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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의흠] 분노로 놓쳐 버린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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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분노로 놓쳐 버린 축복

본문: 창세기 49장 5-7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래 전에 오클라호마 시의 우체국에서 한 고독한 44살난 중년 남자가 직장의 상관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그는 화가 났습니다.

그는 그 날 직장 일을 끝내지도 않고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뛰쳐 나왔습니다.

해가 지기 전에 분을 풀지 못하고 밤새도록 이를 갈았습니다.

밤새도록 마음 속에 분노의 불길을 태웠습니다.

이튿날 아침 그는 권총 세자루를 가지고 직장에 나타났습니다.

그리로 직장 동료 14명을 무참하게 살해했습니다.


분노는 대단히 위험합니다.

분노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맞이 할 수도 있습니다.

몇 년 전에 플로리다의 마이애미에서 43살난 의사가 부인은 욕실에 있는 동안에 자기의 4살과 8살 난 아이를 15층 호텔에서 던져 버리고 자기도 뛰어 내려 자살했습니다.

캐나다에서는 20대의 남편이 아내를 10층 아파트에서 집어 넣져서 죽였습니다.

여러분은 화를 내 보신 적 있습니까?

평생을 두고 화를 내 보지 않은신 분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삶을 살면서 우리는 분노할 수 밖에 없는 상황과 환경과 문제 앞에 직면합니다.

평소에 늘 잘하다가 어떠다 한 번 문을 낸 것이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고 갑니다.

분노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금이 가고 어긋나게 만듭니다.

분노로 한번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깨어진 그릇을 다시 붙여서 쓸 수 있는 것처럼 힘듭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분노의 문제를 어떻게 다루는 것이 좋은가?’하는 문제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은 야곱이 죽으면서 그의 두 아들 시므온과 레위에게 축복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이 축복 기도는 축복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저주 같은 내용들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야곱의 둘째 아들과 셋째 아들입니다.

여러 자녀들 가운데 중간에 끼인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서 멀어 질 수도 있습니다.

첫째는 장자이기 때문에 사랑을 받고 막내는 막내라 귀여움을 독차지하지만 중간에 끼인 자녀는 무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공통점을 가진 시므온과 레위는 ‘가운데 끼인 형제’들 끼리 마음이 맞아서 함께 행동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를 가르켜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렇게 잘 맞는 형제애를 올바르게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시므온과 레위에 대한 야곱의 축복 기도를 살펴 보면서 ‘분노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다 주며 우리는 분노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살펴 보겠습니다.


첫째로, 죄는 쉽게 공모됩니다.

5,6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 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이 사건은 창세기 34장에 나오는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의 누이 동생 디나가 히위 족속의 추장 세겜에게 강간당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의 아들들이 분노하여 그들을 속여 할례를 받게 하고 고통을 당할 때 시므온과 레위가 칼을 가지고 가서 성에 있는 모든 남자를 죽이고 여자와 자녀와 재물을 노략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평소에 생각과 뜻이 잘 맞았는데 축복도 사이좋게 한꺼번에 같이 받습니다.

그런데 뜻이 잘 맞는 것까지는 좋은데 문제는 좋은 일에 뜻이 잘 맞는 것이 아니라 죄짓는 일에 맞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그들에게 도매금으로 저주같은 축복을 내립니다.


사람은 죄 짓는 일에 의기 투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좋은 일, 선한 일을 하자면 그렇게도 뒤로 빼고 잘 하지 않는 사람들이 죄짓은 일에서만큼은 그렇게 박자가 척척 잘 맞습니다.

요새 청소년 사이에서 일어나는 폭력 사태, 강간 사태를 보세요.

여러명이 함께 저지릅니다.

평소에 전혀 그럴 것 같지 않은 착한 아이인데도 여러 사람이 모이면 악한 일에 용감해 집니다

악은 함께 하는 사람이 있으면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되고 대담해집니다.

같이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있다는 것이 악을 무한대로 증폭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이상하게도 함께 모이면 악이 상승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그 힘은 제곱 이상으로 증폭 됩니다.

선을 행하기는 어렵지만 악한 것을 행하고 망하는 것은 너무도 쉽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여기서 ‘잔해 하는 기계’는 물건을 부수는 분쇄기 같은 것을 생각하면 됩니다.

대형 차라도 분쇄기 속에 집어 넣으면 모두 종이장처럼 됩니다.

