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너희는 세상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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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너희는 세상의 빛
본문 : 마태복음 5장 14-16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산상수훈을 보면 복이 우리들에게 어떻게 다가오는가? 하는 모습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복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습은 마치 구약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그에게 복을 주는 모습과도 흡사합니다.
창세기 12장 1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 “본토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시면서 2가지 축복된 약속을 하십니다.
첫째는 내가 네게 복을 주리라는 것입니다.
장차 너로 하여금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둘째는 네가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는 내가 복을 내리고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두가지 축복된 약속은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통하여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또 다시 약속하고 있습니다.
산상수훈의 첫부분 팔복을 보세요,
이것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받게 하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배부름을,
긍휼히 여기는 자에게는 긍휼함을, 마음이 청결함으로 하나님을 보게 되며,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됨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음으로 온전히 천국을 소유하는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두번째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와 같은 팔복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복의 근원이 되어서 그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상 사람들이 또한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와서 온전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고 하늘나라의 백성이 되면 우리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들이 복을 받습니다.
주님 앞에 나와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여덟가지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이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통하여 복을 받게 되는 진리를 주님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이와같이 주님 앞에 온전히 나와서 구원 받은 사람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너희는 이미 ‘세상의 소금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있으므로 세상의 부패가 정지되어야 하는 소금입니다,
악이 있는 곳에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나타나므로 악이 더 이상 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방안에서 추잡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들어가면 추잡한 이야기가 자연적으로 멈춰집니다.
두 사람이 싸우다가도 세상의 소금인 우리 그리스도인이 다가서면 두 사람의 싸움이 멈추어집니다.
우리는 맛을 내는 소금입니다.
음식물속에 들어가 푹 녹으므로 단맛, 쓴맛, 신맛 등 온갖 유형의 맛들과 어울려서 독특한 새로운 맛을 창조해 내는 소금입니다.
우리가 사회 속에 들어가 녹음으로 죄악과 부정과 불의와 부패가 변하여 그리스도라는 독특한 새로운 맛을 창조해 냅니다.
우리는 이미 세상의 소금으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존재한다는 그 자체가 부패를 방지하고 맛을 내며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던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 말씀은 의미심장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적으로 단순하고 평범한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인정함을 받지도 못하는 평범한 기독교인들을 향하여 너희는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써의 긍지를 갖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중요성과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치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해 줍니다.
우리가 비록 연약하고 평범한 사람들이지만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어두움을 쫒아낼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이 세상은 어둡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어둡다니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오늘날은 거리마다 한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합니다.
전기의 발달로 인하여 낮과 밤을 제대로 구별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밤에도 낮과 똑같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이 어둡다니 무슨 말입니까?
헬라의 한 철인은 대낮에도 등불을 들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환한 대낮에 웬일로 불을 키고 다닙니까?”
그러자 그 철인은 “세상은 너무 어두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너무 어둡습니다.
현대인들은 문화와 지식의 발달도 세상은 잘 계몽되어 환해졌다고 하지만 아직도 세상은 어둡습니다.
밤거리마다 오색불빛으로 휘황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지만 그 속에 더 심각한 도덕적인 어두움이 있습니다.
카바레, 디스코장, 샬롬, 여관, 호텔 등의 아름다운 불핍들이 쉴 새 없이 깜박거리고 있지만 그 속에 죄악의 어두움은 더 깊게 깊게 깔려 있습니다.
명동과 무교동의 찬란한 불빛 속에 깔려 있는 죄악의 어두움을 보십시요.
많은 석학들이 자기의 학식은 세상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지만 도덕적, 영적 어두움은 더 깊어만 갑니다.
왜 이다지도 어둡습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 중에 이 세상 신이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사단이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불신자들의 마음을 미혹하여 세상은 어둡다고 말합니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울수록 사단의 발악은 더욱 심해질 것이고 따라서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질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우리를 향해 세상을 밝힐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두움이 심한 곳일수록 빛은 그 진가를 발휘합니다.
깊은 어두움이 있을수록 빛은 더욱 환하게 빛납니다.
죄악의 어두움이 심하면 심할수록 그리스도인은 더 뚜렷이 나타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악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없이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두움은 빛만이 해결할 수 있듯이 죄악은 예수님만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빛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그리고 계속해서 9장 5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다"
사도 요한도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 예수님을 믿지 못합니다.
참 빛을 비추지만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만은 압니다.
