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마비된 양심의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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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마비된 양심의 회복
본문: 창세기 42장 1-17절
설교: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한국 사회를 떠들석하게 하게 하고 한국민에게 실망을 준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황우석 교수의 줄기 세포 조작 사건입니다.
그 사건은 한국 사람들에게 큰 충격과 실망을 주었습니다.
정직해야 하는 과학자가 전국민과 세계를 상대로 사기를 쳤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오늘날의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만 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당시의 어떤 사람들을 가리켜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고 말합니다.(딤전4:2)
‘양심에 화인 맞았다’는 말은 인두로 지져서 신경이 마비된 것처럼 양심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을 마합니다.
그래서 죄를 짓고도 죄인줄 알지 못하고, 죄를 짓고도 뉘우치지도 않고, 회개도 후회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심한 죄를 반복적으로 짓고 결국에는 심각한 도덕적 타락과 부패로 이어집니다
지난 주간에 한국의 신문에 한 여고생의 살인 사건의 범인이 잡혔다는 기사가 났습니다.
어려운 가정에서 희망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공부 잘하며 착하고 예쁘게 살던 고등학교 1학년 학생이 자기 방에서 잠을 자다가 성폭행을 당한 채 죽임을 당했습니다.
5개월만에 범인을 잡았는데 그 범인은 창문을 뜯고 집에 침입하여 잠자는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죽였습니다.
그런데 그 범인은 잡혀서도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뉘우침도 없습니다.
한가정을 완전히 불행과 파탄에 몰아 놓고도 잘못에 대한 후회조자 없습니다.
그것도 이런 범죄를 여러번 되풀이하여 범하고 있으면서도 죄책감이 전혀 없습니다.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시급히 회복해야 할 것은 도덕성의 회복입니다.
타락한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마비된 양심이 회복되고 무너진 양심이 다시 새로워져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요셉과 대면하는 요셉의 형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성경은 요셉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었지만 단순한 요셉의 눈물겨운 성공담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 요셉에게만 촛점을 맞춘다면 “노예로 애굽에 팔려간 요셉이 거기서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국무총리가 되어 나라를 잘 다스리며 행복하게 살았다”라고 하면 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요셉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 드라마입니다.
야곱의 가족을 애굽으로 이주시켜서 그 곳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시고 그들을 통해서 원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펼쳐 나가는 일종의 대하 드라마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과 더불어 이스라엘이라는 하나님의 나라를 만들고 그 나라의 기초가 될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조상들이 때문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모두가 이 이야기의 중요 인물입니다.
야곱과 함께 애굽에 내렸던 그의 열 두 아들이 이스라엘의 12지파가 됩니다.
그러나 야곱의 이 열두 아들을 열두 지파의 조상으로 쓰시기 전에 이들에게 하나님이 하셔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동생인 요셉에게 아주 못된 범죄를 저질렀습니다.
어린 소년을 무참히 죽이려 하다가 외국에 노예로 팔아 버린 흉악한 ‘인신매매범’입니다
그들의 영혼은 부패했고 신앙은 타락했고 양심은 무디어진 극악무도한 범죄자들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우시고 세상을 구원할 일들을 맡기십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범죄했던 사람을 쓰실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지 않고는 하나님이 그들을 쓰시지 않습니다.
집에 있는 그릇은 큰 그룻이나 작은 그릇이나 다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깨끗치 못한 그릇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깨끗하지 못한 그릇은 반드시 더러운 것을 씻어 내어 깨끗이 한 다음에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쓰실 때도 반드시 회개시켜 놓고 쓰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 국가의 중대한 역사적인 기초를 이루시기 전에 그에 앞서서 이들을 깨끗하게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십니다.