어떤 것이라도 분쇄기 속에 집어 넣으면 뼈도 못 추리고 형체조차 볼 수 없습니다.

잔해하는 기계는 인정사정 볼 것 없이 모든 사람을 죽이고 모든 것을 파괴해 버립니다.

그런데 이 기계는 아마 가위나 작두 같은 모양의 것 같습니다.

가위는 양 날이 잘 맞아야 물건을 자를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양날처럼 죄짓는 일에 아주 박자가 잘 맞았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마음이 맞는 형제로서 서로 통하는 마음을 가지고 악을 행하게 될 때 그 악이 더 대담해 지고 강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는 과연 어떻습니까?

나는 시므온과 레위와 같지는 않습니까?

사실 이것은 그들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조건만 주어진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악을 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은 선한 것 같고 착한 것 같지만 나에게도 조건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악을 행합니다.

평소에는 가만히 있던 사람들도 군중 심리만 작동되면 길길이 날 뛰고 난리입니다.

그래서 데모하다가 폭도로 변해 이것 저것 파괴하고 강도로 변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절대 죄 짓는 일에 의기투합해서는 안됩니다.

절대 죄짓는 일에 의견 일치를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남도 파괴하고 결국에는 자기도 파괴해 버립니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여기서 ‘내 혼’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표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모의에 절대로 관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상대방을 깎아 내리고 대적하며 상처를 주기 위해 쑥덕 거리는 짓을 아주 싫어 합니다


저는 시므온과 레위의 모습을 보면서 ‘왜 이들이 선한 일을 도모하는데 의기 투합하지 않고 악한 일을 하는데 의기투합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 마음과 힘을 합했다면 얼마나 복되고 칭찬받을 만한 일입니까?

자기도 좋고 남에게도 유익이 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악한 일에 의기투합 되었습니다.

옳은 일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못된 일에 하나가 됩니다.

왜 죄 짓는 일에 함께 합니까?

좋은 일에 함께 해야죠?

선한 일, 남을 도와 주는 일에 함께 해야지, 악한 일에 함께 합니까?

그런데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볼까요?

어느 사람이 누구를 칭찬하면 그 사람의 의견의 동조하여 같이 칭찬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면 신이 나서 같이 비난하고 욕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가 주위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두 형제 중 한 사람만 건전한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상황은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 중 한사람만 만류했어도 살인은 하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죄 짓는 일에 서로 조금만 박자가 달랐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겁니다.


요새 이혼을 많이 합니다.

일반인은 물론이고 유명 연예인의 이혼 거리는 당연한 것이 되었습니다.

연예인이 결혼한다고 하면 언제 이혼 할 것인가?부터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혼을 하면서 이혼 사유의 대부분이 무엇입니까?

성격 차입니다. 거의 대부분이 다 성격 차이 때문에 성격이 안 맞아서 이혼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격 차가 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살아 온 환경과 배경이 다른데 성격 차가 당연히 나야죠?

부부는 서로 성격이 달라야 좋습니다.

부부 사이에 너무 죽이 잘 맞으면 어떤 일이 옳고 그른지 검증할 수 없습니다.

부부 싸움을 할 때도 박자가 너무 잘 맞으면 큰일납니다.

한쪽이 화가 날 때 다른 한쪽도 화를 내고, 한 쪽이 한 마디 소리치면 상대방이 열마디씩 하면 그 집에는 전쟁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쪽이 화가 나서 길길이 뛰는데 다른 한쪽은 가만히 있으면 싸움이 안됩니다.

본격적인 화를 내려고 하는데 상대방은 벌써 화가 풀려서 “불 끄고 그만 자자!”하면 충돌이 적어 집니다.

상대방이 욕한다고 나도 덩달아 욕하면 어떻게 싸움이 끝나겠습니까?

침체에 빠질 때에도 서로 어긋나게 빠지는 것이 좋습니다.

남편이 침체될 때 아내는 힘이 있어야 하고 아내가 침체될 때 남편은 기력을 회복하고 있어야 합니다.

한 쪽이 안 좋을 때 다른 쪽은 그것을 맞장구 치는 것이 아니라 막아야 합니다.

그런데 시므온과 레위는 그렇지 않습니다.

시므온이 “우리 사람 죽이자”라고 말을 꺼내면 레위는 벌써 칼 들고 밖에 나가 있습니다.

그들은 나쁜 일에 서로 동조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친구를 주위의 ‘사람을 잘 사귄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 줍니다.