우리만은 참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 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나 자신은 빛이 될 수 없지만 빛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 참으로 빛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그 순간, 나는 빛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그리스도를 소유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발하는 영광스런 빛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5장 8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우리는 주 안에서 빛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살라고 말합니다.
이 빛은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요한복음 3장 20절에 보면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빛이 오면 방은 어두움 속에 있는 모든 정체를 밝힙니다.
어두움을 폭로합니다.
빛 앞에서 모든 것이 탄로나기 시작합니다.
이제 사람들은 두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이들은 빛이 어두움을 폭로하기 때문에 이 빛으로부터 피합니다.
그러면서 그 빛을 어떻게 해서라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빛 앞에 폭로되는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인정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더 이상 어두움에 거하지 않으려고 애씁니다.
우리가 말하든 말하지 아니하든 이 빛은 어두움속에서 숨겨질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나를 칭찬하든가? 아니면 나를 박해 하든가?
나의 삶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산위에 있는 동네는 숨길 수 없습니다.
등경 위에 있는 그 등불은 아무도 숨길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이 빛은 나타탈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닙니다.
장님이 등불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볼수도 없는데 무슨 이유로 등불을 가지고 다니십니까?”
“이 등불이 있어야만 사람들이 나에게 부딪쳐 넘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빛은 나와 남에게 동시에 축복을 제공합니다.
이런 빛이 내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까?
나와 남에게 복을 가져다 주는 빛을 발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는 어두움이었더니 이제는 빛"이라고,
이 분명한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내가 참으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사실, 이 변화는 하나의 당연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왔다는 사실이 나를 빛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빛이신 그리스도와 내 영혼과의 진정한 접촉이 이루어 질 때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의뢰하고 신뢰하는 순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비치기 시작합니다.
이제 문제는 나는 어떤 종류의 빛인가?
나는 얼마나 빛을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빛이 하는 역할은 무엇입니까?
빛은 어떤 일을 합니까?
첫째로 빛은 밝게 합니다.
빛은 어두운 곳을 밝힙니다.
방안에 불을 켜 놓으면 방 안에 어둡던 것이 사라집니다. 쫓겨 갑니다.
마찬가지로 참된 신자가 한 사람 일어나게 되면 그를 통해서 복음의 빛이 발할 때, 어두운 미신, 어두운 풍속, 어두운 사상, 어두운 습관, 어두운 생활이 점점 밝아 집니다.
빛은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하고 빛나게 합니다.
아침 햇살이 동쪽에 솟아 오르게 되면 하늘이 빛나고 아름다워 집니다.
산이 아름다워 지고, 들이 아름다워 지고, 나무가 아름다워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고 빛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여기 참된 신자가 있어서 복음의 빛을 발하게 되면 그 사람이 사는 사회의 풍속이 아름다워지고 생활이 아름다워지고 모든 것이 아름답고 명랑하여 집니다.
빛은 사실대로 나타냅니다.
흰 것은 희게 나타나고 검은 것은 검게 나타냅니다.
먼지는 먼지로 나타내고 쓰레기는 쓰레기로 나타냅니다.
바른 것은 바른 것으로 나타내고 찌그러진 것은 찌그러진 것으로 나타냅니다.
사람의 얼굴도 빛에 보면 반반한 얼굴은 반반하게 나타나고 추한 것은 추하게 나타납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신자가 여기 있어서 복음의 빛을 비칠 때에는 의는 이로, 불의는 불의로, 선은 선으로 그러나 악은 악으로 정결은 정결로 그러나 불결은 불결로 나타납니다.
복음의 빛이 있으므로 검은 염소와 흰양이 갈라지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렇게 좋은 빛을 가지고 방안에 켜 놓았다가 그 위에 말을 갔다가 덮어 놓았습니다.
여기 ‘말'이라는 것은 바구니나 바께스 같은 것을 말합니다.
비추기 위한 불빛을 바구니로 덮어 그 빛을 차단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방안을 밝히기 위해 불을 켜 놓았는데 그것을 바구니도 덮는다는 것은 정신 나간 사람이 아니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실제로 신앙 세계에 있어서 자기 빛을 말로 덮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빛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빛을 나타내기를 부끄러워 합니다.
마땅히 생명의 빛, 진리의 빛, 사랑의 빛을 나타내야 하겠건만 그 빛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이 알지 못하는 신령한 진리의 빛을 깨달아서 이것을 마땅히 말해야 하건만은 말하지 않습니다.
