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야곱과 장자의 명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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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야곱과 장자의 명분
본문 : 창세기 25장 27-34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 본문의 내용은 우리가 너무 자주 들어서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형 에서가 동생 야곱의 꾀에 넘너가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았다"
그래서 본문을 이야기 할 때마다 형 에서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고 야곱은 비겁하고 남자답지 못하게 형의 약점을 이용하여 사기를 쳐서 형에게서 장자 명분을 빼앗은 치사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하기야 야곱이 그런 사람일수 밖에 없는 이유가 야곱이라는 이름 차제가 그렇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25:26) '발끔치를 잡았다'
이 말을 좀더 풀이하면 '약탈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야곱은 강도요 도둑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본문을 대할때마다 무조건 야곱을 비난하고 나쁜 사람으로만 보는데 사실을 야곱이 왜 장자 명문을 뺐을려고 했는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야곱을 무조건 비난하게 됩니다.
사실 본문의 야곱은 비난 받아야만 합니다. 야곱의 행동을 정당시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야곱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에서와의 차이점입니다.
야곱이 '내가 형이 되고 싶다' '내가 장자권을 갖고 싶다'라는 생각을 가진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야곱의 마음속에는 한가지 치명적인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내가 장자권을 얻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라도 괜찮다' '내가 수단과 방법을 가지지 않고 장자가 되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지난번 시간에 살펴 본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미 리브가에게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부터 야곱이 장자가 될 것이고 큰자가 어린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은 동생으로 태어 났지만 이미 장자가 되기로 되어 있습니다.
야곱이 장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고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디루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야곱이 그것을 어떻게 이루려고 합니까?
형이 가장 배가 고팠을 때, 자기의 형이 가장 약한 처지에 있었을 때, 그 순간에 팥죽을 들고 가서 형을 유혹해서 유치하게 장자의 권한을 빼았아씁니다.
옳은 것을 얻기 위해 그릇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무리 그것의 목적이 좋고 훌륭하더라도 그것을 이루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결코 용납하지 못합니다.
영적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세속적이고 육신적인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일들은 사람의 방법으로 이루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야만 합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문제점은 내가 하나님을 믿는 교인으로서 세상의 풍습과 편법을 이용하여 나의 육신의 목표를 달성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는 어떤 방법으로라도 올은 일의 결과만 이루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적인 방법으로라도 돈을 많이 벌어서 헌금만 많이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나에게 복을 내려 준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제가 주님께 드리려고 합니다. 돈만 많이 벌게 해 주세요"
그래서 남을 사기치고 속이고 탈세하고 남의 것을 착취하여 돈을 벌어 헌금을 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돈을 번다면 그 돈을 버는 방법까지도 선해야만 합니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정의'라는 명분아래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습니다.
'대의;라는 명분아래 남을 짓밟고 쉽게 거짓말하고 쉽게 속이는 일들을 할 수 없습니다.
가장 사소한 것까지도 하나님 앞에 정당한 방법으로 해결하고 정당한 방법으로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 장자권은 틀림없이 야곱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이 대를 주실 때까지 나는 기다릴 수가 없다"
"빨리 성취하여 내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장자가 누리는 축복을 받자"
그래서 야곱은 빨리 해결하기 위해서 빨리 쟁취하기 위해서 소위 지름길을 취합니다.
그러나 야곱의 장자로서의 특권을 빨리 누렵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늦어졌습니다.
야곱이 인간적인 계략으로 장자의 명붐을 취하기를 하였지만 실제로 장자로서의 특권을 소유하고 누린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나서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데 대한 약속의 중요성은 알고 있었으니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일의 중요성을 알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도 그같은 방법을 얼마나 많이 추구합니까?
빨리 부자가 되고 빨리 성공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빨리 내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름길부터 찾습니다.
그러나 지름길을 택하려고 하지 마세요. 빠른 길이 아니라 올바른 길을 걸으세요.
우리가 빨리 출세를 하려고 하고 빨리 성공하려고 쉽게 올바른 삶을 포기하고 쉽게 잘못된 방법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이 야곱의 삶을 통해서 배워야만 합니다.
야곱은 잘못된 방법으로 지름길을 가려다가 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을 허송했습니다.
그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않습니다. 험난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당하지 못한 수단과 방법으로 목적을 추구하였기 때문에 야곱이 지불해야만 했던 뺘아픈 댓가입니다
만약 야곱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장자권을 주실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렸었다라면 그의 삶이 얼마나 다르게 전개되었을까요?