내가 좋은 친구와 좋은 이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 주위에 좋은 신앙이 있다는 것은 축복입니다.

내가 좋은 신앙생활을 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비밀 중의 하나는 ‘내 주변에 얼마나 경건한 신앙인들이 나를 둘러 싸고 있는냐?’에 달려 있습니다.

나의 주변에 신앙적으로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나의 신앙도 좋아집니다.

같이 모여서 교제하고 신앙 생활하다 보면 서로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모였을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같이 찬양하고 서로를 위해 격려하며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습관에 젖여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를 하면 자연히 나도 부정적인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낙심이 되고 신앙이 떨어지면 다른 사람에게도 자꾸 나쁜 소리를 해서 그도 낙심되고 신앙이 떨어지게 만듭니다.

열심히 교회를 위해 충성하다가도 마음이 안 맞아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주위 사람에게 부정적인 말을 해서 그 교회를 파괴해야만 직성이 풀립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입술을 열 때마다 찬양과 기도가 샘 솟는 사람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같이 있으면 그들을 따라 내 삶도 그렇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내 신앙이 연약할 때 나를 돌보아 주고 나를 격려해 줄 수 있는 신앙의 사람들이 얼마나 나의 주위에 있습니까?

모였을 때마다 말씀을 보고 찬송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아니면, 모였을 때마다 남을 헐 뜯고 욕하고 비난하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이야기만 널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좋은 신앙의 친구, 믿음의 사람을 만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 서로 좋은 영향을 주고 받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분노를 잘 처리하지 못하면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지나친 분노는 너와 나 모두를 힘들게 하고 망하게 합니다.

분노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가인이 분노를 잘 다루지 못해서 어떻게 됐습니까?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다.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이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분노는 그 자체는 죄가 아니지만 분노는 파괴적인 결과를 가져다 줍니다.


5,6절, “시므온과 레위는 형제요 그들의 칼은 잔해하는 기계로다 내 혼아 그들의 모의에 상관하 지 말지어다 내 영광아 그들의 집회에 참여하지 말지어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들은 자기에게 잘못한 사람뿐만 아니라 죄 없는 모든 남자를 다 죽이고 소의 발목 힘줄을 끊었습니다.

전쟁을 할 때 상대방의 전력을 약화 시키기 위해 말의 발의 힘줄을 끊았습니다.

그러면 그 말은 달릴 수도 없고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러나 소는 굳히 힘줄을 끊을 필요가 없습니다.

소의 힘줄을 끊으면 오히려 농사도 못 짓고 무거운 것도 못 나릅니다.

그런데 소의 힘줄까지 끊었다는 것은 쓸데 없는 부분까지 너무 지나치게 처리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분노 때문에 너무나 철저하게 처리하려고 굳이 할 필요가 없는 일까지 열성적으로 해치워 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분노를 가지고 있으면 분노가 더 큰 분노를 일으켜서 정상적인 분별력을 잃어 버립니다

자기의 분노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에는 그 결과가 이렇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이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

7절, “그 노염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 을 야곱 중에서 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로다”

화가 나는 대로 행동했던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켰고 저주를 받아 이스라엘 중에서 흩어지는 부족이 되었습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서로 흩어져 사는 길만이 사는 길입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같이 살면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분노로 의기 투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서로 떼어 놓아야 살 수 있습니다.

분노가 있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모아 두면 그 분노 때문에 좋은 결과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들은 서로 떨어져서 홀로 서야먄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시므온 지파를 작게 만듭니다.

그들은 작아져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들이 커지면 자신은 물론이고 남도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어떤 사람들에게는 힘이 없는 것이 오히려 복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저주 같지만 사실상 축복입니다.


나중에 시므온 지파의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민수기 1장22, 23절, “시므온의 아들들에게서 난 자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20세 이상으 로 싸움에 나갈만한 각 남자를 그 명수대로 다 계수하니 시므온 지파의 계수함을 입은 자가 오만 구천 삼백명이었더라”

그런데 40년이 지난 후에 인구 조사를 한 것을 보세요.

민 26:14 “이는 시므온 종족들이니 계수함을 입은 자가 이만 삼천 이백명이었더라”

인구가 늘었습니까? 줄었습니까?

인구가 늘어나는 것이 정상인데 인구가 줄었습니다.

59,300명에서 23,200명으로 36,100명이 줄었습니다.