산위에 세운 성이 숨기우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된 신자를 이 세상에 둔 것은 산 위에 세운 성처럼 다른 사람이 다 바라보기 위해서 신자를 이 세상에 두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마 11:32-33)고 말씀하십니다.
빛은 비취어야 됩니다. 빛은 나타내야 됩니다.
아름다운 진리의 빛, 아름다운 생활의 빛을 나타내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여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
우리가 주님 앞에 나와서 복을 받으면 내가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서 나를 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같이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로 빛은 따뜻하게 합니다.
빛은 밝게 하는 역활 뿐 아니라 온화하게 따뜻하게 합니다.
추운 겨울날 불이 얼마나 그립습니까? 따뜻한 아랫목이 얼마나 그립습니까?
추위 속에서 떨어 본 사람이면 따뜻한 하나의 불빛이 생명과도 같이 귀중합니다.
제가 전방에서 군복무할 때 겨울에 훈련을 나가면 평균 기온이 영하 20도입니다.
그 추위 속에서 야영하면서 니낼려고 하니까 끔찍합니다.
그저 성냥개비 하나의 불빛이라도 그립습니다. 그래서 간혹 촛불을 켜놓고 그 촛불에 몸을 녹입니다.
촛불이 얼마나 따뜻하게 해 주겠냐고 생각하겠지만 그것도 굉장히 큰 도움이 됩니다.
철책선에서 일을 때 추운 날씨에는 영화 30도 심지어는 35도까지 내려 갑니다.
그 추위 속에서 밤새도록 하루에 14시간씩 보초를 설려면 죽을 지경입니다.
촛은 두꺼운 솜옷, 털옷으로 껴입어 뒤로 넘어지면 일어서기가 힘들 지경이지만 그래도 춥숩니다.
그런데 아주 추운 날에는 3시간 정도 근무하고 20-30분 정도는 방카에 들어와서 불에 몸을 녹이고 또 나가 보초를 섭니다.
추울 때는 그저 ‘불' ‘불' 밖에 없습니다.
불만 있다면 나의 몸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도 녹여 줍니다.
그렇습니다. 빛은 인생의 마음에 따뜻함을 주고 인간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줍니다.
죄로 말미암아 공포증에 있는 자에게 평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가진 사람은 평화가 있습니다.
따라서 빛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에 따뜻함을 줄 수 있고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형제가 잘못할 때 형제를 용서하면 그리스도인의 따뜻한 그 빛이 그 형제의 마음 속에 들어 갑니다.
쌀쌀하고 경쟁만 있는 살벌한 사회속에서 빛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므로 그들의 마음을 녹여 따뜻한 분위기로 바꿉니다.
가정 속에서 대화가 단절되고 서로를 오해하고 원망하므로 가정의 불화가 있을 때 빛인 우리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가정에 따뜻함과 평화가 찾아 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가르켜 “너희는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셋째로 빛은 변화하게 합니다.
빛이 강렬하게 비치면 색소가 변화합니다.
흑색이 갈색이나 회색으로 변화하고 흰종이도 누렇게 되고 그 외에도 각종 빛깔에도 변색이 됩니다.
심지어는 성능에도 변화가 옵니다.
그래서 약품같은 것은 햇빛에 쪼이지 말라고 씌어져 있습니다.
형체의 변화도 옵니다.
고체가 빛의 열을 발하면 액체가 됩니다.
아무리 단단한 얼음이라도 뜨거운 햇빛속에서 한 두시간 있으면 물로 변해 버립니다.
이처럼 빛의 열이 가해짐으로 물체의 빛깔이 변색되고 체질이 변화되고 형체에 변동이 생깁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빛이신 우리 그리스도에게 접하므로 우리 자체가 변화하여야 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근본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하여 빛이 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더 나아가 나와 관계된 이웃이나 사회에 변화를 주어야 합니다.
나로 말미암아 나의 이웃이 나의 사회가 변화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는 나의 이웃에 변화를 주지 못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아직도 내 자신이 중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중생했더라도 성경 충만함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중생하여 성령 충만을 받은 기독신자라면 내게 관계된 그들에게 변화를 주지 못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그들이 진실로 변화 받은 때는 오순절입니다.
그 때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능력있는 말을 했습니다.
많은 청중들이 제자들이 각각 자기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조롱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의 설교는 3천명이나 세례 받는 큰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방랑자였으나 밤의 옷을 벗고 빛의 옷을 입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이 이 세상과 수많은 사람들을 얼마나 변화시켰습니까?
