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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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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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다

본문: 창세기 49장:13-21절, 27-28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야곱에게는 열두 명의 아들이 있습니다.

이 아들이 나중에 이스라엘의 12지파를 형성합니다.

이 열두 아들은 야곱이 네명의 부인을 통해서 얻은 아들들입니다.

원래 야곱의 아내는 레아와 라헬인데 이들이 아들 낳기 경쟁을 벌여 그의 여종인 실바와 빌하까지도 야곱에게 첩으로 주어 이 네 명을 통해 열 두명의 아들을 낳습니다.

그 아들들의 이름을 기억하십니까?

순서대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요셉(지파는 요셉의 아들 므낫세, 에브라임), 베냐민입니다.


이 사람들은 팔레스틴 땅의 여러 지역에 흩어져 부족으로써 미국의 주 처럼 독립된 하나의 세력을 확장하다가 사울이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세워지면서 이스라엘 왕국을 건설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그의 열두 아들들에게 축복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어느 축복도 똑같은 것이 없이 아주 다양하게 축복합니다.


왜 모든 아들들에게 야곱이 자기가 아버지 이삭으로 부터 받은 것과 같은 축복을 주시지 않았습니까?

왜 모두에게 요셉과 같이 되라고 축복하지 않았을까요?

모두가 다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이고 그 후손들인데 모두가 똑같이 풍성한 축복을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똑같이 축복하지 않습니다.

어떤 축복은 축복이라기 보다는 차라리 저주에 가까운 축복도 있습니다.

야곱의 축복과 예언 하나하나에는 그 자식들의 성품과 특성과 삶의 모습이 나타나 있습니다.

야곱이 자기 아들들의 기질과 분량에 알맞은 축복을 한 것입니다.

이 축복을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28절, “이들은 이스라엘의 십 이 지파라 이와같이 그 아비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 였으되 곧 그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저는 심방을 많이 했습니다.

한국에서 10년동안 거의 하루에도 안 빠지고 하루에 2,3가정에서 많게는 10가정씩 심방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가정에 심방을 가서 하나님 말씀을 읽고 설교를 할 때나 기도할 때 그 가정에서 풍겨나는 이미지를 따라 합니다.

그 가정에 맞는 찬송을 부르면서 그 가정에 어떤 말씀이 적당할까를 생각 하면서 그 가정의 환경과 형편에 맞는 성경 귀절이 떠오르면 자연스럽게 그 말씀을 가지고 설교를 합니다.

이것은 순전히 그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그것에 맞게 하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하나님의 말씀처럼 자신의 축복은 자신이 선택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편파적으로 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복을 편파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열 두 아들들이 받은 복은 각자에게 합당한 대로 내려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뜻대로 축복하지 않고 그들 각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받는 모든 화나 복은 나 자신이 마땅히 받을 만하니까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원칙적으로 ‘각인의 분량대로’되어 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악한 죄 때문에 저주를 받고 선한 삶을 살면 그 선한 보상을 받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인생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복을 받을 그릇의 크기대로 주십니다.

사람마다 복을 받을 그릇이 다릅니다.

각자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받게 됩니다.

큰 믿음의 그릇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축복의 그릇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하나도 잃어 버리지 않고 누리시기 바랍니다.

심은대로 거두고 믿음의 분량대로 복을 받습니다.


오늘 야곱이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을 살펴 보면서 이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교훈을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된 축복들이 나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첫째로,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다 축복 받았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한 이스라엘을 형성하고 있지만 단일한 지배를 받는 것이아니라 각자 그 나름대로 정치적인 특성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같이 태어났지만 같은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어미의 태에서부터 민족이 둘로 나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 때문에 민족 자체가 달라진 것입니다.

야곱과 에서는 도저히 함께 지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가 집에 있으면 다른 하나가 나가야 합니다.

하나가 복을 받으면 다른 하나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야곱과 에서 사이에는 축복이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야곱이 축복을 받으면 에서는 종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은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신앙 자체가 다릅니다.

진정한 구원은 하나밖에 없으며 진정한 믿음도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믿음은 여러 개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가 믿음이면 다른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열 두 아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은 단 한명도 내쫓지 않고 모두 축복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같은 신앙 고백을 하고 있고 한 교회 안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의 열 두 아들은 교회도 하나고 신앙도 하나지만 그 다스리는 형태나 조직은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몸은 하나지만 몸 안에는 많은 지체가 있습니다.

