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의로운 삶을 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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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의로운 삶을 살며
본문 : 마태복음 6장 1-4절
설교 : 백의흠 목사
요새 매일 서울 갔다가 전철을 타고 집에 내려오다 보면 전철에서 꼭 바디매오를 한두명씩 만납니다.
성경에 나오는 바디매오가 아니라 거지 장님을 말합니다.
그를 볼 때마다 저의 심정을 착잡합니다.
“동전 한푼을 던져 주어야 하느냐? 그냥 두어야 하느냐?”
마치 그는 옛날 예수님 당시의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친 것처럼 그의 입으로는 “천부여 의지옵소서 손들어 옵니다!”의 찬송을 부릅니다.
매일마다 거의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으로 예수님을 빙자해 구걸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땅에 떨어 뜨리고 있습니다.
“과연, 그에게 자비의 동전 한푼을 던져야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이름에 먹칠하는 그에게 경멸의 돌팔매를 던져야 하는가?”
참으로 고민입니다.
저의 학교 정문 앞에 가면 막달라 아줌마가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고 돈을 막달라고 하는 막달라 아줌마 입니다.
이 여인은 제가 1978년도에 총신에 입학할 때 그 이전부터 있었으니 10년이 넘었습니다.
저는 학교에 안 가는 날이 있어도 이 여인은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 일찍 등교 합니다.
그리고 정문에 서서 “전도사님, 배고파 죽겠어요”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기숙사 식당에 와서 아침도, 점심도 얻어 먹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말이 거짓말이고 그가 하는 행동이 얄미워도 그 여자가 돈을 달라고 내미는 손을 뿌리치고 그냥 학교로 들어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런 경험을 했을 줄 압니다.
지하도나 육교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볼 때마다 가끔 그냥 지나가지만 때로는 우리 마음이 씁쓸합니다.
매일 같이 상습적으로 찾아 와서 구걸할 때, 돈을 줘도 우리 마음이 씁쓸하고 그냥 돌려 보내도 괴롭습니다.
이 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구제’라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디까지, 어느 대상까지 도와 주어야 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제’는 어떤 것입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이러한 것을 종합해서 ‘구제’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 어떤 분명한 답과 구제에 대한 명백한 방향 제시와 적용을 줄 것을 기대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저도 “구제를 하라. 하지 말라” “이렇게 구제하라. 저렇게 남을 도와 줘라”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구제에 대하여 성경이 말하는 참 뜻을 생각해 보며 “나의 마음속에 점점 잊어져 사는 구제에 대한 생각들을 다시 정리하여 내가 어떻게 좀 더 주의 말씀에 실천하며 의로운 삶을 살아 갈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하시며 결심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실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구제를 하라”고 권장하는 말로 오늘 본문의 구제를 시작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말하고자 하시는 주제는 “어떻게 우리가 의를 행하여야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여야 한다”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를 행하는 대표적인 예로서 예수님은 구제와 기도와 그리고 금식을 들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은 구제와 기도와 금식을 하는 방법을 말하므르써 “너희는 구제하라” “기도하라”고 말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향하여 “구제’와 “기도”와 그리고 “금식”을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장 1절 부터 18절까지는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에 대한 교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가지의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참된 경건 생활을 대표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백성, 곧 천국 시민이 지녀야 하는 경건 생활의 모습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의 경건 생활에서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세가지 요소는 바로 이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입니다.
이것은 우리 예수님에 의해서 새롭게 강조된 교훈이 아닙니다.
구약 시대부터 또 일찌기 예수님이 이 말씀을 주셨던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힘써서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던 생활이 바로 이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가지는 유대교 경건 생활의 삼대 덕목으로 일컬어 집니다.