우리 나라의 김익두 목사님은 예수 믿기 전에 성격이 사납고 불량하여 모두들 만나기를 꺼렸습니다.
황해도 신천에 장날 서는 날 장에 오는 사람들은 모두 오늘 김익두 좀 제발 만나지 않게 해 달라고 성황당에 빌고 장보러 올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중생하여 변화하게 되니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기를 원했고 그가 가는 곳에 모여 들었습니다.
그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되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먼저 할 일은 우리 자체가 그리스도의 빛으로 중생하고 변화되어 능력있는 새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는 빛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중생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에게 빛을 비출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기 전에는 다른 사람을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가 없습니다.
숯은 검은색입니다.
그러나 불이 붙으면 빨간색이 됩니다.
그 후에는 다른 검은 숯들까지도 빨간색으로 만들고 또 뜨겁게 합니다.
검은색 숯 그대로 두고서는 아무리 많은 다른 숯을 옆에 쌓아 두어도 변화가 일어나기 않습니다.
거기에는 불이 붙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캄캄한 세상을 밝게 하고 냉냉하고 차가운 세상을 따뜻하게 하고 변화 없는 세상을 변화케 해야 할 세상의 빛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불이 붙지 않고 빛을 내지 못하고 변화가 일어나지 못하면 세상을 절대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 주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희는 변화되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합니까?
16절,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압지게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삶으로써, 우리의 행위로써, 우리의 인격으로써 빛을 나타냅니다.
우리의 아름다운 삶을 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보고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 옵니다.
우리는 세상의 빛입니다.
이제 문제는 나는 어떤 종류의 빛인가?
나는 얼마나 빛을 발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빛은 스스로 태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아프리카에서 충성스럽고 선교를 하신 선교사 한 분이 계셨는데 마침내 그 분이 아프리카에서 선교의 거룩한 소명을 마치고 죽었습니다.
이 충성스러운 선교사의 전도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이 이 선교사의 죽음을 애도하여 그의 무덤 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겨 놓았습니다.
“당신이 올 때는 어두움이더니 당신이 떠나간 지금 우리는 빛 가운데 있습니다"
빛이 되기 위해서는 빛은 스스로를 태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소금이 되기 위해서는 소금은 스스로를 녹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소금과 빛이 됩니다.
그러나 소금과 빛으로 그 자체의 독특한 그 특질을 상실해서는 안 됩니다.
상실하지 않고 이 어두운 곳에 그리고 이 부패한 곳에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이 부패한 세상은 거룩한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이 어두운 세상은 빛인 사람들을 요구합니다.
자기들은 악하고 잘못하지만은 그리스도인들만은 정직하고 깨끗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내가 그들과 다르다는 것들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끼지 마십시요.
두려움을 느끼지 마십시오.
내가 다르다는 그 사실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그것이 그들을 향한 충격이고 도전입니다.
다르기 때문에 우리는 요구되는 존재입니다.
다 똑같다면 그 사람 하나 빠져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직장 안에서 요구됩니다,
내가 다르기 때문에 나는 내 가정에서 요구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게 나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그렇다고 우리는 그것에 동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타협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특권을 가지고 향기를 발하며 부패를 막고 빛을 비추는 거룩한 사귐속에 우리 자신을 던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상에 속하지 마세요, 그러나 이 세상에 굳게 서서 세상을 이겨 갑시다.
이 세상을 도피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삶을 살아 가시기 바랍니다.
요나와 예수님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나는 부패한 니느웨성 밖으로 도피해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패한 예루살렘 성을 바라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멸망하는 도성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마지막 남은 심지를 태워서 눈물을 흘리시며 최후의 빛이 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죄악이 가득하여 점점 부패하고 썩어가는 이 사회에서 우리로 하여금 나의 마지막 남은 심지 하나를 태우는 최후의 빛이 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말 빛으로써 살아 갑니까?
소금으로 살아 갑니까?
애굽은 요셉을 요구했습니다.
바벨론은 다니엘을 필요로 했습니다.
어두운 나의 직장은 나를 요구합니다.
어두운 나의 가정은 나를 필요로 합니다.
어두운 우리의 사회는 우리를 요구합니다.
참으로 나는 세상의 빛입니까? 세상의 소금입니까?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렇게 들어 써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세상의 소금으로, 나는 세상의 빛으로"
이런 축복이 우리에게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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