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금식할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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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금식할 때에
본문 : 마태복음 6장 16-18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여러분들과 같이 금식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사실 금식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경건생활의 한 덕목으로 중요한 것인데 저에게는 이 부분이 상당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금식에 대하여 잘 모릅니다.
저는 금식도 할 줄 모릅니다.
밥 한끼만 굶어도 난리가 납니다. 온통 먹는 것만 보입니다.
여러해 전에 금식 기도한다고 오산리 기도원에 갔습니다.
오산리 기도원은 금식 기도원이라고 들었기 때문에 나도 3일 금식한다고 금식을 시작했습니다.
사실 3일 금식이라여 첫날 저녁부터 둘째날 종일과 셋째날 아침 총 5끼만 굶으면 됩니다.
이제 오늘 저녁부터 금식한다고 생각하고 점심을 잔뜩 먹고 기도원에 갔습니다.
그런데 내가 굶는다고 생각하니까 점심을 전뜩 먹었는데도 2시간도 안되서 배가 고프기 시작합니다.
둘째날 되니까 배가 고파서 만사가 다 귀찮습니다.
기도하러 간 사람이 배가 고파 기도도 안나옵니다.
물론 찬송도 안나오고 성경도 안 봐집니다.
그래서 예배도 참석 못하고 그저 누워만 있었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3일 금식하기로 했으니까 안할 수도 없고 그저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금식이 아니라 굶식을 했습니다.
이후부터 기도원 갈때 저의 목표는 “많이 먹고 많이 기도하자”입니다.
저는 이처럼 금식에 실패한 사람입니다.
금식에 놀라운 영적 축복을 체험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금식에 대하여 지식으로만 알고 금식의 신기한 영적 은혜를 말로만 듣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상당히 어렵습니다.
내가 체험하지 못하고 내가 삶속에서 그 모습들을 보지 못하고 전할려고 하니 더욱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결혼 문제를 놓고 기도를 하면서 금식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는 부목사 때인데 새벽 예배부터 나오고 심방도 다 다니고 목회를 하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 때도 삼일을 굶었는데 할 일을 다 하면서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제일 힘든 일은 심방을 가서 식사를 대접할 때 입니다.
제가 금식을 한다고 말하면서 거절을 하려고 하니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거든이 금식을 마쳤습니다.
제가 여기서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금식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면 금식이 하나도 힘들지 않습니다.
마 6장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건생활을 대표하는 세가지 삶의 모습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6:1-4에 나오는 구제이고 둘째가 6:5-15에 나오는 기도이고 그리고 셋째가 오늘 본문 6:16-18에 나오는 금식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경건생활에서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세가지 요소가 바로 이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강조점이 모두 다릅니다.
어느 설교가는 이 구제생활을 이웃을 향하여 창문을 여는 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제할때 그것은 이웃을 향해서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생활은 하나님을 향해서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창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금식생활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금식은 자신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금식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어두움을 뚫고 나가 우리 주변의 세계를 향해 창을 여는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경건생활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금식은 자신을 향해서 창을 여는 것입니다.
내 육체의 욕심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먼저 잘못된 금식을 비판하십니다.
16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금식 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내지 말라 저희는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어떤 사람들이 금식을 시작합니다.
하루 이틀 사흘 금식하는 시간이 지나갑니다.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 세수를 안합니다. 얼굴을 흉하게 하며 눈물자국을 만듭니다.
그들의 모습은 마치 이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나는 이렇게 굶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위하여 굶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를 봐 주십시오”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금식하고 있는 사람들을 예수님은 보고 있었습니다.
그들 마음속에 있는 근본적으로 잘못된 금식의 동기를 주께서는 보고 계셨습니다.
이들은 경건의 참된 의미를 자기 내부에 있는 인격적인 중요성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형태에서 경건을 찾았습니다.
흉악하고 바싹 마른 얼굴, 흐트러진 머리, 비실비실한 모습을 통해서
“나는 이렇게 주님을 위해서 굶고 있습니다. 나는 얼마나 신령한 사람입니까?”
이렇게 외형적인 모습으로 자기가 경건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잘못된 영적 경건을 주님께서는 비판하신 것입니다.
오늘날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자기 명암판에 ‘40일 금식기도’ 했다는 경력을 써가지고 다닙니다.
길가다가 보면 어떤 집회에는 이런 광고를 붙이기까지 합니다.
“신유의 기적을 일으키는 40일 금식기도한 불의 사자가 왔다. 와서 듣고 축복 받으라‘
여러분 그런 분들 쫓아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식의 잘못된 금식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있습니다.
금식은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음식을 잔뜩 먹고 영양 보충하여 힘이 생깁니다.