‘그들이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을 어떻게 변화시키시는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단순히 요셉이 그의 형제들과 헤어진지 22년만에 극적으로 만났다는 사건을 다룬 것이 아니라 ‘그 형제들이 어떻게 자기들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는가?’, 그리고 ‘요셉은 그의 형제들을 어떻게 용서하는가?’ 하는 용서의 사건을 다룬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마비된 양심을 깨우쳐 회개에 이르게 하셨는가?를 보면서 우리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앞에서 과연 어떠한가?’를 살펴보는 귀한 시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첫번째로, 하나님의 최대 관심사는 사람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사람이 어떻게 성공하느냐?’ ‘잘 사느냐?’ 혹은 ‘못 사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기근을 당해 뭘 먹고 뭘하며 살았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의 영혼이 어떤 모습이며 어떤 상태로 있는가?’ ‘죄를 지었으면 어떻게 회개하고 회복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내가 잘 사느냐? 못사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의 세계가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불꽃같은 눈으로 관찰하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과연 나의 영혼의 상태가 어떠합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어떠하십니까?
교회는 나오고 있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운 상태는 아닙니까?
하나님은 결코 손해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상황들을 변화 시키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의 형들이 양심의 부담을 받도록 그들의 심령에 압박을 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의 형들의 영혼을 깨우치기 위해 어떤 도구를 사용하십니까?
먼저는 흉년입니다.
1,2절, “때에 야곱이 애굽에 곡식이 있음을 보고 아들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서로 관망 만 하느냐, 야곱이 또 이르되 내가 들은즉 너 애굽에 곡식이 있다 하니 너희는 그리로 가서 거기서 우리를 위하여 사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리하 하매”
요셉과 그 형제들을 만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흉년’을 쓰십니다.
기근이 들어서 이년동안 비 한방울이 내리지 않아 곡식을 구할 수 없습니다.
그들을 속수무책으로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야곱이 아들들에게 “애굽으로 가서 곡식을 구해 오라 그리하면 우리가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한 상황속에 빠져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야곱의 아들들은 풍족하고도 여유있는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범했던 죄에 대해서도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흉년이 닥치자 이제는 육신적인 안정이 무너지고 사느냐?죽느냐?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결국 이 곤경 때문에 애굽을 향해 가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자연 현상을 이용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만들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깨우치게 하실 때 때로는 환경을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환경의 변화에 아주 민감합니다.
어떤 일들이 잘 풀리고 축복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고 축복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런 반면에 어떤 사고를 당해 죽을 뻔 했다가 구사일생을 살아나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특별히 어려운 환경과 고통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깨닫게 하시는 방법입니다.
이 고통을 통해 나의 무디진 양심을 다시 찾고 타락한 영적 상태를 회복시킵니다.
도저히 이제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시고 이제는 오직 하나님만을 붙잡게 만듭니다.
그런데도 어떤 때는 이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모습입니까?
요셉의 형들이 바로 그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에게 환경의 급격한 변화가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고난이 다 하나님의 징계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나의 삶에 때 아닌 흉년으로 찾아 올 수 있습니다.
갑자기 가정이 흔들거립니다. 사업이 비틀거립니다. 건강이 이상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적신호입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나를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이 나를 깨우치기 위해, 나의 영혼의 각성을 위해 내리치시는 경고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보세요.
우리가 얼마나 미련합니까?
건강할 때는 하나님을 찾지 않다가 몸에 이상이 생기면 그 때 하나님을 찾습니다.
건강할 때 하나님을 만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은 꼭 병석에 누워야 하나님을 찾습니다.
성공의 축배를 마실 때는 하나님을 모르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셔야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하나님이 넥타이 매고 좋은 말씀 하실 때 순종해야지, 몽둥이 들고 때릴 때 매맞고 나서 깨닫는 것은 미련하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점잖게 말씀하실 때 잘 믿어야지 병으로 맞고, 사고로 맞고 이리 저리 맞은 다음에 잘 하는 것은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고통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손해이고 저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 모든 고통과 저주와 아픔이 합력하여 복으로 승화됩니다
고난이 복입니다.
요셉의 형들은 기근 때문에 애굽에 내려갑니다.
그들이 애굽에 가서도 요셉을 만날 확률은 아주 희박합니다.
애굽 전역에서 쌀을 팔고 있고 요셉이 작은 일까지 세밀하게 관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만납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인간의 우연은 하나님의 필연이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그 다음에 요셉의 형들의 마비된 양심을 깨우치기 위해 사용된 도구는 요셉의 거친 대우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가서 요셉을 만나 절을 합니다.