마치 오늘날의 교회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교회는 하나이지만 그 안에 많은 지체, 성도가 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서 교회를 향해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세례도 하나이요. (엡 4:4,5)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4:16)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이 열두 지파는 영적인 통치라는 점에거 거의 독립적입니다.

각 지파 안에 장로나 재판관들이 있어서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똑같은 율법과 똑같은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이들 지파마다 각기 독립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앙 안에 있기만 하면 하나님의 축복은 주어집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여러 가지 형태의 모습으로 나누어 집니다.

그래서 교파가 있습니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등 교파가 다 다릅니다.

그러나 교파가 다른 것은 문제가 없습니다.

다 같이 성경을 믿고 그리스도에 대한 동일한 신앙 고백을 가지고 있으면 다 구원은 얻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실망하고, 목회자나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고 아예 교회 제도 를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나름대로 조직이 없는 교회를 만드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회자가 없는 이상한 교회도 생겨나고 무교회 주의자들이 생겨 났습니다.

그런 교회는 얼마가지 않아 제도적인 교회가 되든지 아니면 없어지든지 이단에 빠집니다.

교회 정치는 다르지만 교회 안에 있어야 축복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 있어야 축복을 받습니다.

교회에서 상처를 당한다고 교회가 불안전하고 모순이 있다고 교회를 뛰쳐 나가면 구원도 못 받고 축복도 못 받습니다.

가나안 교인은 위험합니다.

대부분은 영원히 교회를 떠나고 신앙을 잃어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열 두 아들이 다 축복을 받은 것 처럼 우리가 영적인 이스라엘로 남아 있는 한 우리는 다 축복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받는 인생의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주님 안에서 있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교회 밖을 벗어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있는 사람들에게는 다 축복이 있습니다.

이 축복을 다 받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지파마다 다양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은 각 지파마다 다양한 축복을 주는데 어떤 지파는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상당히 번성합니다.

갓 지파와 베냐민 지파 같은 지파입니다.

그런데 어떤 지파는 처음에는 대단히 훌륭한데 나중에는 비참합니다.

단 지파가 바로 그렇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이 지파들의 축복의 모습을 간단하게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는 스불론의 지파입니다.

13절,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 기도하는데 스불론이 잇사갈보다 먼저 나옵니다.

스불론은 레아가 여섯번째로 나은 아들이고 잇사갈은 다섯번째로 나은 아들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은 잇사갈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나 스불론으 더 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불론 지파에게 맡기시는 중요한 사명이 있습니다.

스불론은 이스라엘에서 가장 경계선 쪽의 해변에 흩어져서 거하는 지파입니다.

그들은 사방에 퍼져서 전 세계를 향해서 진출하는 웅지를 꿈꾸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생애의 가장 많은 시간을 갈릴리에서 보내셨습니다.

이 갈릴리가 바로 스불론 지파의 활동 무대입니다.(마 4:12-16)

이것은 복음의 위대한 태양이 가장 아름답게 비취지며 나타난 곳이 스불론 지역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구세주로서의 놀라운 사역이 시작된 장소가 바로 스불론 지역입니다.

이 스불론 지파는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복음이 시작되는 곳, 참 복음이 퍼지는 곳인 선교의 요람입니다.


야곱은 스불론을 향해서 어떤 아름다운 해변가를 강조한 것이 아니라 “배가 매여 있는 곳”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진출하기 위해 출동을 기다리고 있는 배를 가리킵니다.

고동을 울리면서 이 복음을 가지고 세계를 향하여 흩어져 나가야 할 수많은 배들이 출전 준비를 기다리고 있는 해변이 있는 곳이 스불론의 축복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모든 교회, 모든 성도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습니다.

국내에서 그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하고 먼 곳, 해외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도 필요합니다.

선교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어떻게 예수를 믿었을 수가 있겠습니까?

수많은 선교사들이 그들이 부귀와 안락한 행복 삶을 포기하고 미개한 땅 조선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어떤 분은 한국 땅에 도착하자 마자 27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 베임을 당해 죽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에 와서 사랑하는 가족들을 잃었습니다.