무엇을 말합니까?

여기에서 복수와 증오의 감정을 가진 사람들을 외면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미움을 가지고 증오의 씨앗을 뿌린 사람들이 그 삶에 대한 댓가를 하나님은 그 자손들을 통해서 받아 내십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시므온 족속이 다른 곳으로 떠나 버려서 한 국가를 이루는 일에 참여하지 못하고 맙니다.

레위 족속도 마찬가지입니다.

레위 족속은 아예 처음부터 자기 지파의 기업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른 종족들 속으로 분산되었습니다.

다른 종족들은 다 한 곳에 뭉쳐서 힘을 가지고 살게 되었는데 레위 족속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48개 도시에 분산되어 하나님의 율법으로 다른 지파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일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레위의 살 길입니다.


물론 시므온과 레위는 자기 누이를 더럽힌 적들을 어떻게 그대로 둘 수 있을까? 하는 일종의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목적은 언제나 올바른 수단과 올바른 과정을 요구합니다.

복수, 살인, 미움 등 잘못된 감정을 가지고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을 때 이 지파는 심각하고도 어려운 고난의 길을 걸어갑니다.

이것이 얼마나 살아있는 역사적 교훈입니까?


시므온 지파가 처음부터 소외된 지파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영광된 지파였습니다.

시므온이 어떻게 해서 태어납니까?

창 29:33 “그가 다시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나의 총이 없음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도 주셨도다 하고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시므온이라는 이름의 뜻은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르우벤은 ‘보라 아들이라’고 시므온의 이름의 뜻은 ‘들으신다’라는 뜻입니다.

레아가 총이 없으므로 레아의 간구함을 주께서 들으셔서 아들을 주셔서 그 이름을 ‘시므온’이라고 하였습니다.

레위는 '연합'이라는 의미로 지어졌습니다. 

다시 말하면 시므온은 레아의 기도 응답의 결과로서 태어난 아들입니다.

‘기도의 응답으로 태어난 아들’ 그 출생이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내가 어떤 제목을 위해서 기도하고 나서 그 기도의 응답을 받은 기쁨이 있다면 성도들과 만나서 교제할 때 ‘주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셨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것은 성도가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이렇게 기도 응답과 축복 속에 태어난 아들 시므온이 증오와 살인 때문에 저주 받는 아들로 되어 버립니다.


신명기 33장에 모세가 죽기 전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을 남기는 장면이 나옵니다.

모세가 다른 모든 지파에 대한 축복은 다 하는데 시므온 지파에 관한 축복만은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모든 지파들을 축복하는 가운데서 유일하게 생략된 지파가 시므온 지파입니다.

물론 이름은 남아 있지만 시므온 ‘잊혀진 지파’ 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은 자기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으시는 이 모습을 보세요.

하나님이 그들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향한 최대의 형벌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선언이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기억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이러한 비극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들이 마지막 날 예수님 앞에 나와서 말합니다.

“주님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교회 직분도 감당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고 주의 이름으로 설교도 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주님의 이 선언은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비극입니다.

내가 주님을 안다고 하지만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이 나를 아시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이 나를 아십니까?

내가 주님 앞에 섰는데 주께서 나를 모르신다고 하신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시므온을 보세요.

그 일생의 출발이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그 어머니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셨다”는 감격에서 그 이름조차 ‘들으셨다’로 짓고 시작을 했지만 증오와 복수의 감정을 자기의 마음 속에서 가라 앉히지 못해 비극으로 그 인생이 마치게 됩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이 시므온의 비극을 보면서 깊은 영적인 깨달음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 앞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받습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하나님 앞에 오는 순간부터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의 출발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기대를 거십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저버리고 회개함이 없이 범죄속에 빠져 있으면 나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하나님은 나를 버릴 수가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은 나의 구원을 빼앗아 간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없이 내버린 사람들처럼 될 수가 있습니다.

맛 잃은 소금처럼 사람들의 발에 밟펴서 나중에는 밖으로 던지움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쓸모없는 소금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를 가지고 출발했던 내 인생이 이제 쓸모없이 이렇게 끝날 수가 있을 것인지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려워해야 할 삶의 과제입니다.


시므온의 비극은 오늘 우리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내가 잊혀지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서 끝까지 소증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을 수 있겠습니까?’

