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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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본문 : 마태복음 6장 9-13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은 주기도문의 마지막 강해시간입니다.
우리는 지난 8주동안 주기도문의 각 부분 부분에서 주님이 우리에게 하기를 원하시는 기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주기도문을 음미하고 깊이 생각해 볼때마다 이 말씀이 완벽하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사용해 보면 사실 더 덧붙일 기도도 더 덧붙일 신앙고백도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신앙의 모습을 점검해 볼때도 내가 주님이 가르친 기도 앞에 바로 섰는가?를 보면 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을 요구할때도 이 기도대로 바로 구하고 있는가?
이처럼 주기도문을 기준으로 하여 생각해도 될 정도로 이 기도는 완벽합니다.
주기도문의 마지막 부분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을 주기도문의 송영이라고 부릅니다.
송영이란 마지막 찬양 즉 끝찬송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부분은 주기도문에 따른 일종의 부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주님께서 이 기도를 가르치실때 이 마지막 부분을 말씀하셨는지 확실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을 보시면 이 부분에 ( )로 쳐있고 거기에 4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의 각주 4를 보면 고대 사본에 이 괄호 내 구절이 없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오래되고 유력한 성경 사본에는 이 부분이 없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분이 아마 주님 후에 초대교회에서 예배용으로 덧붙여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히브리인의 관습으로 볼때 모든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찬양하는 송영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역상 29:10에 보면 다윗이 자기는 성전을 지을 수 없었지만 자기 아들 솔로몬이 완성시킬 그 영광을 누리면서 성전 질 재료를 준비합니다.
물질을 준비하고 그는 기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송축을 받으시옵소서’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든 기도는 반드시 하나님을 찬미하는 송영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참으로 좋은 모습이고 우리가 본받을 점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의 기도는 늘 간구로만 끝나야 합니까?
왜 우리의 기도는 늘 하나님께 달라고 조르는 것으로만으로 끝나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왜 우리 기도에는 없습니까?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베풀어준 그 은혜를 찬양하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의 영광을 왜 찬양하지 못합니까?
기도의 시작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향했다면 당연히 결론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있사옵나이다’ 하고 아버지 하나님께로 끝나야 합니다.
옛성도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기도할때 감사와 찬양이 있는 기도만이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돌진한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찬양으로 끝나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이 맟도록 기도하시고 예루살렘으로 갈때에는 ‘저희가 찬미하며 나아갔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의 결론을 맺는 이 찬양은 너무나도 아름답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그러면 주기도문의 이 결론 부분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로 ‘나라’라는 의미입니다.
이때 나라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라 아버지께 속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기도문의 내용 가운데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부분을 살펴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 곧 ‘다스림’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의 가장 중요한 것은 황금보석 꾸민 집이 아니라 왕되신 우리 주님의 다스림이라고 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왕으로 모시고 그분이 내 마음을 다스릴때 내 마음이 천국의 만족을 얻습니다.
천국의 기쁨을 갖습니다.
그리스도의 다스리을 받을때 내 삶이 빛나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날마다 내 삶이 주님의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내 속에 들어 오셔서 내 삶 하나 하나를 갖섭하시고 역사하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나를 다스리는 일에 지쳐 버리지나 않으셨습니까?
주님께서 우리 가정을 다스리면 우리 가정이 천국의 즐거움을 누립니다.
우리 교회가 주님의 다스림을 받을때 우리 교회안에서 천국의 기쁨을 맛봅니다.
그래서 주님의 다스림을 받는 곳은 그곳이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 그 어디든지 천국입니다.
우리는 내가 내 인생의 다스리는 부분이 얼마만큼인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 삶에 어떻게 요구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다스리는 영역이 있다면 그 영역을 주님 앞에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나의 가정생활이 나의 직장생활이 나의 하루의 삶이 주님의 다스림인가? 내 욕심인가?
늘 살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를 다스리면 나는 실패합니다.
좌절합니다. 쓰러집니다.
단 한순간이라도 나를 나의 손에 맡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죄악이 가득찬 인간의 본능입니다.
나약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나를 나의 손에 맡기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손에 맡겼음을 감사 드립시다.
연약하고 늘 쓰러지는 나의 손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한 손이 나를 붙들고 계심을 감사 합시다.
내 삶의 모든 일들이 내가 하루 하루를 눈을 뜨고 또 하루의 문을 닫으면서 가장 강조해야 할 것은 주님께서 나를 어떻게 다스리고 나를 어떻게 인도하시나 날마다 살펴 보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나라가 주님께만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서 예배 드릴 때는 ‘주여 주여’ 하면서 주님의 지배를 받지만 집에서나 직장에서는 ‘나요 나요’하면서 내가 지배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경은 그렇게 하라고 써 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현실대로 세상대로 살라고 부름받은 사람이 아니라 주의 다스림대로 살라고 부름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야만 합니다.
