜를 받았습니다. 이 주님의 산상설교처럼 아픈 것이 없었습니다. 이 말씀을 들을 때처럼 저의 양심을 찌르고 저의 마음을 슬프게 한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라” “말씀대로 살아라”는 이 멧세지가 선포될 때마다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제가 부끄럽고 괴로웠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붙들고 회개하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저에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팔복을 강해 할때는 하나님이 저에게 주시는 복들을 되새겨 보았습니다. 주기도문을 설교할 때는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설교하는 동안 제 자신의 기도의 말, 기도의 태도, 기도의 열심이 달라지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 가슴속에 기도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며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말씀에 부딪힐 때는 이웃에 대한 원망, 시기, 질투가 남아 있던 저에게 이 말씀은 대단한 도전이었고 저의 마음을 녹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제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할 때는 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몇번이나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말씀으로 전해 보겠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오늘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이 마지막 설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과의 이야기입니다. 집을 반석위에 짓는 사람과 모래 위에 짓는 사람과의 비교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여기에서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갈라놓는 구별점이 됩니까? 그 기준점은 하나입니다. 본문 24절을 보시겠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은 사람 같으리니” 그리고 26절을 보시겠습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행치 않느냐? 가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는 기준입니다. 우리 중에 누가 지혜로운 사람이고 누가 어리석은 사람인지 구별하기가 참 곤란합니다. 이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구별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예배에 참석하고 신앙의 형태도 같고 하나님을 향하여 ‘주여’ 라고도 부릅니다. 그래서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를 구별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구별하는 방법이 있다면 말씀을 듣고 행하느냐? 행치 않느냐? 입니다. 이 두사람의 모습을 보십시오. 우선 이 두사람은 같은 소원을 가졌습니다. 두사람은 다 집을 짓고 싶어했고 거기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어쩌면 이 두사람은 같은 설계도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틀림없이 이 두사람은 같은 형태의 집을 지었을 것입니다. 이 두개의 집이 다 완성된 후에도 다른 사람들을 아무도 이 두집의 차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상당히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까지는 그 차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기 시작할 때에 이 두개의 집에 현저한 차이가 드러났습니다. 모래 위에 세워진 집이 쉽게 무너짐에 반해서 반석위에 세워진 집은 그대로 견고하게 서있었습니다. 무슨 차이입니까? 기초의 차이입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그 집을 반석위에 세운 사람입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이 말씀이 우리가 행해야만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을때 구원 얻습니다. 이 말씀은 믿음을 전제로 한 행함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내가 매 주일마다 주앞에 나와 “주여 주여” 라고 부른 그 믿음이 얼마큼 참된 믿음입니까? 그것은 행함에 의해서만 증명될 수 있습니다. 저는 가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서 고민에 빠집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 진정한 신앙인가?”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누구보다도 교회에 열심히 나옵니다. 누구보다도 찬송 잘 부르고 누구보다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러나 정작 생활속에서 중요한 문제에 부딪혔을때 신앙과 상관없이 행동합니다. 교회 내에서는 신앙 좋다고 자부하는 많은 분들이 교회 문만 나서면 그가 신앙인인지 불신앙인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기도원에 가서 큰 은헤를 받은 권사님이 집에 오자마자 호랑이 같은 시어머니로 바뀝니다.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 이 사람은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참된 믿음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듣고 행하는 믿음입니다. 거짓된 믿음은 듣고 행하지 않는 믿음입니다. 내가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면 그 믿음은 저절로 행함으로 나타낼 수 밖에 없습니다. 누가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이 말씀을 듣고 행하기를 소원하며 또 행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의 말씀을 듣고 주의 교훈을 받고서 이 말씀을 따라서 날마다 자기의 한걸음 한걸음을 계속해서 옮기고 있는 사람, 이 사람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 흔들 수가 없습니다. 심판의 날에 주님 앞에 담대히 설 수가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디에다 집을 짓습니까? 모래 위에다 짓는 것이 훨씬 쉽습니다. 그것은 돈도 적게 들고 노력도 적게 들면서도 빨리 지을 수가 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그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입니다. 현재로선 모양만 갖추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분간은 마음이 안심됩니다. 그가 만약 “내가 이 모래 위에 집을 지으면 5년후, 10년 후에 이 집이 어떻게 될 것인가?” 를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할 수만 있더라면 그는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 속에 혹시 모래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까?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도 믿음의 형태는 있습니다. ‘주여 주여’하는 지식도 있도 예배에 참여하는 열성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신앙이 그의 삶과 인격에 연결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들어도 도무지 그 말씀에 대한 행함이 없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없습니다. 