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실로가 오시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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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실로가 오시기 까지
본문: 창세기 49장 8-12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창세기 49장은 야곱이 죽기 전에 그의 열 두 아들에게 축복하는 내용들입니다.
이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 열 두 지파를 형성하는데 특별히 야곱의 축복 가운데는 여러 지파가 동물을 비유로 해서 그 지파의 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에 붙여진 별명이 있습니다.
이 별명은 각 지파의 역사적인 성격들을 대표해 주고 있는 별명입니다.
먼저 르우벤는 지파는 ‘엉컹퀴’이고, 시므온 지파는 ‘문’ ‘기계’로 상징되고,
유다 지파는 ‘사자’로, 단 지파는 ‘뱀’으로, 납달리 지파는 ‘암사슴’으로 상징되었습니다.
갓 지파는 군대들이 진을 치고 있는 진지로서의 ‘천막’과 ‘암사자’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아셀 지파는 ‘곡물’로서 풍요함의 이미지를 느끼게 하고, 잇사갈 지파는 ‘나귀’ ‘짐을 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계속해서 수고하면서 땀을 흘리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던 지파입니다.
스불론 지파는 ‘배’로 상징되어 무역이 왕성했고 다른 나라에 모험적으로 진출하였습니다.
므낫세 지파는 ‘나무’ ‘수송아지’로 상징 되었고, 에브라임 지파는 ‘황소’,
베냐민 지파는 용맹성을 나타내는 ‘이리’ ‘늑대’로 상징 되었습니다.
이 중에서 어떤 별명이 제일 좋습니까?
아무래도 동물의 왕인 사자의 별명을 가진 것이 좋지 않을까요?
사자는 어느 지파에게 붙여 졌습니까?
유다 지파입니다.
야곱은 유다를 가리켜 ‘새끼 사자’ ‘수사자’ ‘암사자’로 모든 사자를 다 들면서 표현했습니다.
정말 유다 지파가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광야 생활을 하는 동안 부터 이스라엘 지파의 대표자가 됩니다.
유다 지파가 왕가의 전통을 이어 받고 이스라엘의 리더 지파가 됩니다.
이 축복은 오늘 야곱의 축복 기도에서 이미 예언되고 축복되어진 축복입니다.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왕을 배출하는 지파로서 크게 축복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온 인류를 구원할 메시야가 유다 지파를 통해 옵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 말씀을 통해 유다가 어떻게 해서 축복을 받았고 유다가 받은 축복이 어떤 축복이었는가를 살펴 보면서 유다의 축복이 우리 모두의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다가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첫째로,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는 축복을 받습니다.
8절,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내가 누군가의 찬송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누구가의 비난이나 욕의 대상이 아니라 찬송과 존경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유다는 그렇게 좋은 조건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주목 받기 어려운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자기 앞에 기라성 같은 형들이 셋이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형들은 자신들이 받은 천부적인 조건들을 잘 활용하지 못하고 오히려 뒤쳐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르우벤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힘으로 장자의 유산을 얻지 못하고 지도자적인 탁월함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도 서열상으로는 유다보다 빠른 사람이었지만 성격이 잔인하고 분노를 참지 못하여 사람을 해침으로 말미암아 징계를 받아 흩어지는 지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축복이 넷째에게로 넘어 갔습니다.
유다도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며누리와 관계를 하여 아이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회개하고 희생하는 자세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지도자로서 인정을 받고 축복을 받습니다.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신의 선택이 중요합니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은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나타납니다.
인생의 갈림길에 있을 때에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결정 됩니다.
환경과 여건이 나빠도 ‘그 사람의 됨됨이와 그 사람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서 성공이 결정됩니다.
환경과 가진 여건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의 인격을 성공적으로 개발하고 훈련시켜 나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은혜가 더해 질 때에 성공이 보장됩니다.
물론 더 좋은 조건 아래서는 성공의 가능성이 많습니다만 그러나 하나니의 도우심이 함께 하지 않고 그 사람의 인격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 좋은 조건이 모두 쓸모가 없습니다.