6-9절, “때에 요셉이 나라의 총리로서 그 땅 모든 백성에게 팔더니 요셉의 형들이 와서 그 앞 에서 땅에 엎드려 절하매, 요셉이 보고 형들인 줄 아나 모르는 체하고 엄한 소리로 그들 에게 말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가로되 곡물을 사려고 가나안에서 왔나 이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을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이 그들에게 대하여 꾼 꿈을 생각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정탐들이라 이 나라의 틈을 엿보려고 왔느니라”
요셉은 그의 형들은 알아 보았지만 그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7세에 헤어졌는데 세월은 20년이 더 지나 요셉의 나이가 40살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 형들은 자기들이 애굽에 노예로 팔았던 요셉이 지금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오늘날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기근을 통하여 형들을 요셉에게 데리고 갔지만 그들은 요셉을 몰랐습니다.
사람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와도 예수님이 자기의 구주인줄 모릅니다.
바로 눈 앞에 요셉이 있었지만 요셉을 알아 보지 못한 형들처럼, 내 앞에 예수님이 계시지만 그 분이 나의 구세주인줄 모릅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아나 그들은 요셉을 알지 못하더라”
요셉은 금방 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금방 아십니다. 나의 모든 것을 다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뿐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모르는 형들에게 자신을 알리고 싶은 마음으로 터질 것 같았을 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의 형들에게 정탐군이라는 죄목을 뒤집어 씌읍니다.
이 얼마나 상반되는 장면입니까?
형들은 20여년 전에 요셉에게 자기들의 허물을 아비에게 고자질하는 자라는 누명을 씌었습니다
지금 요셉은 형들에게 당한 대로 그대로 복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은 형들의 진면목을 보고 싶었습니다.
형들도 계속해서 자신들이 ‘독실한 사람들입니다’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독실하다는 말은 ‘정직하다’는 말입니다.
11절, “우리는 다 한 사람의 아들로서 독실한 자니 종들은 정탐이 아니니이다”
15절, “너희는 이같이 하여 너희 진실함을 증명할 것이라 바로의 생명으로 맹세하노니
너희 말째 아우가 여기 오지 아니하면 너희가 여기서 나가지 못하리라”
19절, “너희가 독실한 자이면 … ”
31절, “우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는 독실한 자요 정탐이 아니니이다”
33절, “그 땅의 주 그 사람이 우리에게 이르되 내가 이같이 하여 너희가 독실한 자임을 알리니 너희 형제 중 하나를 내게 두고 양식을 가지고 가서 너희 집들의 주림을 구하고”
34절, “너희 말째 아우를 내게로 데려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탐이 아니요 독실한 자임을 내가 알고 너희 형제를 너희에게 돌리리니”
형들은 계속해서 자기들이 ‘독실한 자’ ‘정직한 자’임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요셉 앞에서 ‘결백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까?
지금 그들이 잘못한 것은 없습니다. 애굽에는 단지 곡식을 구하러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요셉만이 알고 있는 결코 결백하지 못한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하여 단 한번도 회개나 뉘우침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뻔뻔스럽게 정직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요셉의 형들의 모습을 보면서 무엇을 느끼십니까?
이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이라는 생각은 안 드십니까?
나의 모습은 과연 어떻습니까?
우리는 자 자신을 모를 때가 많습니다.
때로는 목청을 높여 주장하지만 내 진면목을 못 볼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사람의 최대의 비극이 있다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 용서함도, 구원자 예수님도 필요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다 죄인인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죄인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죄인은 희망이 있는 죄인이고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죄인은 희망이 없는 죄인입니다.
우리 인생의 최대의 축복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자기가 죄인이기 때문에 죄 용서가 필요하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구원자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아직까지 요셉의 형들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요셉의 형제들에게 양심을 각성시키기 위해 사용하셨던 것이 그들을 감옥에 가두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은 그들로 하여금 강한 양심의 죄책감을 불러 일으키실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드디어 죄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옥에서 생각할 시간을 주어서 하나님의 성령의 음성을 듣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하시기 전까지는 죄를 깨닫는 일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잘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그의 자녀들이 이 땅에서 성공하고 잘 되어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육신의 행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행복입니다.
육신이 잘 되는 것보다 영혼이 더 잘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나의 영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영혼이 어떻습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나의 영혼의 모습을 발견하고 주님 앞에 나 자신을 드렸습니까?