주일날 아침에 교회에 나가면 됩니다. 그리고 남에게 뒤지지 않을만큼 적당히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할 줄 알고 헌금도 내면 됩니다. 성경도 상식적으로 교양인의 필수도 정도로 알면 됩니다. 종교적인 모든 모양과 형식만 갖추면 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모래위에 집을 짓는 신앙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입니다. 적당적당하게 신앙생활하고 내가 그저 기독교인이라는 명칭만 가지고 있고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이 없는 것,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쉽게 하려고 하지 마세요. 신앙생활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천국가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독과 눈물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지지 않는 고통의 짐을 지고 가야만 합니다. 이 길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 가신 그 쓰리고 아픈 골고다의 언덕을 주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거기에는 쓰러짐이 있고 아픔이 있고 멸시와 조롱이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 죽을때만 먼 훗날에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지고 가는 것입니다. 나의 매일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나의 계획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어 살아가면서 쉽게 쉽게 신앙생활하려는 나의 못된 자아를 쳐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못된 욕심, 시기, 질투, 교만, 미움 그리고 욕정, 이 모든 것이 싸우면서 주님만 바라보며 나갈려니까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이런 것과 싸우면서 어렵지만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 이것이 바로 반석 위에 집을 짓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한사건이 있습니다. 1929년 일본으 동경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입니다. 그 지진 속에서 모든 건물이 다 무너졌는데 무너지지 않는 빌딩하나가 있어서 사람들의 주목을 끌였습니다. 이 빌딩은 미국의 라이프 형제라는 사람이 지은 빌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처음 이 빌딩을 설계하고 이 빌딩을 지을때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람의 설계에 대해서 불평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기초 공사에 설계대로 시행하면 과다한 비용을 지출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지진이 일어났을때 그 지진 속에서 이 빌딩만이 견고하게 서 있을 수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여러분의 집은 견고하십니까? 여러분의 신앙은 그 기초가 견고한 반석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까? 아니면 섣부르게 형태만 갖추어 놓은 신앙은 아니십니까? 주일날 아참에 한번 나와 예배 드리면 그것으로 나의 일주일에 신앙생활을 다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으십니까? 설교 한편 듣는 것이 내 인격과 정신에 수양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서 듣고 그 후에는 잊어버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이 말씀을 듣고 내 영혼이 변화되고 내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십니까? 우리는 점검해야만 합니다. 내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에 기초하고 있는가? 내 삶이 말씀이라는 반석에 의해 세워지고 있는가? 참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와 말씀에 기초하여 내 인격의 성숙, 내 삶의 변화를 가져옵니다.
드디어 모래 위에 세워진 집과 반석 위에 세워진 집, 이 두집의 진실성을 시험하는 심판의 날, 위기의 그날이 찾아옵니다. 27절에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집에 부딪히며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고 하였습니다. 보통 때는 진짜 신앙과 가짜 신앙을 구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같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같이 찬양하고 같이 기도하고 예배에 참석하고 나갈 때도 함께 나갑니다. 그러나 문제는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른 그날입니다. 그때에 내 신앙은 어떻게 움직이며 어떻게 반응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두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을 우리 인생의 역경에다 견줄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날을 맞이할때 그 역경 속에서 내 신앙은 견딜 수가 있겠습니까? 그 속에서도 빛을 발합니까? 우리는 종종 내가 신앙 좋다가도 내 인생의 역경에 찾아오면 내 신앙이 뿌리채 흔들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본의 아니게 어떤 심각한 사건에 휘말려 마음 깊은 곳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받았을때 삶의 지표마저 흔들립니다. 내가 그렇게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충격을 받았을때 내 신앙이 뿌리채 흔들리며 뽑혀집니다. 이런 상처와 역경에 직면할때 누구나 한동안 정신적 혼란은 물론 신앙적인 갈등까지 생깁니다. 믿음마저 몹시 허약한 상태로 밑바닥을 헤매면서 내가 가졌던 구원의 확신마저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런 인생의 역경이 올때 내 신앙이 과연 반석위에 세워진 신양이냐 아니면 모래 위에 세워진 신양이냐를 점검하는 기회를 삼으시기 바랍니다. 역경이 찾아올때 인생의 시련이 찾아올때 시험과 아픔과 질병이 찾아올때 그때도 내 신앙은 빛을 발합니까? 지금은 건강합니다. 그러나 내가 건강을 잃어 버릴때 나의 신앙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금은 나에게 좋은 직장이 있고 재물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장과 재물을 잃었을때 내 신앙이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지금은 내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를 뿔뿔히 떠나고 고독한 인생의 들에 홀로 던지움을 받을때 내 신앙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반응합니까? 지금은 내가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신뢰했던 그 사람이 나에게 실망을 주고 내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남겨 놓아 한번 새겨진 상처의 흔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때 내 신앙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부는날 그때에도 내 신앙은 빛을 발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신앙은 산 신앙입니다. 