성경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교의 코란경에도 구제와 기도와 금식의 중요성이 한결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은 잘못된 구제, 잘못된 기도, 잘못된 금식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말씀을 삼대 덕목에 필요 없다는 폐지나 무용론을 주장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중요한 구제와 기도와 금식이 어떻게 잘못된 형태로 그 당시의 사람들에 의해서 유행되어지고 있는가를 지적하시면서 참된 구제 생활, 참된 기도생활, 금식 생활을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참된 경건을 실천하는 삶이 무엇인가를 보여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1절에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러고 주의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 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제, 기도, 금식 생활이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서 의를 실천하는 당연한 삶의 부분으로 간주되고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가지의 강조점이 모두 다릅니다.
어느 설교가는 이 구제 생활을 이웃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구제할 때 그것은 이웃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기도 생활은 하나님을 향해서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내가 기도한다는 것은 나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을 향해서 나의 창을 여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금식 생활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자신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입니다.
이웃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 하나님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 그리고 자신을 향하여 창을 여는 생활은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의로운 생활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세가지 생활은 다같이 인간의 이기심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우리는 어떻게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경건한 인격은 어떻게 형성되어 나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구제는 우리가 구제할 때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하는 경건 생활을 가르쳐 줍니다.
기도는 내 영혼에 대한 이기심을 극복하는 삶을 가르쳐 주고 금식은 육체로 부터의 욕심을 극복하는 생활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줍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잘못된 구제, 잘못된 기도, 잘못된 금식을 비판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목적은 좋은데 그것이 잘못된 동기로 행해지고 있는 것을 비판하신 것입니다.
유명한 시인 엘리어트는 “인간을 향한 사탄의 마지막 유혹은 올바른 목적을 잘못된 동기로 수행하게 하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예수님은 이 좋은 목적이 어떻게 잘못된 동기로 수행되고 있는 것인가를 지적하시면서 참된 구제 생활의 의미와 이로 인한 참된 경건이 우리의 삶속에서 어떻게 성취되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구제란 무엇입니까?
성경은 구제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구제는 하나님 백성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구제는 공동체의 의무입니다. 당연한 의무입니다.
구제 생활이 그리스도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경건 생활의 한부분이 되는 것은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렇게 가르칩니다.
신명기 15장 11절에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시편 41편 1절에도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잠언 19장 17절에도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구제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빚지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선행을 하나님이 갚으신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구제의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삶의 현장에서 계속적으로 실천해야 할 생활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에서 사도 바울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셨는데 자기는 이것을 본래 힘써 행했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주셨다.
이것은 나의 사명이며 이 선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다. 그런데 이 선교의 사명 외에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먼저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중요한 사명은 선교라는 사실을 이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잃어 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중요한 지상의 사명은 그리고 이 교회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잃어 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선교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교와 함께 바울 사도는 한가지를 더 강조합니다.
그것은 구제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가난한 자를 여러분의 생각해 주실 것을 부탁합니다.
나도 볼래 이것을 힘써서 행하려고 합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절 이하에 보면 예루살렘에 기근과 흉년이 들었을 때 마케도냐 교회들이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을 위하여 헌금하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 헌금의 중요한 사용 용도 중의 한 부분은 구제였습니다.
선교와 구제는 언제나 하나님 백성들의 중요한 관심의 초점이 되어 왔었던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의 교회에서 선교의 사명은 강조하고 있지만 구제의 사명은 등한시하는 것을 볼 때 안타갑습니다.
오늘날 현대 교회에서 선교와 구제를 등한시 할 때 교회는 타락합니다.
이것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전도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에 교회의 중대사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선교하는 구제하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물건을 다 사도들의 발 앞에 놓고 아무 것도 내 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가진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초대 교회나 중세기 초의 교회 문헌을 보면 설교 중에 많은 부분이 전도와 나그네를 대접하고 가난한 자를 돌보벼 고아와 과부를 보살피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초대 안디옥 교회는 아픈 이들을 위한 병원과 나환자나 빈민을 구제하는 기관을 세웠습니다.
그 후에는 수도원을 중심으로 여러가지 구체적인 사회 봉사, 특히 고아를 돌보는 고아원이 수도원 옆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수도사들은 신앙 생활의 중요한 선행 가운데 하나로 가난한 자를 돌보는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교회에서 선교와 구제를 했습니다.