합정동에 양하진에 가면 외국인 묘소가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돌아가신 선교사들과 그의 가족들 수백명이 묻혀 있습니다.

그런데 1/3이 어린아이들입니다.

문명의 세계에서 왔던 어린이들이 미개한 한국의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죽었습니다.

선교사들은 자기의 사랑하는 어린 자녀들을 이 한국 땅에 묻으면서 복음을 전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선교는 중요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교회 안도 향해야 하지만 세계를 바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식은 내 보내면 축복이 들어 옵니다.

형편이 좋아서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없는 가운데서도 계속 선교를 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선교할 형편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선교를 향한 이상과 선교의 사명을 얼마나 우리가 중요시 여기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빛을 발해야 합니다.

교회는 선교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교회의 마지막 사명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이 스불론의 축복이 우리 교회와 우리 삶에 있기를 바랍니다.


두번째는 잇사갈에 대한 축복입니다.

14, 15절,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 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잇사갈은 안장을 등에 얹고 짐을 싣고 가는 건장한 나귀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았다. 어깨를 내려서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긴다”

자기 자리를 고수하면서 섬기고 일하는 형태의 모습입니다.

원래 ‘잇사갈’이라는 이름의 뜻이 ‘대가를 지불하고 무엇을 얻었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그냥 얻을 수는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땀을 흘려야 합니다. 노력이 요청됩니다.

그런데 그는 쉴 곳 즉 토지와 집을 보면 만족하게 여겼습니다.

어떤 사람이 쉴 수 있습니까?

매일 노는 사람에게는 쉼이라는 표현이 그다지 의미가 없지만 정말 노동을 값지게 알고 애쓰는 사람에게는 모처럼의 휴식이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주님은 노동의 땀을 흘리는 사람을 축복해 주십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과는 상관없이 은혜로 값없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에 받는 상급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한 결과로서 보상을 받습니다.

‘믿음으로 구원 받아 주님을 위해서 어떤일을 행했는냐?’에 따라서 나의 보상이 결정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광스러운 보상을 원하십니까?

그리고 하나님 앞에 자라스럽게 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땀을 흘리세요. 하나님께서 내게 맡겨 주신 자리에서 수고와 충성의 노력을 다하세요.

멍에를 메고서 주님을 위해서 땀을 흘리세요.

하나님의 백성들 가운데는 이러한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제자리를 지켜 가며 꾸준하고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는 스불론 같은 사람도 필요하고 잇사갈 같은 사람도 필요합니다.

나가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안에서 일하는 사람도 필요합니다.

모두의 은사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서로가 다르다는 것 때문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당신을 필요로 하고 당신은 나를 필요로 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맡은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는 잇사갈의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원합니다.


세번째로, 단의 축복입니다.

16-18절,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 단은 길의 뱀이요 첩경의

독사리로다 말굽을 물어서 그 탄 자로 뒤로 떨어지게 하리로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단 지파는 처음에는 훌륭했지만 나중에는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라고 말합니다.

단이 이스라엘의 한 지파이지, 왜 한 지파 같이 입니까?

단 지파는 처음에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한 지파 같이 그 백성들 가운데 있었고 다른 백성을 심판하는 위치에 있을 정도로 유능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길의 뱀이 되었고 첩경의 독사가 되었습니다.

숲속에 있는 독사를 만나는 것은 숲 속에 들어 간 사람의 잘못이지만 길에서 독사를 만나는 것은 너무 뜻밖의 재앙입니다.

‘첩경’은 ‘빠른 지름길’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가장 바른 길이라고 생각해서 들어 선 길에서 생각지도 않게 독사를 만나면 어떻게 됩니까?

더 늦어지고 어려움을 당합니다.


단 지파는 블레셋과 싸워서 그들의 땅을 차지해야 하는데 영적이 전쟁이 싫어서 쉽게 살 수 있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래서 평화롭게 사는 라이스 사람들을 전멸시킨 후에 거기서 편하게 살려고 했습니다.

그 결과 단 지파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됩니다.

요한 계시록 7장에 구원받은 144,000명이 나온데 거기에 단 지파가 없습니다.


18절에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것은 깊은 탄식입니다.

단 지파가 얼마나 무섭게 타락할 것인가를 미리 내다보고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믿었던 사람들이 말에서 떨어 뜨립니다.