좋은 조건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보다는 자기 속에 좋은 성품을 지니고 태어나서 그것을 훈련시켜서 훌륭한 인격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더 확실한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
인격은 성장하고 훌륭한 자질은 계발 됩니다.
따라서 자신을 어떤 인격으로 성장 시키고 계발할 것이가를 결정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유다의 경우가 바로 그랬습니다.
유다는 똑 같은 자격을 가진 형제들 가운데에서 뛰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형제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사실 유다의 이름 자체가 ‘찬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레아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내가 이제는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하고 그 이름을 찬송인
‘유다’로 지었습니다.
찬송이라는 뜻을 가진 유다라는 이름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유다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이름이 되어 아들을 낳으면 유다라는 이름을 많이 지었습니다.
그런데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에 유다라는 이름이 나쁜 이름이 되어 유다라는 이름을 이제는 짓지 않습니다.
유다라는 이름의 뜻 자체가 ‘하나님을 찬영하자’는 영광스러운 이름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삶 자체가 ‘하나님을 찬양합시다’라는 고백 속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은 찬양의 대상이 됩니다.
찬송을 하면서 그는 찬송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라는 야곱의 축복은 승리에 대한 약속입니다.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는 말은 유다를 통해서 메시야가 오실 것에 대한 하나의 예언적인 말씀입니다.
찬양이 무엇입니까?
찬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입니다.
요한 계시록에는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께서는 찬양과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함당하오니”라고 노래합니다.
‘합당하다’는 말은 영어로 ‘worthy’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worship’ ‘예배’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예배합니까?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실 만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찬양을 받을실 만한 진정한 가치가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찬양을 합니다.
찬양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피조물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찬양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찬양은 하나님께서 나의 삶을 통치하시고 인도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찬양합니까?
원망하고 짜증내는 사람은 찬양할 수 없습니다.
감사하는 사람만이 찬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라는 사람의 삶을 분명한 목적과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삶을 주장하시고 내 삶속에 역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고통 중에서도 찬양합니다.
괴로움과 많은 고난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들은 고통까지도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것을 통해 마침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을 이루리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찬양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실라는 억울하고 매 맞고 감옥에 갇혔어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찬양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기적을 베풀어 주시고 역사를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찬양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삶이 힘들다고 짜증만 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범사에 찬양하세요.
아무리 삶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찬양하세요.
괴롭고 힘들더라도 찬양하세요.
어떤 사람을 만나 “요새 어떻게 지내십니까?”라고 물으시면 “그냥 죽을 지경입니다”
“죽지 못해서 삽니다”라고 대답하지 마세요.
그러면 진짜 죽을 지경이 되고 마음도 무겁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 인생의 짐을 맡기고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 들이고 전능하신 주님의 주권을 의지하고 “주님 찬양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살아 가세요.
그러면 나의 삶이 변할 것입니다.
찬양은 삶을 변화시키는 위대한 능력이 있습니다.
나를 둘러 싸고 있는 모든 환경이 어렵고 힘들더라도 주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라는 고백을 하면 주님께서는 그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로 우리의 환경도 변화시킬 것입니다.
귀먹어리요, 벙어리요 장님인 헨렌 켈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나의 신체적인 결함을 통해서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고 나의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찬양합니다.”
삼중고를 겪었던 여인의 입에서 찬양이 흘러 나왔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찬양하는 사람이 찬양을 받도록 세워 주십니다.
찬양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다는 형제의 찬양이 되고 가장 높은 위치에 세워 주셨습니다.
아무리 나의 삶이 어렵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마시고 찬양하여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유다는 사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9절,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 이 수사자와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라”
야곱은 동물의 왕인 세 종류의 사자를 등장시켜 유다의 힘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사자 새끼고 두번째는 수사자고 세번째는 암사자입니다.
여기서 ‘사자 새끼’는 아직 완전히 어른은 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젊고 힘있는 사자를 말합니다.
미숙하고 노련미는 부족하지만 가장 젊고 패기 있는 사자입니다.