그러나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그 후에 기독교가 국교가 된 이후에는 교회에서 행했던 모든 구제 사업을 국가에 일임했습니다.
그래서 대개의 경우에 교회에서 하는 자선 사업이 침해를 받았습니다.
국교화 이후에 물론 병원, 나그네 숙박 시설, 걸인들에 대한 동냥도 있었지만 교회는 점차 교회 치장에 주력했고 성직자 우대에 더 많이 치중하기 시작했습니다.
섬겨야 할 성직자가 섬김을 받고 나누어 주고 헌신하며 봉사하는 교회가 점점 교회 장식에만 관심을 가지면서 교회에서 구체가 점점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는 상당한 부자였고 국가 재산의 7할 내지 8할이 교회에 귀속되었지만 교회는 자기 배만 두들킬 뿐이지 전도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를 멸시하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재산을 헌금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자기 배만 채웠습니다.
재정 러시아는 러시아가 공산주의에 의해서 망하기 전에 그 넓은 국토의 8할이 모두 교회의 재산이었습니다.
가장 멋있는 건물은 교회 건축물이고 가장 큰 집은 성직자의 집이었습니다.
성직자들이 총회로 모이면 가운의 모양을 가지고 서로 누가 높냐고 다투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최고의 걸작품인 저 유명한 바티칸의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은 후에 국가도 교회도 모두 망해 버렸습니다.
교회가 주는 것을 잃어 버리고 받기만 하고 자기를 치장하기 시작할 때 교회는 타락하게 되고 중세는 암흑기를 맞이하였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가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를 때 그 교회는 점점 시들어져 갑니다.
각 신자들이 자기들의 배만 두드리며 전도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무시할 때 그 신자의 영혼은 메말라 갑니다.
저는 한국 교회가 이웃의 가난한 농어촌 교회를 등한시하고 자기 교회 담만 높이 싸는 모습을 볼 때 “이래서는 안 되는데”하면서 안타까워 합니다.
제가 얼마전에 한국 섬 선교회에서 나온 월간지를 보았습니다.
그 곳에는 낙도에서 복음을 위해 애쓰는 전도사님들의 간절한 편지 기도의 제목들이 있었습니다.
그 편지 내용들이 저의 안일한 마음을 깨우쳐 주었기에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이냐? 다시 생각해 보기 위해 그 편지 중에 그 편지의 일부를 적어 보았습니다.
먼저 전남 여수에서 배로 3,4 시간 거리에 있는 조그마한 섬 조발도에서 사역하시는 전도사님이 보면 편지을 보면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저에게는 가정이 있습니다. 아내와 세살 짜리 어린 딸과 생후 2주된 딸이 있습니다.
저희는 아직까지 이러한 일이 고생인 줄 모르고 살아 왔고 주님의 일이기에 당연한 일이 아닌가 하고 생활해 왔습니다. 며칠 먹을 양식만 있으면 족한 줄 알았고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만 힘써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 아내와 어린 자녀들에게 미안할 뿐입니다.
노회와 큰 교회들을 찾아 다니며 도움을 구했지만 농어촌 교회를 등한시 하고 개 교회만이 높이 쌓아 올리려는 것을 볼 때 너무 안타깝고 애속하기도 합니다. 때로는 태풍주의보다 폭풍주의보로 인해서 여객선이 출항하지 못할 때는 부둣가에서 바다만 쳐다보며 원망할 때가 한 두번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러한 고생과 고통이 나의 자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단지 이곳의 사정과 섬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분들의 사정을 말했을 뿐입니다.”
저희 섬 주위에고 조그만한 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들이 없는 것이 안타깝고 신학교는 많고 목회자들이 많이 배출되는데 이러한 어려운 곳을 찾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역자들이 적은게 안타깝습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여러가지 생각이 들지만 이곳에 머물고 있는 주님의 손길과 몇 되지 않는 영혼들이 나를 원하고 소외된 이 마을에 기쁜 소식을 심어서 하늘의 신령한 만나를 먹여 주고 싶습니다”
전남 끝에 있는 조그만 섬에서 들려 온 편지가 오늘날 우리의 한국 교회를 향해 외치는 하나님의 경고문같이 들리지 않습니까?