빠른 지름길인줄 알고 길에 들어 선 사람들이 독사에 물려 죽는 일에 비교할 정도로 영적으로 굉장히 나쁜 영향력을 이스라엘 지파 가운데 끼치게 될 것을 말합니다.


단지파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삼손입니다.

삼손은 인간적인 그릇된 판단에 의해 인생을 그르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많은 축복을 주셨지만 그 놀라운 힘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한 순간의 판단이 그를 무서운 비극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전혀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은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다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외칩니다.

“여호와여 나는 주의 구원을 기다리나이다”

이 말씀이 삼손의 생애를 운명적으로 요약해 주고 있습니다.


왜 지혜로웠던 단 지파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나는 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도 열심히 믿던 것 같은 사람들이 신앙의 길을 버리고 타락의 길로 가는 것은 진정으로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그렇게 좋던 청년들이 군대만 가면 타락해 버립니다.

그렇게 신앙 좋던 자매들이 결혼하자마자 그 집안의 우상을 따라갑니다.

왜 그렇습니까? 진정으로 거듭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앞마당만 밟았고 기독교라는 명칭만 뒤집어 섰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죄용서함 받지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구원을 확실히 받아야 합니다.

거듭남의 놀라운 비밀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니는냐? 얼마나 열심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해야 합니다.

단은 라헬이 자기 언니 레아와 아이 낳는 경쟁을 위해 자기 시녀 빌하를 자기 남편에게 첩으로 줌으로 태어났습니다.

단이 태어나고 라헬은 기뻐서 “하나님이 나의 억울함을 푸셨다” 즉 “하나님이 나를 판단하셨다”라는 뜻의 단이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인간적인 계략입니다. 인간적인 계획과 육신적인 뜻이 성공합니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야곱의 가정은 불화와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간적인 방법과 계획으로 무엇을 성공한다고 해도 그것은 성공이 아니라 결국은 패배입니다.

우리가 선한 목적과 선한 목표를 세웠으면 끝까지 좋은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올바른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네번째는 갓 입니다.

19절, “갓은 군대의 박격을 받으나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하리로다”

갓은 처음에는 보잘 것 없지만 나중에는 강성해 졌습니다.

갓 지파는 처음에는 군대의 추격을 받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아주 강성해 져서 도리어 그 뒤를 추격합니다.


갓의 출생은 레아와 라헬의 아들 낳기 경쟁에서 시작됩니다.

레아는 라헬이 시녀 빌하를 통해 아들을 낳는 것을 보고 이미 네 아들을 두었지만 자기 시녀 실바를 통해 아들을 얻습니다.

이 아들이 태어났을 때 ‘복되도다’라고 외치면서 ‘갓’이라고 지었습니다.

갓이라는 단어의 문자 그대로의 해석은 ‘군대’라는 뜻입니다.

이 말을 ‘뒤를 따른다. 추격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따라 갑니까? 아들 낳기 경쟁에서 ‘라헬을 따라간다. 추격하여 이긴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갓지파를 군대처럼 왕성한 지파로 삼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 갓 지파는 많은 전투를 합니다.

그리고 전투를 통해 언제나 승자로 나타납니다.

이기려는 경쟁의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아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전투적인 기질을 가진 지파를 계속해서 축복해 주셨습니다.

신앙은 전투입니다.

마귀와의 영적인 전투를 벌여 자기 영역을 넓혀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의 영적인 영토를 넓히려면 기독교가 국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국도 기독교가 국교인 기독교 국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미국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에서 나라를 건설했지만 기독교가 국교가 아닙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아님을 통해 반기독교인들이 국가나 사회에서 기독교 자취를 몰아 내려고 무척이나 애를 씁니다.

그러나 국교가 되지 않음이 축복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면 그 기독교는 평온한 중에 잠자는 교회가 되고 결국에는 사탄에게 자신을 내어 주어 무너집니다.

오늘날 유럽의 교회들이 생명력을 잃어 버리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국교화 제도를 채택하고 그 길을 걸어 갔기 때문입니다.

국교가 되지 말고 국가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 자동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기독교인이 됩니다.

회개와 믿음과 중생이 없이 모두가 기독교인이 됩니다.

교회는 나라의 정부 기관이 되고 목사는 공무원이 되어 나라에서 봉급을 받습니다.