음식을 먹어야 힘이 생기고 힘이 있어야 어떤 일을 합니다.
그런데 굶어서 힘이 없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잔뜩 먹어서 힘이 생겨도 못하는 일을 굶고서 되는 법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일은 누가 한 것입니까?
이 일은 내 자신의 능력이 아닌 어떤 제 3의 힘에 의해서 되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다른 힘 곧 하나님이 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랑되고 하나님이 나타내야죠 왜 내가 나타납니까?
잘못된 금식의 모습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을 보면 목소리에서 영력을 찾고 경건을 찾으려고 합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신령한 목소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 이상한 목소리로 발음해야 그 사람이 기도 많이 한 사람이고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목에 힘을 준 목소리인지 기도 많이 해서 목청이 찢어진 것인지 잘 모르는 이상한 목소리입니다.
소위 말하면 이런 목소리입니다.
여러분, 목소리에 경건이 있습니까?
그 목소리를 사용해야만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가까운 사람입니까?
그 목소리 속에 신령한 마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경건은 외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경건은 겉으로 들어난 모습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인격의 내부 깊은 곳에서 참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찾아야 합니다.
구약에 보면 본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신 금식은 ‘1년에 한번씩’이었습니다.
속죄일이 되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나올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성경적인 표현을 쓰면 레 23:29-32에 금식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고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레 16:29-34, 민 29:7-11)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은 1년에 한번씩이 아니라 두번씩 금식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눅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생각나십니까?
바리새인이 뭐라고 기도 드렸습니까?
그는 세리와 자기 자신을 비교하며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2)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이 금식을 자신의 영적인 자존심을 내세우는 하나의 표시로 삼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의 금식은 순전히 선전용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알리 위해서 금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왜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을 했을까요?
아마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일년에 한번 금식했는데 이제 세월이 흐르고 세상은 더 악해졌으니 우리는 우리의 조상들보다 훨씬 더 경건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일주일에 두번씩 금식해야 한다”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바리새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을 많이 했는데 목요일은 모세가 산에 올라간 날이고 월요일은 하산한 날입니다.
모세를 본받아 일주일에 두번씩 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처럼 금식을 위한 금식, 선전용 금식, 이런 것들은 금식의 참된 축복을 상실한 것이고 금식의 진정한 보상을 박탈한 것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주님은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진정한 금식이 무엇인가를 가르칩니다.
주님의 진정한 의도는 참된 금식을 강조함에 있습니다.
금식이란 무엇입니까?
금식이란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음식을 금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금식을 위한 금식은 성경적인 금식이 아닙니다.
우리 학생들 중에는 금식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전도사님 저 하루에 한끼씩 금식해요”
“장하다 왜 금식하니? 금식할 이유라도 있니?”
“날씬해지려구요”
미용을 위한 금식 소위 말하면 날씬해지려고 하는 다이어트 그것도 성경적인 금식하고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금식은 어떤 영적인 목적을 위해서 드려져야 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영적인 목적입니까?
첫번째로 죄를 자복할때 즉 회개할때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죄를 회개할때 금식을 많이 했습니다.
히브리어로 이 금식이란 단어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죄를 회개하면서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들의 생애 가운데 중대한 위기를 만났을때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개인적 민족적으로 금식했던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레 16:29-34 속죄일에 대한 기록이 나와 있는데 이 속죄일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공적이며 국가적인 금식일이었습니다.
그 날은 1년에 한번씩 이스라엘 전 민족이 일년을 돌이켜 보면서 1년동안 지은 죄를 위한 속죄제를 드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속죄일에 해가 뜰때부터 해가 질때까지 금식했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금식은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는 깊은 애통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금식은 절대로 금식 그 자체로만 독립되어 있지 않고 꼭 영적인 각성이나 회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속죄일의 경우 금식은 그들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께로부터 용서를 구하는 금식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 주님께 죄를 짓고 그것으로 인하여 마음속 깊이 괴로워하고 심히 애통할 때가 있습니다.
죄가 우리 마음에 끼친 영향으로 인하여 불안해 함으로 먹지 못하여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의 심정을 쏟아 놓을 때가 한두번쯤은 있었을리라고 생각합니다.
다윗은 큰 죄를 범했습니다.
그가 자기 죄를 자복하지 않고 있었을때 그의 삶은 말라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죄를 자복했을때 모든 것을 떠나고 그는 다시 온전해졌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우리의 죄악으로 인하여 마음이 심히 불안해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나아와 자복하며 깨끗케 해 주실 것을 간구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잘못에 대한 속죄는 이미 받았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악한 것들을 버린 다음에 우리 마음에 생긴 상처를 치료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때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된 교제를 다시 회복하기를 갈망하기 때문에 음식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음식은 관심밖의 것이고 오직 자기 죄가 용서함 받음으로 하나님과의 단절된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 35:13에서 “내가 굵은 베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사무엘이 와서 우상 숭배의 죄를 회개해야 한다고 말할때 그들은 금식했습니다.