어떤 사람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왜 당신만 그렇게 괴상하게 신앙생활하느냐? 왜 당신만 세상을 그렇게 어렵게 사느냐?”
아닙니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영광된 십자가가 아닙니다.
칭찬의 십자가가 아닙니다. 쓰리고 아픈 십자가입니다.
좌절의 십자가입니다. 고통과 괴롬의 십자가입니다.
골고다를 오른 십자가입니다.
둘째로 이 기도는 권세도 주님께 속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권세는 독재자의 권세가 아닙니다.
우리 위에 군림하여 우리를 압제하고 탄압하는 권세도 아닙니다.
이 권세는 은혜와 사랑을 목적으로 하는 참된 권세입니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는 자신의 힘을 빌어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자기 힘으로 자기 능력으로 모든 일들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 인간이 얼마나 나약합니까?
얼마나 보잘것 없습니까?
얼마나 무력하고 자주 쓰러집니까?
나약한 자기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만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손에 조그만 가시하나 박혀도 그것때문에 아파서 끙끙대며 괴로워하는 인생입니다.
우리를 나약한 우리 손에 맡기지 않을 것을 감사합니다.
나를 나의 손에 맡기지 않고 그 권세가 있는 하나님의 손에 맡김을 감사합시다.
두번째 종류의 사람은 사탄의 힘을 빌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도행전 8장 18절 이하에 나타나는 것처럼 돈으로 성령의 권능을 사려 했던 시몬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도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표적을 본 시몬은 그 능력을 갖고 싶었으나 신앙이 없었으므로 돈으로 사려 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나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사탄에게서 구합니다.
우리는 여러해 전에 영국과 아르헨티나가 포클랜드 전쟁을 할때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외친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승리만 할 수 있다면 사탄하고도 손을 잡겠다.”
많은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해 마귀하고도 손을 잡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사탄과 짜고 남을 속입니다.
대학입시에 합격하기 위해 사탄과 타협하여 신앙을 버립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모르는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명예와 영광을 위해 필요한 능력을 사탄에게서 구합니다.
그들은 성공을 위해 사탄 앞에도 무릎을 꿇습니다.
그들은 자기의 행복과 영광을 위해 사탄과 기꺼이 타협합니다. 대단히 위험한 모습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탄의 힘을 빌어 일하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때문에 주님께서는 마지막 심판의 보좌 앞에서 이루어질 사실을 마 7장 22절 이하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마지막 심판의 날 예수님 앞에 나온 많은 사람들이 “주님 나는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쳤습니다.
나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뜻밖에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사용했지만 실상은 사탄의 권세를 빌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교회에는 신앙을 빙자한 수많은 거짓된 어둠이 지배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된 사탄의 정체를 알지 못한채 능력을 받을 수만 있다면 정체 불명의 우상 앞에 조차 기꺼이 기도하려 합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요 15:5)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느니라’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은 자신의 힘이나 사탄의 힘을 빌어 해놓은 일을 주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을 하기를 원하신다면 최후의 심판의 날 하나님 앞에 인정 받을 수 있는 생의 자취를 남기기 원하신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런 세번째 종류의 사람, 즉 하나님의 능력을 갖고 사는 사람,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함께 하시고 그를 축복해 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
권능은 하나님께 속하였다’ (시 62:11)고 성경이 말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모든 일을 가능케 하시는 분이 주님이신 것을 알아 주의 능력으로 일했습니다.
그리고 일이 성취될 때마다 능력의 원천이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영원히 참 권세가 있습니다.
이 권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권세입니다.
그 권세가 오늘날 우리 성도들 사이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강력한 힘입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립니다. 죽음 앞에 정복 당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보다 더 큰 힘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부활의 능력입니다.
이 부활의 권세 이것이 오늘도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떠는 나에게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드리라”(사 41:10) 하신 그 권세로 우리를 오늘도 붙잡아 주십니다.
이 부활의 권능이 우리의 생활 속에서 역사해야 하며 우리는 이 권능으로 살아야 합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며 주님께만 의존하여 인생을 살고자 할때 그는 그의 능력을 공급해 주십니다.
절망적인 환경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내신 부활의 능력이 역사함으로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제시합니다.
나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인도의 손길과 능력의 손길을 보시면서 살아갈때 우리 속에 기쁨이 넘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1519년 어느날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부패한 카톨릭의 거대한 세력과 맞서서 싸우다가 도저히 혼자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실망과 좌절 속에 빠져 있었습니다.
내일이면 그는 교황의 법정에 서서 혼자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치열한 재판을 받으러 가야 합니다.
