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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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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본문 : 마태복음 7장 7-11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로운 약속들을 제시하고 이 약속들은 우리의 삶에 위안과 힘과 소망을 줍니다. 

때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의 삶이 불안과 위험에 처할 때마다 성경의 말씀들은 우리엑 놀라운 위로의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오늘 여러분들과 같이 읽는 성경 말씀도 그런 약속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약속입니까? 

얼마나 우리에게 힘을 주는 기쁜 말씀입니까? 

더구나 우리 주님은 이 약속이 틀림없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우리로 하여금 보다 큰 확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거듭 반복하시면서 보다 강한 형태로 표현하십니다.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이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절대적인 약속입니다. 

더구나 이것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약속입니다.


우리가 사는 인생 길은 험난한 여행길입니다. 

더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난처한 일들과 골치 아픈 문제들로 가득찬 여행입니다. 

이러한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가 다루어야 할 여러가지 일들이 아니라 그것들을 맞이하려는 우리의 마음 자세와 준비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성경은 고독하고 외로운 삶을 지적했던 아브라함의 삶에 대해 갈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복했고 평화롭고 안심되었습니다. 

그는 두렵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였습니까?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나 누구와 함께 갖는지를 알았습니다. 

그는 다른 또한 문과 함께 그 여행을 간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을 떠나지도 않겠고 그를 버리지도 않겠다고 그에게 말씀하신 분이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마주쳐 오고 있던 사건들과 일어나려는 문제들이 불확실했지만 아브라함은 완전히 행복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와 함께 하는 여행의 벗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때로 우리를 위해 반드시 삶을 변화시키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어려움과 시련과 문제와 환란을 없애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습니다. 

주님은 장미에서 모든 가시를 잘라 버리고 그 놀라운 향기만을 장미에게 남기겠다고 하시고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에게 무슨 일이 발생하든지 두려워하거나 결코 놀라워 할 필요가 없다고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와 똑같은 약속을 우리 주님은 지금 하고 계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이것이 무슨 약속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적 자녀들에게 은혜로 대해 그의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준다는 약속입니다. 

이 말씀은 죄많은 이 세상 속에서 살면서 늘 넘어지고 실패하고 좌절하는 우리에게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무뚝뚝하거나 인색한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고 은혜로우며 자비로우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선물을 그의 자녀에게 주고 싶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준다. 찾으라 그러면 찾는다.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다’ ‘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주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주십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가 몇가지 주목해 보아야 할 점들이 있습니다. 

먼저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됩니다. 

다시 말하면 이 본문이 말씀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 7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리리라” 

이 본문에서 말하는 ‘너희’는 누구입니까? 

문맥으로 볼때 하늘에 계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받아 들인 자들만을 가리킵니다. 

이 약속은 불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명목상의 교인들에게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이 약속은 중생의 기적을 받은 자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곧 한때는 그리스도밖에 있었던 자들이고 하나님의 언약의 약속과는 전혀 무관하고 소망도 없고 세상에서 하나님도 없는 자들이었다가 이제는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의 일원이 된 자들을 위한 것입니다. 

내가 교회는 다니고 있지만 명목상의 신자라면 이 약속은 나와는 무관합니다. 

정말로 내 속에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살아난 구원이 없다면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 기도의 약속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 중에 어떤 분은 이런 의문을 제기하실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가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습니까?” 

그러나 아닙니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아버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그는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되지 않은 자 즉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는 자들의 하나님은 아닙니다. 


눅 13장 25절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이것을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닫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들이 와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옵소서”라고 요청합니다. 

주인은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그들은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길거리에서 가르쳤나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주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악행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마태복음 7장과 누가복음 13장의 사건에서 모두 간구함이 있고 문을 두드림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 두드리고 간구하는 자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인 반면에 누가복음은 불신자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두들릴 때는 열릴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불신자가 아무리 두드리고 고래고래 소리쳐도 그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주어진 약속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적용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을 다음과 같이 읽어야 합니다. 

“거듭난 자여 구하라 그러면 거듭난 너희에게 주시리라 거듭난 자들인 너희는 찾으라 그러면 거듭난 너희는 받으리라 거듭난 너희는 두드리라 그러면 거듭난 너희에게 열리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거듭나셨습니까?  

기도는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성입니다. 

기도의 근본은 어떤 조건이나 어떤 방법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 이전에 관계성입니다. 


가령 한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자녀를 키우다 보면 요 아들녀석이 좀 풍족하게 까먹기도 하고 전자 오락실도 가고 롤라 스케이트도 타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 용돈을 많이 탈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아버지인 저에게 와서 용돈 좀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 저에게 용돈 좀 주세요.” 

여러분 제가 돈을 줄까요? 주지 않을까요? 

그 이전에 같이 생각해 봅시다. 

그가 왜 저에게 와서 용돈을 달라고 합니까?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나와의 관계는 부자지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아버지께 용돈을 달라고 합니다. 