다음은 경남 최남단에 위치한 매물도에서 온 편지를 소개하겠습니다.
이 곳에는 체력도 약하고 몸도 약한 70이 넘은 전도사님이 사역하고 있습니다.
손이 떨려 글씨가 고르지 못하게 쓴 편지입니다.
“저는 불치의 병으로 사경을 헤매다가 기도로 회생하여 주님께 이 몸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61년부터 여러 섬과 농촌에서 시무하다가 84년 5월에 이 곳 매물도에 왔습니다.
매물도에 와서는 굶은 때도 많았습니다.
연료가 없어 냉방에서 떨면서 새우잠을 잘 때도 많았습니다.
내 믿음과 힘으로는 견디어 나가기가 너무나 어려워 몇번이나 떠나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용기를 주시고 위로를 주셨습니다.
허기져 마루에 누웠을 때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나도 시장하여 먹을 것을 얻으려 무화과 나무에 가서 실망하기도 하였단다.
사마리아를 지나갈 때 피곤과 목마름에 지쳐서 우물가에 주저 않은 일도 있었단다.
여우도 굴이 있고 새도 깃들일 곳이 있어도 나는 머리 둘 곳도 없었단다.”하고 격려해 주시고 힘을 돋구어 주셨습니다.
이제는 불평 불만 없이 낙심하지 않고 오직 주님 오라시는 그 시간까지 매물도에서 봉사할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생명 다하는 순간까지 기도하고 전도하겠습니다.
사람을 신자로 만드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나의 사명은 신자를 만드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전하는데 있습니다.
주의 복음을 받아 들여 신자가 되고 안 되고는 하나님께 맡길 뿐, 한 섬의 전도자가 되어 복음을 전파할 뿐입니다.
과거 26년간 나와 함께 계셔 주시고 도와 주시고 이끌어 주신 주님이 남은 여생도 함께 하실 것을 믿고 힘을 얻어 하나님 보시기에 좋으셨던 땅위에서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삶을 살겠습니다.
이 두편의 편지에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우리가 해야 될 일은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손들은 우리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6.25가 일어나서 전쟁 고아가 많이 생기자 외국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 나라 고아들을 도우면서 보낸 편지 가운데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내 생활이 너무 빠듯하여 너를 도울 힘이 없기 때문에 너를 돕기 위해서 일주일에 몇 시간을 일을 더하여 돕는다”라고 편지를 합니다.
이들을 보세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하여 노력하는 그들의 삶을 보세요.
저는 우리 한국의 신앙인들이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서 일을 더하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좀 여유가 있어서 돕는 모습은 더러 보았지만 돈이 없으나 구제를 실천하려고 시간을 더 들여 헌신하고 그리스도인들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부족할 때 남을 도와 주지 못하는 사람은 넉넉하게 되어도 남을 도와 주지 못합니다.
가난할 때 구제의 손길을 펼치지 못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구제할 줄 모릅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사람은 다 스스로 일어날 수 있고 스스로 돈을 벌어 먹고 살아야 돼,
나를 봐라 나도 누구의 도움없이 스스로 돈을 벌어 부자가 되지 않았느냐?
그러나 너도 그렇게 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적인 방법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13장 16절에는 구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구제야말로 살아 있는 신앙이라고 말했습니다, (약 2:14-17)
따라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며 그리고 교회의 중요한 사명인 구제는 마땅히 교회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 좋은 일들이 하나님의 뜻과는 상반되게 실행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이것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중요한 구제 문제가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잘못 왜곡되어지고 잘못 이해되고 잘못 실천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구제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까?
2절을 보면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의 영광을 구하려고 사람들의 인기,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구제를 하고 있습니다.
목적은 좋았으나 잘못된 동기에 의해서 구제를 하고 있는 것을 주님은 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영광을 위해서 구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가르켜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나팔을 불어대며 구제하고 있습니다.