그래서 그는 어찌할 수 없어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합니다.
그때 주님의 부활의 권능이 루터의 영혼을 사로잡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날 그는 일어나 하나님으로부터 위대한 능력을 공급받고 위대한 찬송시를 기록합니다.
바로 찬송가 384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나에서 우리를 구하려 내시리로다 이장수 누군가 주예수 그리스도 만유의 주시라 당할자 없으니 반드시 이기리로다”
하나님은 실망과 좌절에 빠져있는 루터에게 부활의 능력을 주신 것입니다.
종교 개혁의 과제를 달성하는 능력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내 인격 속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거대한 능력이 부활의 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활의 능력을 체험할때 우리는 ‘주는 나의 힘이요 내 생명이요 내 기쁨이고 희망이다’고 외칠 수 있습니다.
이 부활의 권능을 하나님 앞에 엎드려 믿음으로 구하여 좌절과 실패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슬기로운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영광도 주님께 속한 것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니다’ 영광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아무도 어느 누구도 주님께 있는 그 권세와 영광을 빼앗아 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셨을때 사도 요한은 예수님을 가리켜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 찬란한 영광이 오직 하나님에게만 있습니다.
어느날 주님은 사랑하는 세 제자 베드로, 야고보, 요한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 갔습니다.
그때 홀연히 주님이 변하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나타납니다.
이 영광을 목격한 베드로가 “주여 여기가 좋사오니”라고 고백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영원히 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하늘 나라의 영광을 마치 영화 보는 것 같이 보여 주었습니다.
그 하늘 나라의 영광을 보고 너무 좋아서 ‘주여 나를 빨리 죽여 주소서 그래서 저 좋은 곳 저 영광된 곳에 빨리 가게 해주소서’ 라고 기도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이렇게 좋습니다.
그 영광은 영원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습니다.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듭니다.
잠시 후면 지나갈 그 인생의 영광을 위해서도 사람들은 자기의 모든 힘을 다합니다.
국회의원이란 영광 하나 얻기 위한 공천에도 7:1의 경쟁률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 있는 영광은 4년, 5년하고 지나갈 영광이 아닙니다. 쇠함이 없는 영원한 영광입니다.
언제나 참 만족을 주는 영광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의 심령에 생명을 주고 거룩으로 이끄는 영광입니다.
참 좋은 영광입니다.
그러나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은 두려운 것입니다.
탈무드에 보면 로마의 황제 트리안이 유대인의 유명한 학자였던 여호수아 랍비를 만나 “랍비여 내게 하나님을 보여 주시오. 하나님을 보여 주면 내가 하나님을 믿겠습니다.”
그때 랍비는 “폐하 당신은 하나님을 볼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보면 죽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패한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황제는 “그러나 나는 꼭 하나님을 봐야 믿겠다”고 말합니다.
이때 랍비는 황제에게 “폐하가 정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저 태양을 바라보십시오.” 라고 말합니다.
트리안 황제는 태양을 쳐다 보았습니다.
정오의 이글거리는 태양을 주시하다가 눈이 부신 황제는 고개를 이내 돌리더니 “눈이 부셔 태양을 볼 수 없는걸”했습니다.
이때 랍비가 대답합니다.
“그렇습니다. 폐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저 태양의 광채도 우리는 제대로 못 봅니다. 그런데 어찌 창조주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보면 죽습니다.” 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사람들이 감히 얼굴을 들고 쳐다볼 수 없는 영광입니다.
단지 그 앞의 천사들도 얼굴을 가리면서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주 여호와여”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두려워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완벽하신 절대자 하나님!
내 모든 것을 불꽃같은 눈으로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 앞에 설때 사람들은 회개할 수 밖에 없습니다.
나의 추한 모습으로 감히 그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언젠가 이 세상은 하나님의 영광 앞에 무릎을 꿇고 마는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불신하던 이 세계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지금 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그때 후회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그 하나님을 인정할 수 있다는 이 사실에 대하여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주기도문을 신앙고백으로 드리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
단 한순간도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내게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이 내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셔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서 주신 그 귀한 은혜를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다스림을 무시하고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일을 함으로서 버림을 받은 인물입니다.
잠시 그것이 내것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왕이었던 다윗은 죽으면서까지 그 임종의 자리에서도 “여호와여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이관대 푸른 초장 목장에서 나를 부르셔서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나이까?” 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여호와여 이 영광을 나에게 돌리지 마옵시고 오직 우리 주께만 영광을 돌리게 하옵소서”
이것이 다윗의 기도입니다.
영광의 한 순간도 내게 있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도 바울이 뭐라고 고백했습니까?