아버지에게 용돈을 탈 수 있는 조건은 방법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것은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부자지간도 아니고 아무관계도 아닌데 어떻게 용돈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근본적인 관계가 성립된 다음에 용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정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번째가 ‘방법’인 것입니다. 당연히 돈을 쓸만한 데가 있는가? 따집니다. 

어떤 방법으로 아버지 마음을 꼬셔서 돈을 타낼까? 기도는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 믿는 신자들만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는 자들만이 가지는 강력한 특권입니다. 

우리에게 이 특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 아십니까?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였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기도의 특권을 주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했습니다. 

아주 비싼 댓가를 지불한 후에 이 기도하는 특권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근본적으로 이런 질문을 던져 봅시다. 

기도는 분명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허락된 가장 강력한 특권인데도 불구하고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또한 기도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기도로 인하여 위로를 받거나 힘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기도를 하는 사람이 적고 기도로 인하여 힘을 얻지 못한다면 어딘가에 문제가 있습니다. 

기도 자체가 별것이 아니던가 아니면 하나님께 문제가 있던가 그것도 아니면 기도를 허락받은 우리가 문제가 있던가 셋중에 하나입니다. 

여러분 어디가 문제가 있습니까?


한 가정에서 가끔 자녀들에게 난처한 일을 당하는 수가 있습니다. 

어떤 가정의 이야기입니다. 

그 어머니가 자기 아들에게 잠바를 하나 사주었는데 사흘만에 잃어 버리고 돌아왔습니다. 

아주 좋은 잠바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잃어 버렸다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으니까 아침마다 날씨가 더운데도 겨울 잠바를 굳이 입었습니다. 

더워서 땀띠가 날 정도가 되었는데도 열흘쯤 입고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들통이 났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의 이야기가 재미있었습니다. 

사실은 그동안 조마조마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털어놓자 어떻다는 말입니까? 

시원해졌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는 이래야 합니다. 

하나님께 털어 놓으면 시원함이 있고 감격이 있고 용서와 응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에는 왜 그런 감격이 없을까요? 

기도야말로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내가 갖고 있는 어려운 문제들, 혼자서 해결할 수 없어서 혼자 힘에 겨워하다가 어느날 부모님께 털어 놓으면 그 문제가 아무리 클지라도 이제는 내 문제가 아니고 부모님 문제가 아닙니까? 

기도는 내 문제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 문제가 내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왜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이와같은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있습니까?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씀 드립니다. 

기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십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담대히 나가게 하기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사 얻게 한 특권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누리는 신분이요 또 그 약속들의 권리요 무기입니다.

그래서 본문에서 또다른 한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그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들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구하기만 하면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가 얼마나 적극적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까? 

“구하라 그러면 너희가 받으리라” 


약 4:2에도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받지 못함은 구하지 않음이라” 

이 두 말씀의 가르침은 동일합니다. 

구하기만 하면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시는 것을 즐거워하십니다. 

11절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지 못할때 그 책임은 하나님에게 있지 않습니다. 

그 책임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런 질문을 합니다. 

“왜 하나님은 나의 원하는 것들을 들어 주시지 않는가?” 

“왜 나는 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가?” 

그 원인은 우리가 하나님께 이 축복들을 간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가 구하지 않으므로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은 말합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하나님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 약속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귀는 간구하는 음성을 하나도 빼놓지 않으시고 들으시며 강한 손을 펴서 구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간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계 8장에는 천사들이 모든 성도들의 기도소리를 금향단에 담아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갖고 올라간다고 했습니다. 

우리의 간구하는 한소리 한소리가 하나님의 보좌를 울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은 “내게 간구하면 내가 응답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르짖을때 반드시 들으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피 값 주고 산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문헌에 보면 널리 알려진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일본의 어느 마을에 한 기독교인이 천그루 정도의 과수가 있는 과수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과수가 거의 다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무렵에 이상한 벌레들이 생기기 시작하더니 약을 치고 잡아도 날마다 기승을 부려서 나중에는 사면초가가 되었습니다. 정성을 다해 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철야기도를 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서 어떻게든 이 벌레를 없애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다음날 새벽 일찍 수백마리의 이상한 새떼들이 모여들더니 한나무에 하나씩 붙어서 한 서너시간만에 전부 빈틈없이 다 쪼아 먹어 버려 나무들이 깨끗해졌습니다. 


하나님은 신기하게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의 삶속에서 이런 기도의 응답을 한번 보세요.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렘 33:37) 

하나님은 우리에게 부르짖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리라” 


그러면 구하는데 어떻게 구해야 합니까?


첫째로 간절하게 구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 기도는 간절해야 합니다. 

참된 기도는 곤경에 빠진 사람이 꾸밈없이 억제할 수 없이 외치는 음성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할 수 없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절박한 영혼이 부르짖는 절망의 소리입니다. 

믈에 빠진 사람이 살려 달라고 아우성치는 것처럼 간절하고 절실하게 해야 합니다. 


한 쳥넌이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목사님 기도는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그 청년을 데리고 강가로 갔습니다. 