나의 영혼이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 나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셨습니까?
우리의 육신도 잘 되어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의 영혼이 주님을 만나 구원받고 영적인 풍성한 삶을 누리야만 합니다.
아직 나의 영혼이 각성이 없으시면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영적인 상태를 점검하고 주님을 만나 죄 용서함 받고 영혼을 기쁨과 풍부함을 누리시는 모두가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두번째로, 요셉과 형들 사이에는 풀어야 할 숙제는 풀어야 합니다.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형들에게 당한 배신입니다.
요셉은 옳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일을 다 용서하고 잊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잊고 용서했다고 하더라도 아직 그 문제는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만나서 서로 화해하고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요셉의 형들은 노예로 판 동생 요셉의 사건에 대한 최책감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까지는 잊은 척하고, 모르는 척하면서 그 일에 대해서만은 말하지 않고 살아 왔지만 그들의 마음속 깊은 곳의 양심은 이 일에 대하여 결코 침묵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죄는 세월이 간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죄책감도 세월이 간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이 간다고 우리가 저지른 죄가 묻혀 사라지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는 “세월이 약이다”라는 말을 하지만 죄는 세월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숨겨둔 죄는 반드시 드러 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들추시기 전에 내가 먼저 드러 내어야만 합니다.
내 속에 숨겨져 있고 잊혀진 죄, 말하고 싶지 않은 죄를 하나씩 들쳐 내세요.
이것은 재앙이 아닙니다. 오히려 복입니다.
우리가 속이고 얼렁뚱땅 슬쩍 넘어 간다고 하나님이 속으십니까?
하나님도 넘어 갑니까?
결코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을 살펴 보세요.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신앙 생활도 잘 하려고 하는데 내 마음에 평안이 없고, 내 영혼의 자유와 기쁨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숨겨 두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죄가 마음 깊은 곳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어 완전히 해결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은 한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어려운 일만 생기고 기도 응답도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 원망합니다.
“왜 나에게는 이렇게 고통만 오지?” “왜 이렇게 기도 응답이 없고 해결해 주시지 않지?”하면서 하나님을 원망하며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신지 의심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마지막 것을 내 놓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는 다른 계획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속지 않습니다.
나는 잊어도 하나님은 잊지 않으십니다.
요셉의 형들은 자신들 마음 깊은 곳에 숨겨 둔 것을 다 토해 내기 전까지는 이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다 고백하고 벌거벗고 난 후에 요셉이 자기 자신을 드러냅니다.
요셉이 지금까지 당한 고생과 억울함은 그가 애굽의 총리가 되므로 다 보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형들을 어떻게 용서하느냐?’ 하는 문제는 남아 있습니다.
이미 그는 형들을 다 용서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요셉이 일방적으로 용서했을 뿐입니다.
형들과 직접 만나서 화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요셉에게는 이것이 숙제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형들을 만나서 가슴을 열고 서로 용서를 주고 받아야 합니다.
이것은 세월이 흐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살아 오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앙금이 남아 있습니다. 용서를 하고 싶어도 잘 안됩니다.
이미 마음으로 용서를 했다고 해도 그것을 풀어야 하는데 잘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풀어야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요셉과 형들에게 남아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놀라운 초자연적인 간섭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요셉과 형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신앙 생활을 하는데 우리가 예측할 수 없고 상상할 수 없는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만남’입니다.
여러분!
이 만남이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이렇게 만나 같이 주님을 섬기며 신앙 생활을 합니까?
저는 미국에 와서 살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습니다.
유학은 어렸을 때부터 꿈 꿔 왔지만 미국 와서 이민의 삶을 할 것은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미국에 왔을 때에도 뉴욕은 갈 생각을 했어도 필라델피아는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미국 와서 개척 교회를 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전혀 저의 계획에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우리의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때로 만남은 우리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지만, 일단 알고 나면 눈시울이 뜨꺼워지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왜 하필이면 내가 이 여자를 만났습니까?”
“왜 내가 이 남자를 만나 이 고생 합니까?”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섭리입니다.
CRC 모임이 있어서 북부 뉴저지에 갔다 왔습니다.