사자는 먹이를 한번 움켜 쥐면 절대로 놓지 않는 근성과 힘이 있습니다.
다른 짐승들은 사냥을 해 놓고도 더 힘센 짐승이 나타나면 빼앗겨 버립니다.
고생만 실컷하고 실제로는 아무 것도 건지지 못한 채 입맛만 다십니다.
그러나 사자가 한번 먹이를 움켜 쥐면 어떤 짐승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습니다.
어떤 맹수도 사자 앞에서는 함부러 대들지 못합니다.
유다가 사자가 되면 아무도 그를 대적할 수 없습니다.
유다가 먹이를 먹고 포효하는 암사자와 수사자의 모습을 하고 있으니 아무도 그 가까이에 범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는 감히 범할 수 없는 존경과 위엄을 주셨습니다.
진정 존경 받는 사람은 감히 그의 권위에 도전하려는 마음을 다른 사람이 가지지 못하게 하는 위엄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격과 사고의 준수함에서 우러나는 권위요 위엄이기 때문입니다.
삶의 모습에서 훈련된 인격으로 인하여 얻어진 것이면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민자의 삶을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민에서는 때로는 상식이 통하지 않습니다.
유다 지파에는 영적인 정복력이 있습니다.
유다의 축복은 그리스도의 축복입니다.
특별히 앞으로 그리스도가 오시면 한번 움켜진 것은 절대로 놓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계신 발톱의 힘 때문입니다.
그는 한번 움켜 쥐면 절대로 놓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난 후에도 세상으로 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 속에 있는 죄성을 아시고 내가 하나님 앞에 완전히 항복하기까지 징계하시며 발톱으로 곽 붙든 채 결코 놓지 않으십니다.
머리를 굴리며 세련되게 믿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취미생활 하듯이 신앙 생활하는 사람은 조심해야 합니다.
한번은 그 발톱에 찍힐 때가 옵니다.
그 때도 다리 꼬고 커피 마시면서 속삭이듯 기도할 수 있습니까?
제가 필라델피아에서 목회를 할 때 같이 개척 교회를 시작한 집사님이 있습니다.
이 집사님 아버지가 목사님이고 형님과 동생이 다 목사입니다.
성경에 대해, 교회에 대해, 신앙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까지 교회에 충성하며 예수를 고상하게 잘 믿어 왔습니다.
성장하는 가운데 사람들의 신앙적인 모습속에서 너무나 많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체험이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알기는 아는데 자기 것이 되지 못합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잔 머리 굴리듯이 믿습니다.
헌금도 잔머리 굴려서 합니다.
하나님과 잔머리 굴려서 싸우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 결과는 뻔합니다.
여러번 말씀을 통해 권고도 하고 충고를 했는데도 그 때 뿐입니다.
하나님께 판정패되어 가다가 결국에는 타주로 이사가고 점점 더 어렵게 됐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좋아서 예수 믿은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발톱에 걸려 들었기 때문에 믿은 것입니다.
그 발톱에 걸리면 결국은 변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머리 굴리면서 믿었던 사람의 눈에서도 피눈물이 쏟아지면서 눈물 콧물이 범벅 되어 하나님께 살려 달라고 부르짖을 때가 옵니다.
그리스도에게 붙잡히는 것이 복입니다.
그 동안 반질반질하게 도망 다니면서 살아 왔다면 그 발톱에 붙잡히는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사자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입니다.
사자는 동물의 왕입니다.
유다의 지파에서 왕이 탄생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다음 구절에서 말씀합니다.
10절,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여기서 ‘홀’과 ‘치리자의 지팡이’는 왕권을 상징합니다.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는 유다 지파에서 나올 것이라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입니까?
실로가 오시기 까지 입니다.
실로는 메시야를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그에게 지도자의 영광을 주겠다는 말입니다.
유다의 자손 중에세 메시야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할 것이라는 큰 축복입니다.
훗날 정말로 그의 계보에서 다윗 왕이 탄생하고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게 됩니다.