‘세월이 지날수록 내 얼굴에는 거룩한 광채가 나고 내 마음 속에는 예수의 생수가 흘러 나오는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내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 겉사람은 후패하나 내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비록 내가 늙어가지만 나를 바라보면서 ‘내 속이 변하고 있고 내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있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면 이것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아니면 좋게 출발해서 나쁘게 끝맺음을 한 시므온의 길을 나도 걸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시작이 중요하지만 끝은 더욱 중요합니다.

내 인생의 마지막 최후가 아름답기를 위해서 기도해야만 합니다.

“주님 내 인생의 끝을 더욱 아름답게 맺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나를 깊이 붙잡아 주님 앞에서 나를 변화시켜 주옵소서” 이 기도가 우리 모두의 기도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세째로, 분노를 이기기 위해 감정은 잘 다스려야 합니다.

성경은 분노한다고 “너는 이제 희망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그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갖고 있는 분노를 정죄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살다 보면 화가 납니다.

화 자체를 죄로 생각 해서 화내지 않고 살려고 한다면 병에 걸립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화 내는 것을 이해하십니다.

그러나 분노의 감정이 문제가 아니라 그 분노의 원인과 그 분노의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는가를 중요시 합니다.

화를 내는 한이 있어도 범죄하지 말아야 합니다.

분이 나서 일어나는 노와 그 노로 인한 힘을 다른 곳으로 돌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분노를 잘 다루면 오히려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결과를 가져 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네가 분노하고 있는 원인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물었습니다.

이 때 가인이 좀 더 지혜로운 생각으로 ‘하나님께서 왜 나의 제사를 거절했을까?’하면서 자신의 참 모습을 발견했다면 그는 동생을 죽이지도 않았을 것이고 축복 받는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해서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되었습니다.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인정 하세요.

사람들은 분노하고 있을 때 그 감정을 은폐하거나 억누르려고 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으면서도 괜찮다고 합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잠 못 이루며 고민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분노의 더 커다란 불길을 우리 속에서 키웁니다.

이 때 오히려 분노를 솔직히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가지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분노했습니다” “형제요! 제가 굉장히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이 분노의 감정을 파괴적인 방법이 아니라 창조적인 방법으로 표현해야 합니다.

어떤 분은 화가 날 때마다 막 먹습니다.

그러나 그러면 살만 찌게 되죠?

어떤 분은 화가 나면 머리를 짜르고 어떤 분은 일기를 씁니다.

저는 속상할 때 글을 쓰고, 교인에 대하여 화가 났을 때, 일기를 남깁니다.

어떤 분은 화만 나면 골프장으로 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화 나게 만든 대상으로 생각하며 골프를 칩니다.

우리 교인들은 골프를 별로 안 치지만 화가 날 때 골프공을 백목사라고 생각하고 치시고 화를 푸시고 그 감정을 다른 곳에 쏟아 붙지 마세요.

그 분노를 다른 방법으로 승화 시켜야지 사람에게 쏟으면 서로 상처를 입습니다.

그러나 분노를 해결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기도입니다.

시편의 많은 부분이 기도입니다.

그런데 시편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자기 울분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분노, 원망, 억울함, 가슴을 짓누르는 고통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 원수를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하나님 그들을 그냥 놔 두십니까?”하면서 하나님 앞에 자기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모은 것을 아십니다.

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다 아십니다.

나의 고통스러운 사정을 아시고 나의 눈물을 나의 마음속에 있는 원통함과 억울함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 이것이 나의 눈물이고 나의 아픔이고 나의 마음속에 있는 괴로움입니다. 이것이 내가 분통 터질 것입니다. 하나님! 어떻하면 좋습니까? 나를 도와 주세요.

제가 취해야 할 행동이 무엇이고, 이것을 통하여 깨달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제가 주님의 은혜를 의지하고 다시 일어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세요”라고 기도 하세요.

그러면 나의 마음속의 깊은 곳까지 아시는 하나님께서 나의 분노를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오늘 시므온과 레위의 모습을 통하여 분노의 결과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살펴 보았습니다.

우리는 연약한 인간들입니다.

분노의 위협앞에 쓰러질 수 밖에 없는 무능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매순간 나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능력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 위의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분노를 안으로 쌓아 놓든 밖으로 터뜨리든 그 분노 때문에 자신을 망치는 일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가 분노 때문에 어두워지고 망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혹시 분노를 갖더라도 그것이 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고 그것을 가지고 나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 분노에 지지 않고 승리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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