당시 성전에서 울려 퍼지던 나팔에는 여러가지 종류가 있는데 “구제를 해달라”는 나팔 소리가 둘려 퍼질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나팔 소리를 듣자마자 어떤 사람들은 장사를 하다말고 상점문을 닫습니다.
그리고 구제하러 나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 입니다.
구제하러 나가는 태도가 다릅니다.
“여러분이여 나를 보십시오. 내가 이렇게 구제하러 나갑니다.
이 구제하는 선한 사람! 이 놀라운 일을 하고 있는 나를 좀 봐 주시오”하고 뽐내는 것 같은 사람들의 모습이 예수님의 눈에 비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고 계셨습니다.
그들의 구제 동기가 좋지 못했던 것을 주님께서 직시하고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제하기 위해서 일부러 가난한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나 많은 군중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 행위를 실천합니다.
우리말 그대로 나팔을 불어대며 구제를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였습니다.
그들의 구제 동기는 자기 P.R이 동기였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리고 자기 자신을 과시하고 선전하는 것이 목적이 된 구제를 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바라 보면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외식한다”라는 단어의 본래의 뜻은 “가면을 쓰고 연극하는 배우”라는 뜻입니다.
가면을 쓰고 무대에 등장해서 연극하는 배우.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구제하고 있었지만 그 구제의 동기가 단순한 연극적 동기에서 실천되고 있었던 것을 주님은 보시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향해 예수님은 경고를 하시고 계십니다.
그것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제를 많이 해도 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상이 없다”는 말은 “전액을 이미 다 받았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상급이 없다”는 뜻이 됩니다.
그들은 이미 세상에서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들은 아무 것도 받을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충고하십니다.
“나팔을 불지 말고 구제할 때 네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사람에게 왼손과 오른손이 한 몸에 붙어서 같이 따라 다니는데 어떻게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습니까?
어떤 성경 주석자는 이 말은 “구제했다는 것을 자신에게도 알리지 말라”는 흥미 있는 말로 풀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좋은 일을 하고 나서 자신에게 알리신 적이 있습니까?
구제한 후에 “나는 참 좋은 일을 했구나”하고 스스로 말한다면 이미 그 구제는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것입니다.
내 기억속에도 내가 구제 했다는 사실을 남겨서도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도와 주었다는 것 때문에 나 자신이 스스로 기뻐하고 만족한다면 이미 나는 기쁨이라는 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께로 부터 받을 상급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제는 사람들이 인정해 주는 구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나 자신이 기뻐하고 인정하는 구제가 되어서도 안 됩니다.
오로지 하나님만이 인정하시고 하나님만이 기뻐하시는 구제가 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구제의 동기는 내가 선을 행했다는 나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입니다.
우리는 구제로 공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해야 천국에 들어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은 구제를 함으로써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받았습니다.
십자가에서 값없이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보배로운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파멸에서 구원함을 얻습니다.
이것은 어떤 것으로도 갚아 질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은혜에 응답하여 나는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나는 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주님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또한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제일 먼저 사랑하십니까? 우리 인간들입니다.
우리들을 위해 자기 아들을 죽게 내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도 하나님이 사랑하신 우리 이웃들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내가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제의 동기다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응답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구제를 할 때 나의 속에는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니다.
돈과 물질!
사람들이 얼마나 이것을 위해 살고, 이것을 위해서 죽고 이것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습니까?
그러나 내 이웃을 구제하기 위하여 이 물질을 내어 줄 때 탐욕을 극복하는 경건한 인격이 내 안에서 형성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구제하면서 선전을 하고 자신의 한일을 알리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물질에 대한 탐욕을 극복되었을지 모르지만 명예에 대한 또 따른 욕심속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모르도록 철저하게 숨기라고 강요하는 것은 아닙니다.
별수 없이 알려지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바나바가 밭을 팔아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교회에 헌금 했을 때 이것을 교회에 다 알려졌습니다.
그 동기는 매우 순수했고 그 태도도 순수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기억하시고 성경에 기록하십니다.