목사님은 청년의 옷을 벗게 하고는 무턱대고 손을 끌고 강으로 들어왔습니다. 

깜짝 놀란 청년은 “아니 목사님 저는 수영을 배우러 온 것이 아닌데요” 했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은 “그래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일세”라고 말한 다음 청년의 머리를 잡아서는 물속으로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청년은 물속에서 발버둥치며 “목사님 나 수영 못해요. 살려 주세요” 하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제서야 그 목사님은 청년을 건져내 주었습니다. 

겨우 살아난 청년은 숨을 몰아 쉬며 “아니 목사님 제가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했지 물속에서 죽여 들라고 했습니까?” 라고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은 빙긋이 웃으면서 “그래 물속에 있으니까 어떻던가? 숨을 쉬고 싶지? 살고 싶다는 생각 밖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을거야. 

이것이 바로 내가 자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일세. 

기도는 바로 그렇게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네” 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때의 마음도 바로 이와 같아야 합니다. 

익사하기 직전에 우리가 살기 위해 결사적으로 몸부림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배고픈 아이가 어머니의 젖을 갈망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할때 우리의 기도는 응답받는다.



둘째로 우리가 구할때 기도는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는 명령은 현재 명령형입니다. 

이것은 한번만 하는데 그치지 말고 계속해서 행하라는 것입니다. 

이 명령은 반복해서 기도하고 끊임없이 기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결코 낙심하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우리의 요청이 허락될 때까지 계속해사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낙망하지 말고 항상 기도해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눅 11:5-10에 보면 한밤중에 방문한 손님에게 줄 음식이 없어 이웃집을 찾아 갑니다. 

처음에 이웃사람은 귀찮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끈질기게 매달리자 마침내 그가 요구하는 것을 주고 말았습니다. 


눅 18장에도 끈질기게 간구함으로 불의한 재판관으로부터 그의 소원을 얻어낸 과부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기도의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고 끊임없이 구해야 합니다. 

기도의 성자 조지 뮬러 그는 일생동안 5만번의 기도 응답을 받았습니다. 

어떤 사람이 죠지 뮬러에게 와서 물었습니다. 

“당신은 얼마나 많은 재산이 있길래 이천명의 고아들을 길렀습니까?”하고 물으니까 죠지 뮬러는 “저는 돈 지갑에 단 돈 10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아들을 기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곳에서 나왔습니다.” 하면서 그의 기도 골방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죠지 뮬러는 모든 기도의 응답을 쉽게 쉽게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가 세명의 친구 영혼이 구원받기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님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기도 시작한지 5년만에 주님께 돌아왓습니다. 

그리고 또 한명은 죠지 뮬러가 죽기 전에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명은 끝까지 주님께 돌아오지 않더니만 죠지 뮬러가 죽고 3년이 지나서 주님께 돌아왔습니다. 

기도 응답이 없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응답 받을 때까지 계속해서 구해야만 합니다.


셋째로 구할때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11절에 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까?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무슨 말입니까? 

나쁜 아버지라도 자식이 구하는대로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우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우리 때문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피흘려 죽게 하신 그 아버지 하나님께서 왜 우리 기도를 안들어 주시겠느냐? 하는 말씀입니다. 

야고보 선생님도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께서 그 약속을 이루어주신다고 확신하며 간구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도의 응답 받기를 원하십니까? 

내 삶속에서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고 나의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구나” 하는 그 응답의 손길을 보시기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어 주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하게 구하고 끊임없이 구하고 확신을 가지고 구하는데도 응답해 주시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후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도 자기 몸에 약점이 있어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세번이나 간절히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속에서 사도 바울은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너무 교만하지 않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과 자기가 악한 중에서 강해지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지혜는 한계가 있고 어리석습니다. 

나는 그것이 나엑 좋다고 자꾸 달라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나에게 유익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는 거절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절 속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사랑을 체험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주시지 않는 사실을 감사하게 생각한다. 

나는 이 말을 나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서 말하는 것이다. 

나는 과거에 다른 사람처럼 하나님께 어떤 것을 구했고 또 어떤 것을 해 주시기를 위해 구했다. 그것들이 그때에는 내게 꼭 필요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내가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생애의 이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볼때 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구한 것을 들어 주시지 않고 내 면전에서 문을 닫아 버린 사실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한다.”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우리들의 하늘 아버지는 결코 잘못을 범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비록 육신의 아버지는 그의 사랑 때문에 자식의 요구를 들어주되 그것이 오히려 자식에게 해가 될 수도 있지만 하늘의 아버지는 결코 해결될 수 있는 것을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절대적입니다. 

그는 나의 어려운 문제도 다 아십니다. 

나의 고통도 아십니다. 

나의 속마음도 다 아십니다. 

나의 필요도 다 아십니다. 

그래서 나의 앞날을 다 보시며 나의 필요를 아시고 나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십니까?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말씀을 다시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주님이십니다. 

한번 약속하신 것은 해로울지라도 결코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약속을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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