다니엘도 자기 백성들의 죄를 고백하며 금식했습니다. (단 9:3-19)
니느웨 사람들도 요나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 회개하였고 금식하며 죄를 고백함으로 그 성이 멸망 당하지 않았습니다.
사울도 예수 믿는 사람을 잡으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엎드러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길에서 일어나면서 주님께 돌아왔으며 그의 죄를 자복하고 3일동안 금식하였습니다.
에스라 10장 6절에도 ‘이에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서 일어나 엘리아십의 아들 여호하난의 방으로 들어가니라 저가 들어와서 사로잡혔던 자의 죄를 근심하여 떡도 먹지 아니하며 물도 마시지 아니하더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범죄는 금식하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금식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심령에 죄가 있고 근심이 있을때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를 회복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삶에 있어서도 가끔 어떤 것에 너무 몰두할때 음식이 전혀 의미없게 느껴질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음식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금식은 할 때가 있습니다.
둘째로 애통할때 금식합니다.
즉 슬픔이 금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갑자기 일어난 불행한 사고로 큰 슬픔을 당할때 식음을 전폐한다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마음이 너무 괴롭고 슬픔에 차 있을 때 음식 먹는 것이 그리 중요하지 않게 생각됩니다.
오히려 음식을 먹으려고 해도 잘 먹히지 않습니다.
밥알이 다 구더기 같이 보이고 밥만 봐도 구역질이 나고 메시겁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 큰 불행이 닥쳤을때 그들은 금식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요엘 1장 14절에는 큰 재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쳤을때 그들은 금식했다고 기록합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 바벨론에 거하던 느헤미야는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파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산산이 부서져 내리고 큰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느헤미야 1장 4절에서 이렇게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 다윗도 그의 친구가 죽었을때 금식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원수가 병들었을 때도 금식하였습니다.
삼상 31:31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대하여 금식하였습니다.
이처럼 자기에게 심한 마음의 애통과 고난이 일어날때 금식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그의 마음을 오로지 하나님께 쏟으며 이 슬픔과 고통에서 나를 해방시켜 줄 것을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큰 슬픔을 당할때 나의 애통한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으시기 바랍니다.
나의 답답하고 슬픈 마음을 누구에게 하소연 할 수 없을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털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애통하는 자에게 위로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는 나 자신이나 가족에게 슬픈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에 대하여 애통하며 금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그러한 비통한 일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금식한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이 세상은 너무 현실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비극에 대하여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거의 매일같이 수많은 비극들을 듣고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것이 우리의 감정을 상하게 만들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우리의 손발을 묶어놓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모든 것을 알았고 세상속에서 우리 인간으로서 살면서 모든 사람들의 고난을 아셨던 우리 예수님은 누구나 다 무감각할 수 밖에 없는 그러한 상황에서도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외치시면서 두눈에 눈물을 흘리셨으며 죽은 나사로의 무덤 앞에 눈물을 흘리며 서 계셨습니다. (눅 19:41, 요 11:35)
만일 나의 자녀가 병들어 생사의 위기에 서 있다면 나는 금식하며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나의 친구가 병들었을 때 나는 금식합니까?
내가 미워하는 어떤 사람이 큰 고통을 당할때 그를 위해 기도하십니까?
사람들이 그리스도없이 지옥에 가는 것을 몸으로 애통하게 되어 금식하십니까?
사람들은 ‘나는 내 삶에 별로 비극이 없기 때문에 금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변명에 지나지 않으며 합당한 대답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좀 더 생각하고 고려해야 될 것에 대하여 좀 더 민감하게 신경쓰며 생각했더라면 우리는 금식하였을 것입니다.
슬픔은 나로 하여금 금식하게 만듭니다.
애통하며 슬퍼하는 자만이 하나님이 주시는 참 위로의 축복을 맛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보호를 호소할때 금식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큰 두려움과 위험으로 인하여 금식하여 않으면 안될 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워 하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한 보호와 구출이 하나님 뿐이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위험과 고난 가운데서 금식하며 문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울부짖었습니다.
역대하 20장에 보면 모압 사람들과 암몬 사람들이 동맹하고 여호사밧과 유대를 공격했습니다.
인간적인 면에서 볼때 유다가 그들을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하였습니다.