그러나 같은 교회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잘못된 동기로 헌금했습니다.
그들은 잘못된 동기에서 구제합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낸 것처럼, 될수록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결코 속일 수 없는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그 이후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저주 받았던 사실을 우리는 성경에서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참된 경건이란 무엇입니까?
우리는 “경건”하면 “무엇을 하지 않은 것”이라는 차원에서만 경건을 생각합니다.
“이런 죄를 범하지 않고, 이런 장소에 가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참된 경건을 그런 소극적인 차원만을 말하지 않고 더 나아가 의로운 삶을 살며 행하는 적극적인 생활을 말합니다.
야고보 사도는 야고보서 1장 27절에서 경건의 진정한 의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 보고”
이웃을 향해 구체적인 선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우리는 구제를 통해서 이 물질의 탐욕을 극복하고 이웃을 향한 사람의 창을 열어야 합니다.
그 때 우리 속에 거룩하고 경건한 인격이 형성되어져 나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이 창이 열려 있습니까? 이웃을 향한 사랑의 창이 열려져 있습니까?
이제 설교의 첫부분에서 던질 질문에 대한 구제의 방향을 모색하겠습니다.
직업적인 거지, 즉 상습적인 거지에 대하여 구제를 해야 됩니까? 안해야 됩니까?
나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기에 대한 답을 스스로 내려 보시고 성경적인 원리만을 제시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사기꾼이나 직업적인 거지나 술주정뱅이를 도와 주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체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술에 취하여 나에게 돈을 좀 달라고 요구한다고 합시다.
그가 자기 집에 가기 위한 차비나 하루밤 숙박료를 내기 위한 것이라는 구실을 붙여 돈을 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에게 돈을주면 그가 분명히 다시 가서 술을 마셔 버릴 것을 압니다.
우리 주님은 그런 사람을 격려하거나 도우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사람에게 돈이 꼭 필요하다면 내가 반드시 그를 도와 주어야 하는 입장이라면 그를 도와야 합니다.
내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도와야 합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주어 버리는 것 같고 나의 살점을 베어 주는 것 같은 아픔을 느끼더라도 도와 주어야만 합니다.
술에 취하여 돈을 요구하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일을 하면 충분히 먹고 살 수 있는데 너무 게을러서 일하지 않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에 대하여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을 도와 주지 않는다고 해서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형제가 궁핍에 빠져 있고 내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그를 도울 입장에 있는데도 그것을 거절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이 나의 속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궁핍한 자들을 도와 주고 힘을 주기 위해 자기를 주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한가지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직업적인 거지라도 그가 불쌍하게 보이고 나의 마음 속에 그를 도와 주고 싶은 욕망이 일어난다면 그를 도와 주는데 인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속여도 좋습니다. 나에게 거짓말을 해도 좋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구걸합니다.
“그가 왜 예수님의 이름을 들먹이고, 찬송가를 부르며 구걸합니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사랑이 많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남을 잘 도와 주더라”라는 인식이 그 걸인의 마음속에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또 속더라고 기독교의 사랑을 보여 주십시요.
나를 생각해 보세요.
아무 가치 없고, 마땅히 버림 받아야 하고 도와 줄 필요도 없는 나를 도와 주고 살려서 영생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기독교는 옳고 그름의 원리보다 더 위대한 은총의 원리에 의해서 살아 갑니다.
또 속더라도 그에게 사랑을 베풀고 더 나아가 예수님의 사랑을 소개하며 근본적인 그의 가난의 방법을 해결하도록 도와 주십시요.
우리들의 적은 정성이 가난한 이의 마음을 열게 하고 우리의 작은 사랑이 그의 마음 속에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깨우치게 하는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아무쪼록 구제를 은밀하게,성실하게, 지혜롭게 행하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적은 도움일지라도 구체적으로 이웃들을 향하여 관심을 가질 때 하나님께서 누가 복음 6장 38절에서 말씀하신대로 우리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이런 축복이 우리 모두의 삶에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