메시야를 잉태하는 지파로 기름 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유다 지파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유다 지파에서 왕의 자격을 가지고 오실 분이 그 백성들을 강한 힘으로 붙잡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축복중의 축복입니다.
가장 좋은 축복입니다.
유다 지파에서 약속된 구원자가 오신다는 축복은 그들이 무슨 선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내가 구원을 받은 것도 무슨 선한 일을 해서 받은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저 나에게 은혜를 주셔서 하나님의 발톱 아래 잡히게 하시고 구원을 주셨습니다.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를 강하게 붙잡아 주십니다.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의 손에 붙잡힌 사람은 행복합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늘나라의 왕자로서 사자의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유다는 포도주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11,12절,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 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이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왜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고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 나무에 맵니까?
나귀가 날 뛰면 포도나무가 부러지거나 포도알이 다 떨어집니다.
그런데 왜 포도나무에 나귀를 맵니까?
거기에는 포도나무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사방이 전부 포도나무라 나귀를 맬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옷을 포조주에 빨고 문이 포도주 때문에 붉어질 정도로 온통 포도나무 천지입니다.
이스라엘에는 포도가 생활의 기본입니다.
기쁜 일이 있든지 슬픈 일이 있든지 포도주가 있어야 합니다.
결혼식에도 포도주 없는 결혼식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몸이 지치고 마음이 상했을 때에도 포도주를 마셔야 위로를 받습니다.
이처럼 생활을 기쁘게 하고 지친 마음을 위로하며 새 힘을 주는 포도주는 기쁨의 상징입니다.
이런 포도주가 무한정으로 있다는 것은 무한정으로 기뻐하며 풍성한 삶을 누릴 것이라는 축복입니다.
누가 그렇게 누릴 수 있습니까?
유다 백성이 누리고 사자의 발톱에 걸려둔 사람, 다시 말씀드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유다 지파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은 풍성한 것으로 예비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다를 강한 발톱으로 붙잡으시며 넘치는 포도주로 풍성하게 하십니다.
포도주가 풍성하게 흘러 넘쳐서 그 술에 옷을 빨아도 될 정도로 풍요로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의 미래는 번창과 풍요로움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또 기쁨이 풍성합니다.
이것은 유다 지파에게만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선택한 모든 사람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그 축복은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미래를 바라보고, 어떤 기도를 하며,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따라 받을 축복이 결정됩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어떤 선택을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따르느냐?’ 하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의 축복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후손들의 미래까지도 결정합니다.
나 때문에 나의 자녀, 나의 후손까지 축복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천국을 회복하실 때까지 이 땅에서의 삶도 축복되고 풍요롭게 되는 것도 바로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이 세상은 험하고 힘듭니다.
때로는 절망에 빠지고 세상이 끝난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발톱으로 붙잡은 자들을 풍성하게 먹입니다.
나중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해 지고 부요해 집니다.
다른 사람들은 포도주 한 모음만 마셔도 감지덕지 한데 우리는 포도주에 옷을 빨 정도로 풍성해 집니다.
눈은 포도주로 붉어지고 이는 우유로 하애질 정도로 풍성해 집니다.
이 말은 술이 그렇게 많게 될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농사가 풍요해지며 함께 나누는 기쁨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야곱이 유다에게 준 사자와 포도주의 축복은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을 얼마나 충실하게 보호하시며 얼마나 부요하게 하실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유다의 축복은 그리스도의 축복입니다.
그는 강한 발톱으로 우리를 붙잡으시며 넘치는 포도주로 우리를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께 붙잡히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가 그동안 반질반질하게 도망 다니면서 살아 왔다면 주님의 발톱에 붙잡히는 이 축복을 받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 삶의 주인이십니다.
그 주인이신 주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날마다 더 맛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축복이며 예수 믿는 기쁨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이 아무리 어렵다러도 주님께서 나에게 주실 축복을 바라 보시기 바랍니다.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의 지팡이가 나를 떠나지 않고 인도하시고 지켜 주실 것입니다.
이 놀라운 축복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유다의 축복이 나의 축복이 되고 우리 가정의 축복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 보셔서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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