독일은 국교가 기독교입니다.

독일에서 목사는 가장 존경 받고 높은 위치에 있는 직업입니다.

봉급도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직업입니다.

그런데 독일의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오늘의 독일 목회자는 다 죽었습니다. 독일 교회의 목회자들은 자기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 이유는 월급을 나라에서 받기 때문에 교인들이 적어도 급료를 받는 데 지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에 많이 나오게 되면 목회자들의 일이 더 생기게 됩니다”

교인들이 많다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귀찮은 일입니다.

이것이 국교의 비극입니다.

기독교가 국교가 되지 말고 오히려 민족을 복음화 시켜야 합니다.


영국 국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생명력을 잃어 버리고 사양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명색만이 그리스도인이며 생명력도 없고 진리를 향한 열정도 없이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뜨거움도 없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을 드리고자는 헌신도 없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한 사람이 울면서 “나는 월급을 안 받아도 좋다. 나라의 보호가 없어도 좋다. 목숨이 위태로와도 좋다”라고 외치면서 국교에서 나와서 생명력 있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시시하게 예수를 믿는 것이 싫어서 자기들의 모임의 이름을 “우리는 세상을 구원하는 군대”라는 뜻의 ‘구세군’으로 불렸습니다.

그들이 부르는 찬송가는 ‘군가’였습니다.

전도는 마귀에게 포로가 된 영혼들과 싸워서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이끌어 내는 신령한 영적인 전투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은 강하게 마귀와 싸우는 하나님 나라의 군대로서 영역을 복음을 전하며 세상을 변혁 시키며 확장해 나갔습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전투적인 기질을 가지고 신앙과 인생의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원하는 군병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오늘날의 미국 교회의 교인들을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미국 교회에 출입하는 교인들 중 96%는 교회에 나와서 의자만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에 지나니 않는다”

신앙의 열정도 없이 불꽃도 없이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도 없고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도 없이 이 세상을 변화 시키기를 원하는 뜨거운 꿈과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없습니다.

우리는 전투하는 군인의 자세로 돌아가서 신앙 생활을 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도 갓지파처럼 영적인 전투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고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승리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기게 되어 있습니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추격을 일시적으로 받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질 수도 있지만 또한 일시적으로 좌절과 패배가 있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승리는 우리의 것임을 믿고 최후의 승리를 거두어 내고야 맙니다.

전투하는 병사와 같은 열정을 가지고 복음의 전선에 뛰어들어 복음을 전하고 마귀와의 사움에서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다섯번째로 아셀입니다.

20절, “아셀에게서 나는 식물은 기름진 것이라 그가 왕의 진수를 공궤하리로다”

아셀은 실바가 낳은 아들이지만 레아를 대신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그래서 레아는 기뻐하며 그 이름을 ‘기쁨’ ‘축복’이라는 ‘아셀’이라고 집니다.


모든 지파는 농사를 짓든지 목축을 해서 자급자족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아셀 지파에게 더욱 기름진 것을 주셔서 왕의 진수를 공급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아셀지파에게 물질적으로 풍성하게 해 주신다는 것 뿐만 아니라 특별한 은혜를 주신다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엇이든지 다 좋지만 특별히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예배 때 설교도 다 좋지만 특별히 더 좋은 은혜받는 설교가 있지 않습니까?

아셀 지파는 그렇게 큰 지파는 아니었지만 왕의 진수를 공궤한다고 표현할 정도로 특별한 은혜를 가지고 있습니다.

봉사를 해도 특별하고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있고 설교를 들어도 아주 맛있게 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는 교회는 재미 있고 힘이 납니다.


신명기 33장에도 모세가 죽기 직전에 이스라엘 12지파에게 축복을 합니다.

이 때 아셀 지파에게 한 축복을 보면 너무너 큽니다.

"아셀은 다자한 복을 받으며 그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 그 발이 기름에 잠길지어다"라고 하면서 결론적으로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라고 말을 합니다.

얼마나 부럽습니까?

우리 모두 아셀과 같은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여섯번째로 납달리 입니다.

21절,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아름다운 소리를 발하는도다”

라헬이 빌하을 통해 두번째 아들을 낳고 ‘형과 경쟁하여 이기었다’라고 그 이름을 ‘납달리’라고 지었습니다.