우리는 사단의 시험이 우리를 향해서 도전해 오고 있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탄의 시련과 역경이 내 삶에 찾아올때 나의 신앙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로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분다는 더 중요한 의미는 마지막 심판날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 거룩한 심판의 보좌 앞에 나와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은 나를 인정하실까요? 그날 무엇보다도 주님은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을 구별하실 것입니다. 양과 염소를 가른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천국과 지옥을 선포하고 그곳이 우리 앞에 기다린다고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어느 곳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습니까? 혹시 우리 중에 화가 페루치노와 같이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까? 그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가 임종할때 성직자가 급히 찾아와서 복음을 전하며 마지막 기도를 해 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페루치노는 ‘나는 회개하지 않고 죽는 사람이 저 세상에서 어떻게 되는지를 알아 보고 싶소’하고 성직자의 기도를 거절했습니다. 얼마나 용감한 사람입니까? 그러나 이런 사람을 가리켜 성경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천국과 지옥이 있다고 증언합니다. 주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심판날이 있다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히 예수 믿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멸망받을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러분 이 말씀에 근거해서 나는 그때 하나님 앞에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분류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심판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구별해 놓으신 다음에 주님께서는 우링게 또다시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믿음 안에서 삶을 살았느냐?” “너는 예수는 믿었지만 그 믿음의 기초에서 어떤 행함으로 일생을 살아 왔느냐?” 고 주님은 묻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다 집을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짓는 집은 각기 다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을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고전 3:11절 이하에서 말합니다.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무나무 풀이나 집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
같은 터를 사용했지만 지어지는 집의 종류가 다르다는 사실을 이 말씀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금과 은과 보석과 같은 집이 있는가 하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집을 지은 사람도 있습니다. 평상시는 똑같은 집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별하는 날이 있습니다. 언제입니까? 불이 났을 때입니다. 불이 나면 나무나 풀이나 짚은 금새 태워 없어지고 맙니다. 그러나 금이나 은이나 보석은 아직도 견고하게 그대로 서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같은 그리스도란 터전을 사용했어도 인생을 사는 삶의 방식은 다릅니다. 만약 하나님 앞에 인정될 수 없는 삶을 살았다면 그는 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라는 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구원을 잃어 버리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주님만 믿으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은 얻기는 얻되 불가운데서 구원 얻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얻되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 사건 아십니까? 1971년 12월 25일 바로 성탄절 아침에 서울 대연각 호텔에서 불이 났습니다. 얼마나 크게 났는지 TV로 계속해서 중계해서 저도 봤습니다. 그때 죽은 사람이 169명인가요? 아주 끔직한 사건으로 우리의 뇌리에서 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남산 관광호텔에서 일어났는데 그때 신문에 실리 사건이 너무 멋있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최소한의 옷을 걸치고 창문에 매달려 있는데 소방대원이 고가 사다리를 놓고 그 여인을 구출하는 장면입니다. 마치 그 모습은 ‘불가운데서 얻은 구원’인데 그야말로 ‘팬티바람으로 부끄럽게 얻은 구원’이었습니다.
여러분 불이 나도 하나도 타지 않고 끄덕하지 않고 천국가야지 모두 타버려 ‘팬티 바람으로 천국백성’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물론 구원받지 못한 것 보다는 부끄럽게라도 구원 얻었으면 감사합니다만 우리는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구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바르게 믿고 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이 믿음에 근거하여 여러분은 어떻게 행하며 삶을 사셨습니까? 오늘 말씀은 참된 믿음을 전제로 합니다. 이 참된 믿음은 진정한 삶을 가져와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요 13:17)
다시 묻습니다. 당신이 참으로 이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으셨다면 말씀을 따라 살아가십니까? 이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사십니까? 날마다 이 말씀을 따라 행하는 거룩한 삶과 노력이 여러분 속에 있습니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믿음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며 변화시킵니다. 이 믿음이 역경과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말씀을 따라 행하는 거룩한 믿음이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서는 날 내가 주님을 만나고 주님으로부터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제 네 주인의 기쁨에 참예하라’는 말을 듣습니다. 성경을 붙들고 다만 지식과 변론만 하던 사람들, 그러나 그들속에 말씀따라 살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날에 주님 앞에서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떨 것입니다.
이 말씀을 받아 들이는 믿음의 기초 위에서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주님은 말합니다.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라” 나는 신앙의 집을 굳건한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