어려움으로 인해 극한 두려움이 생기자 그들은 여호와께 낯을 향하여 금식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줄 것을 부르짖었습니다.
메대와 파사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악한 하만의 계략때문에 모두 죽임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때 에스더는 아하수에로 왕에게 자기 민족을 살려 달라는 은혜를 구하기 위해 나아가기에 앞서 모르드개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3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여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두려움이 나에게 엄습하여 어떤 위기가 닥쳐올때 하나님의 보호를 간구하기 위해 하나님께 금식합니다.
이스라엘은 개인적으로 혹은 국가적으로 어려움에 닥쳐 하나님의 보호를 호소할때마다 금식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친히 간섭하여 그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나의 어떤 어려움이나 위기를 맞이하여 도무지 내가 해결할 수 없고 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힘들때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 금식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친히 간섭하셔서 나를 붙드시고 도와 주십니다.
넷째로 어떤 중요한 일들을 결정할때 기도했습니다.
어떤 중요한 일입니까?
초대 교회에서는 교회 지도자를 선택할때 반드시 금식하고 선택하였습니다.
행 13:2 보면 안디옥 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할때에 누구를 선교사로 파송할 것인가가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교회적인 과제를 앞두고 먼저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과 바나바를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과연 이런 교회는 신령한 교회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의견이나 생각을 문제삼지 않았습니다.
서로 임직자가 되려고 하지 않았고, 임직자를 뽑기 위한 선거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그들은 기도하며 금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으면서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행 14:23에도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기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영적 지도자를 선택할때 올바른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또한 성경에 보면 사람들이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알고자 할때 깊은 마음의 소원으로 금식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창 24:33에서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의 아내 될 여자를 발견했을때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올바른 처녀를 보여 주셨는가에 대하여 너무 염려하였기 때문에 그 일로 인하여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바울도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여러번 밤을 새우며 금식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마 여러분들도 중대한 결정을 해야 될 때가 많았을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결혼할 것인가? 어느 학교에 가야 할 것인가?
어디에서 일해야 할 것인가? 가정을 어떻게 이끌어 갈 것인가?
나에게 주신 성령의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어디를 섬겨야 할 것인가?
이런 중요한 결정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러한 결정들을 어떻게 내리시겠습니까?
나의 힘으로 내가 생각해서 가장 현명한 방법으로 선택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의 힘이 아닌 제 3의 힘, 즉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그분의 뜻을 구하겠습니까?
금식은 금식 그 자체로 끝나지 않고 결과적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존전으로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과의 영적인 교제를 누리게 만듭니다.
따라서 금식은 영적인 승리를 쟁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보다 더욱 중요한 금식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경건생활입니다.
행 27:9에 보면 금식하는 절기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신약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계속적으로 금식을 행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또 많은 경우에 성도들은 규칙적으로 금식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금식하면서 육체의 탐욕을 극복하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시간으로 금식의 기간을 가졌습니다.
바울 사도도 ‘나는 내 몸을 쳐 복종시킨다’고 말했는데 아마도 그는 그의 훈련가운데 한 방편으로서 틀림없이 금식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금식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금식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을 부인하는 것을 배웁니다.
우리는 너무 먹는 일에만 전념하며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일년에 하루 이틀을 성별하여 금식하면서 주님앞에 정말 자신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 자기의 영혼을 주님 앞에 드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인생의 중요한 문제를 앞에 두고 혹은 자기 영혼의 거룩한 청결을 위하여 금식을 통하여 자기를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금식의 바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금식하는 것입니까?
17절에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금식할 때는 화장도 더 잘 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또는 금식하면서 일부러 금식 안하는 척 하는 것이 좋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이것은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아닙니까?
다시 말하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금식은 생활의 한 부분이 되어야 하는데 금식하는 동안에도 지극히 자연스럽게 날마다의 생활을 계속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연스러운 생활속에서 금식을 통해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킵니다.
금식하는 조용한 시간에 자기 육체와의 싸움에서 승리해 나감으로 자신을 향하여 맑은 창이 열리는 것을 비로소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맑은 창에 하나님의 위대한 권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그의 교회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온 성도들이 함께 금식하는 모본을 보였습니다.
금식할때마다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발견했습니다.
영광스러운 주의 은혜가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만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금식할 때마다 우리 영혼의 창이 맑아집니다.
그리고 이 맑은 창 속에 하나님의 지혜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는 그 하나님 앞에 깊숙히 엎드려 경배합니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약속하십니다. (사 58:6)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 금식의 놀라운 축복의 삶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이 금식의 삶을 통하여 우리 안에 경건한 인격생활의 거룩한 덕목이 이루어지고 나 자신을 향하여 맑은 창이 열리어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과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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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