납달리는 좋은 환경과 여건속에 태어난 아들은 아닙니다.

아들을 낳기 위한 경쟁에서 라헬은 부당한 방법으로 자신의 계획을 관철했습니다.

예수를 잘 믿어 보겠다는 경쟁은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어 보겠다는 경쟁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아들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납다리를 암사슴으로 비유합니다.

사슴은 아름다움을 상징합니다.

사슴중에 암사슴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산등성이를 아주 날쌔게 달리는 사슴은 자유로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암사슴의 이미지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자유를 상징할 때 쓰여지고 있습니다.

암사슴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서야 할 길에 서서 마땅히 달려 나가야 할 목표를 설정하고 그 목표를 향해서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이 달려가는 자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 납달리가 아름다운 소식을 발합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려는 아름다운 마음 이것이 바로 그들이 받은 축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복음을 가장 잘 받아 들인 지역은 납달리 지역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지역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팔복을 설교한 것도 이 곳이고 오병 이어의 기적을 행한 곳도 이 지역입니다.

출신 지역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그 복음 앞에 내가 어떻게 응답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기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응답하기 위해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들은 잘못된 출생을 배경으로 해서 태어난 사람이라 할찌라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받아 들임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을 더 받았습니다.


일곱번째로, 베냐민 지파입니다.

27절, “베냐민은 물어 뜯는 이리라 아침에는 빼앗은 것을 먹고 저녁에는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베냐민 지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좋아진 지파입니다.

베냐민을 ‘물어뜯는 이리’라고 한 것은 그가 자기 밖에 몰랐다는 뜻입니다.

이리는 결코 남을 생각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합니다.

베냐민은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부족하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밖에 모르고 어떻게 해서든지 남의 것으로 자기 것을 채우려고 했습니다.

남의 도움은 받으면서도 자기는 절대로 남을 돕거나 희생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물어 뜯는 이리는 아닙니까?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되면 물어 뜯는 이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경쟁적으로 하고, 자기 중심적으로 합니다.

교회 일을 한다고 하면서도 공격적으로 해서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다 물어 뜯는 이리입니다.

예수는 오래 믿었다고 하는데 아직 영적으로 철이 안들고 어리기 때문입니다.

자기 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자기 주장이 관철되어야 하고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방 삐치고 다른 사람을 괴롭힙니다.

교회가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이 되어야지 어떻게 자기 중심이 되어야 합니까?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영적으로 철이 들면 그 때는 자기가 붙들고 있는 것을 남에게 나누어 줍니다.

베냐민이 저녁에는 어떻게 한다고 합니까?

‘움킨 것을 나누리로다’

자기가 움킨 것을 남에게 주어서 그를 부요케 합니다.

이제 우리도 자기 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 다른 사람 중심적인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야곱이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를 골고루 축복하였습니다.

각인의 분량대로 축복하였습니다.

열 두 아들들이 받은 복은 각자에게 합당한 대로 내려진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뜻대로 축복하지 않고 그들 각 사람이 마땅히 받을 만한 분량대로 축복했습니다.

우리가 살아 가면서 받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나 자신이 마땅히 받을 만하니까 받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때는 설명도 되지 않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려지는 모든 종류의 화와 복은 원칙적으로 ‘각인의 분량대로’되어 지는 것입니다.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악한 그 죄 때문에 저주를 받고 선한 삶을 살면 그 선한 보상을 받습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인생을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아들에게는 더 많은 축복을 어떤 아들에게는 징계같은 축복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모든 은사들이 골고루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은사는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성도 각자가 가진 은사가 활용될 때 교회는 아름답게 하나님의 일을 감당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은사는 은사 가진 사람의 믿음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은사와 믿음이 일치하면 좋습니만 많은 경우에 그렇지 못합니다.

그래서 은사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 버림 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고 정작 자기는 버림 받는 사람이 있습니다.

찬양으로 많은 사람들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 나오게 한 사람이 정작 자신은 지옥에서 비명을 지르게 될 수 있습니다.

은사는 신앙을 대변하지 못합니다.

은사는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은사는 자신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격려하고 돕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축복을 잘 활용하고 이 축복이 축복이 되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은사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은사를 축복으로 잘 활용하여 남도 살리고 나도 주님 앞에서 인정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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