주님을 위하여 헌신하고 봉사하고 돌에 맞고 태장에 맞고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기고 헌신하고 충성한 하나님의 사람 바울이 “나의 나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영광을 자기에게 돌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일을 해놓고 주님께 충성해 놓고 그 영광을 가로채려고 들 때가 참 많은 우리들입니다.
내가 교회 일을 해놓고 주님께 충성하고 이렇게 헌신하고 봉사한 나를 누가 알아 주지 않으면 좀 서운하게 생각합니다.
내가 주의 일을 함으로 하나님이 영광 받는 것이 아니라 내가 칭찬을 들어야 합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 주지 않으면 칭찬해 주지 않으면 힘이 빠져 그 다음에 일을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게 한 순간도 영광 받음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고 일을 해놓고 그 영광과 칭찬을 내가 듣는다면 나는 정말 무익한 종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날 그 영광된 하나님과 함께 그때 칭찬과 상급을 받을 것입니다.
버마에서 복음을 전한 저드슨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은 브라운대학을 졸업한 후 보스톤의 가장 큰 회중교회의 담임목사로 칭빙을 받았습니다.
그때 그 좋은 자리를 거절했습니다.
그의 모교에서도 교수로 청빙했는데 그것도 거절했습니다.
그런 후에 그는 인도에 선교사로 갔다가 후에 버마에 가서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6년동안 복음을 증거했지만 아무도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13년 되던 해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이 둘도 풍토병으로 죽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독교를 전한다는 이유로 한번 들어가면 죽기 전에는 나올 수 없다는 그 깊은 감옥에 들어가서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으로서는 견딜 수 없는 아픔을 딛고 승리했습니다.
이 저드슨은 그런 어려운 가운데서 계속 복음을 전하는 한편 버마 성경 번역도 쉬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성경 번역하다가 시력을 잃어 글을 볼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다 번역한 후 선교 본부의 요청으로 버마에 영어사전을 편찬하다가 몸이 쇠약해져 미국에 돌아왔는데 그것은 33년만의 귀향이었습니다.
그가 미국에 돌아왔을 때는 너무 몸이 쇠약해져 큰 소리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버마에서 행했던 그 모든 사실들이 미국 전역에 퍼졌습니다.
가는 곳곳마다 그의 얼굴이 보고 싶고 그의 간증을 듣고 싶어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번도 자기 간증을 안합니다.
어느날 한 사람이 이렇게 요구했습니다.
‘저드슨 목사님 우리에게 버마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 주실 수 없습니까?’ 라고 말했습니다.
“재미 있는 이야기라니요? 이미 다 했지 않습니까?”
“아니 목사님이 설교 때마다 하신 구원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늘 듣고 아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그 이야기 말고 그 지옥같은 버마에서 어떻게 그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그 모험담을 듣고 싶습니다.”
그랬더니 저드슨 목사는 정색을 하고 말합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라니요?
주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신 그 십자가의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에게 없습니다.
나는 이것만 전하고 증거하기로 사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나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뛰고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만 떠올려도 감격에 찹니다.
주께서 내게 주신 그 시간에 나의 보잘것 없는 모험담으로 호기심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만족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내가 또 이야기를 한다면 주님밖에 이야기 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저드슨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구속을 참으로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를 나를 위해 주셨던 그 사랑을 날마다 기쁨과 감동으로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자기 삶의 자랑이 아니라 갈보리 산위에서 자기를 위해 흘리신 그 십자가의 주님만 자랑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일을 다 행한 후에 “오직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주님께만 있습니다” 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구속의 역사를 완성시켜 주신 우리 아버지께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있습니다.
단 한순간이 아니라 영원히 오직 그분께만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절망하지 못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불행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떤 슬픔 속에서도 참된 감사와 감격을 누릴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아버지께 모든 것이 영원히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덧붙여서 주기도문 끝부분에 ‘아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아멘’이란 단어는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의 끝에 나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성경에서 몇가지 존귀한 의미를 갖는 단어로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아멘은 확인을 의미하는 말로 ‘진실로 그러합니다’라는 뜻입니다.
둘째, 꼭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기원의 뜻입니다.
‘꼭 그렇게 될 줄로 기대합니다. 믿습니다’
셋째, 충성을 의미합니다.
‘내 충성을 바칩니다’
넷째, 헌신입니다.
‘내 생애를 드립니다’하는 헌신의 결의가 포함된 말이 아멘입니다.
계 3:14 사도요한은 우리 주님을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아멘의 주인입니다.
약속하면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고 이루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나 절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대로 성취될 것을 믿고 아멘하는 순간 우리의 생속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생활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약속을 믿고 날마다의 삶속에서 우리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나님께 드리며 이 기도속에 약속된 모든 말씀과 축복이 나의 삶을 통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우리 이 시간에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이 주기도문을 한 목소리 다시 한번 낭송해 보겠습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