더디더라도 주님의 때를 기다리세요.
당장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며 기다리는 훈련을 배우세요.
그리고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일들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야곱에게는 이런 잘못된 방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장자권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종은 것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를 쓰더라고 그 장자권을 뺏으려고 했습니다.
그 당시 구약의 고대 근동지방의 풍습에는 장자권에 여러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의 재산이 상속원이 장자에게 있었습니다.
장자가 된다는 것은 아버지의 모든 재산을 물려 받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굉장한 거부입니다. 따라서 야곱이 장자가 되기만 하면 아버지의 심히 많은 재산을 물려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장자는 족장이 되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근동 지방은 족장 주심의 가부장제도이기 때문에 가장의 명령은 절대적입니다.
가장은 자기 집안의 식구를 마음대로 죽일 수 있는 권한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장은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고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 권한이 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주님 앞에 나가서 예배하며 주님과 더불어 교제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모든 사람에게 이 특권이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직 장자에게만 제사의 특원이 있었습니다.
에서는 배고프다는 것 때문에 장자의 권한을 하등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32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예배 드릴 수 있다는 권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권한까지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버린 것입니다" 하나님도 무시한 것입니다.
당장의 눈에 보이는 현재의 만족을 채우기 위해 신령한 것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에서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은 아닙십니까?
나는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을 하나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 많은 육신적인 목적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교제하고 신령한 것을 얻는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당장의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오늘을 위해서만 살고 내일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있습니다.
땅에서 누릴 수 있는 안락에만 관심을 가지고 살고 하늘의 신령한 보화를 소유하는 일에는 관심을 쏟지 않고 있습니다.
'지옥, 천국이 나에게 무슨 소용이 닜나? 나는 지금 돈만 벌고 여기서 잘 살면 된다.
주님의 강급이 나에게 무슨 필요가 있는가? 나는 여기서 쾌락을 누리며 편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
내가 굶어 죽게 되고 자식도 학교에 못보내게 되었는데 천국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나는 에서처럼 이렇게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당시 야곱이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을지라도 예서는 굶주림으로 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는 "내가 곤비하니" "내가 죽게 되었으니"하면서 엄살만 부립니다.
이것이 오늘날 신앙 생활하기 싫어하는 나의 핑계는 아니십니까?
세째로 장자에게는 가문을 잇는 권한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시면서 그에게 준 축복이 무엇입니까?
창세기 12장 2절,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절,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장자가 되기만 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모든 복을 받습니다.
'나는 복의 근원이 되고 모든 사람이 나를 인하여 복을 얻는다"
더구나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누가 나옵니까?
이 장자권이 계승되는 혈통을 통해서 누가 오십니까?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할 만왕의 왕이신 메시야가 오십니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바로 이삭의 장자의 권한을 통하여 메시야가 오십니다.
마태복음 1장에 예수님의 족보를 한번 보세요.
1장 2절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가 아닌)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이 형제를 낳고"
원래 예수님의 족보에 두 아들이 있으면 두 아들이 다 들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장자만 들어가서 그 가문이 형성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차남으로부터는 그 가문의 족보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원래대로 하면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에서를 낳고"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에서 대신 야곱이 들어 갑니다. 그가 장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 명문을 팔므로 이 특권을 박탈 당한 것입니다.
온 인류를 죄악 가운데서 구원하실 메시야를 탄생시킬 이 놀라운 족보를 계승할 수 있는 특원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이제 야곱이 기가나서 이 장자 명분을 빼앗으려고 한 이유를 아시겠죠?
구약의 사건을 신약식으로 푼다면 "나는 예수가 필요하다" 그런 이야기 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그 족보에 들어가야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뭐라고 말합니까?
32절, "에서가 가로되 내가 (배고파서)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료"
에서는 먹고 사는 문제가 더 필요하지 예수 그리스도가 더 필요하지 않았다는 상태입니다.
"예수, 예수가 내게 무엇이 중요한가? 예수 믿으면 밥 먹여 주나?"
내가 지금 먹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님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자식을 키운다는 사실 앞에 예수님은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의 성공을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예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내가 인생을 즐긴다는 사실 앞에서 예수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서가 어떻게 했습니까?