그런데 우리 CRC 한인협의회 의장을 역임하신 목사님이 예수믿게 된 동기를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는 전혀 예수를 믿지 않았는데 한 여자를 알게 되어 좋아해서 결혼을 허락 받으러 갔더니 자기 딸을 안 준다고 합니다.
“왜 그러냐?”고 이유를 물어 보았더니 “예수 안 믿어서 안 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예수 믿으면 주겠냐?’고 해서 그 다음 주 부터 교회 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미국 와서 장로가 되고 사업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런 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이해하기가 어렵지만 지나고 나면 그 뜻을 알게 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수 없도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게 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 때는 나로 하여금 왜 고생하게 만들고, 왜 실패하게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지만 나중에는 알게 되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고통속에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 얻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요셉으로 하여금 그 형들을 만나게 하시고 요셉은 형들을 용서하고 형들은 자기의 죄를 발견하고 회개하게 만듭니다.
만약 그 자리에서 요셉이 형들을 아는 체하고 자신의 실체를 밝혔다면 형들은 과거의 잘못을 참회할 기회를 잃어 버렸을 겁니다.
형들은 지금 당하는 어려움을 통하여 자신들의 과거를 돌이켜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회개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회개하기 전에 하나님이 고난을 전혀 주지 않고 모든 복을 부어 주신다면 나는 회개할 기회를 잃어 버리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와 눈물 흘리며 감격하며 기뻐할 기회를 놓여 버립니다.
요셉이 형들을 궁지로 몰아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은 형들을 만지시고 숨은 죄악을 토하게 하시고 잊고 싶던 과거를 회상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죄악을 씻으시고 덮어 주시고 다시 만지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시고 용서하십니다.
앞으로 용서하실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돌아 가시므로 이미 모든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나는 단지 주님 앞에 나의 고백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내 속에 뿌리 깊은 죄악을 뿌리채 솔직하게 주님 앞에 내어 놓기만 하면 됩니다.
내 놓지 않기 때문에 고난을 주시고 그 고통을 통해 내가 깊이 회개하고 나의 인생에 대해 반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는 과정을 만드십니다.
여기의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나에게 풀어야 될 문제가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하나님 앞에 풀어야 할 죄의 문제, 회개해야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풀어야 할 것이 남아 있지는 않습니까?
아직 용서하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하고 나의 맘속에 남아 있는 앙금이 있지는 않습니까?
이 모든 것을 다 푸시기 바랍니다.
생각나는 죄, 회개하지 않은 죄가 남아 있다면, 회개하시고 용서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다 용서하세요.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과 사랑을 다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형들의 마비된 양심들이 조금씩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드디어 형들의 양심이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21절,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 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22절 끝부분에 “그러므로 그의 피값을 내게 되었도다”
형들의 마비된 양심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지난 22년동안 잠자고 있던 양심의 소리!
그래서 무뎌 질대로 무디어 졌고 이제는 마비되어서 움직이지 않던 양심의 소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형들이 내밷는 말은 뼈아픈 고통의 고백입니다. 고통과 절망의 탄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축복의 탄식입니다. 회개와 용서의 순간입니다.
“우리가 행한 대로 이제 다 받는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행한대로 다 받습니다.
내가 남에게 해를 주면 나도 그 대로 받게 됩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라고 말씀하십니다(롬2:6)
우리는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 요셉의 형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요셉의 형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날의 나의 모습입니다.
혹시 아직까지도 나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 것이 있습니까?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까?
만약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언젠가는 나에게도 어떤 사건을 통해서 깨추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치시기 전에 나에게 고통을 주기 전에 미리 깨닫고 하나님 앞에 엎드린다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고통을 주기 전에 하나님이 나를 먼저 치시기 전에, 먼저 그 분 앞에서 내 삶을 살피고, 회개하며 내 삶을 드리세요.
내 삶에 어려움이 당하기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 가세요.
그래서 매일 매일의 삶속에서, 나를 인도하시고, 나를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면서,
그 속에서 회개와 용서의 기쁨과 감격속에 살아 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엘림교회
Penn Elim Presbyterian Church
703 Pen Ambler Rd.
Ambler, PA 19002
215-939-8470
주일 예배: 오전 11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