34절,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이 경홀이 여겼다는 말은 망령되게 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음에서 떠났다"는 말입니다,.
한그릇의 팥죽때문에 믿음을 떠난 사람, 그래서 자기의 영혼을 버린 사람. 그가 바로 에서입니다.
팥죽 한 그긋에 장자의 명분을 팔므로 그의 영혼을 망하게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에서의 모습이 오늘날 나의 모습은 아니십니까?
나도 예서처럼 육신의 문제에만 눈이 어두워 나의 영혼을 망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당장의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이 순간의 정욕과 쾌락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나의 영혼을 순결하게 보존하는 일을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있지믄 않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경고합니다.
히브리서 12장 16절, "음행하는 자와 혹 한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 하라"
계속되는 말씀을 보세요.
히브리서 12장 17절,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우리는 가끔 이런 말을 합니다.
"회개는 언제든지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언제든지 믿을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천만의 말씀입니다.
회개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만 회개가 가능합니다.
성경이 내 속에서 항상 역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이 회개하도록 사람들 안에 역사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도와 주시지 않으면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회개도 할 수 없는 그토옥 무능하고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속에 "회개를 할까 말까?" "예수를 믿을까? 말까?" "교회를 갈까? 말까?"하는 그 순간이 성령께서 도우시는 순간입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 속에 회개를 촉구하시고 나에게 이 죄에서부터 떠나라고 명하실 때 죄를 떠나 회개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에게 이 습관을 포기하라고 명하시고 네 삶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씀하실 때 나의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그 분이 지금 나에게 "너는 변해야!"라고 말씀하실 때나는 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너는 예수 믿어야 되!"하고 말씀하실 때 예수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지금 나에게 "너는 주님께 헌신해야 돼!"라고 말씀하실 때 헌신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에게 감동과 감화를 주며 말씀하실 때 내가 이것을 거절한다면 성령이 나에게 역사합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소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치 말라'(살전 5:19)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이 말씀하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3년 전에 제가 섬기던 교회에 한 성도의 아버님이 폐암으로 앉으시다가 이제 운명하실 것 같아고 해서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분은 자녀도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평생을 에수님과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 온 분입니다.
이 분은 앉아 잇을 수도 있고 눈을 말똥말똥하게 떠 있고 몸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이 분의 얼굴에는 이미 죽음의 그늘이 가려져 있고 머릿속으로는 무엇인가를 골돌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예배를 드리면서 이 분은 붙잡고 30분 이상 외쳤습니다.
"할아버지, 예수 믿으세요. 이 순간이라도 회개하고 예수 믿으세요"
"예수님이 할아버지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 받습니다.
할아버지,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말해 보세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하고 말해 보세요. 예수님을 믿으시면 고개를 끄덕이세요"
결국 이 분은 예수 믿으라는 간곡한 외침을 알아 듣지 못하고 몇 시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회개도 회개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도 예수 믿을 때가 있습니다.
성령님이 나에게 주위의 사람을 통하여 예수 믿으라고 말할 때 예수 믿어야 합니다.
성령님이 말씀을 통하여 나에게 회개하라고 찔림을 줄 때 회개해야 합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야곱은 많은 잘못된 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많은 실패를 했고 범죄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와 범죄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영적인 것을 볼 수 있는 신령한 안목이 있었습니다.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을 알았습니다.
물곤, 야곱이 장자의 명분을 뺏으려고 한 그 행동 자체는 하나님 앞에서 상받을 일은 아닙니다.
야곱의 방법을 정당시 해서는 안 됩니다.
그의 방법을 마땅히 꾸중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가 한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하다'라는 고백은 그 무엇을 갖다 놓고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시급하고도 중요한 고백입니다.
"나는 예수님을 결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는 다른 것을 포기하더라도 내 영혼의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겠습니다. 나에게는 예수님이 꼭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에게는 무엇이 가장 필요합니까?
지금 내가 손에 쥐고자 애쓰는 물질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입니까?
내가 즐기고 싶은 육체의 편안함과 쾌락입니까? 아니면 신앙입니까?
내가 얻고자 하는 명예나 권세나 성공입니까? 아니면 영원한 것입니까?
어떤 일이 있어라도 "예수님만을 놓지 마세요. 신앙만은 포기하지 마세요"
그래서 마지막 날에 여기 모은 우리 모두가 주님 앞에 서는 놀라운 축복이 임하시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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