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혜진 목사가 '목회자 세미나'에서 한 이야기들 (2)
작성자 정보
- 복음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키워드 1 : 말씀
제가 감히 목사님들 앞에서 말씀 얘기하는 게 웃기겠지만, 누군가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온도계 목사’가 될 거냐? ‘온도 조절계 목사’가 될 거냐? 온도계는 지금이 몇 도인지를 알려주는 게 온도계잖아요? 지금은 74도다. 온도계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죠. 온도 조절계는 이 온도를 바꾸는 거죠. 많은 사람들이 지금 목회가 안 된다, 개척이 안 된다, 얘기하죠. 이건 온도계 얘기인 거죠. ‘지금 몇 도다’ 라고 얘기하는 거죠. 우리는 온도를 바꿀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온도 조절계로 부름 받았지, 지금 목회가 안 되는 시대다, 온도계라고 부름 받은 게 아닙니다. 참고로, 이 시대는 식어가는 시대죠. 뜨거웠다 식어가는 시대, 이 차가운 시대의 온도를 바꾸라고, 우리가 부름 받은 거예요. ‘지금 몇 도다’ 고 얘기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런데 이 온도를 도대체 무엇으로 바꿀 거냐? 차갑게 식은 종교개혁 시대에 결국 말씀으로 그 온도를 바꾼 거잖아요? 말씀으로만 교회 온도가 바뀝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있잖아요? 운동력이 있잖아요? 좌우의 날선, 어떤 것보다 예리하고,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도들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가장 큰 세대에, 이민목회의 80%를 이찬수, 유기성 목사님이 한다는 비공식 설문조사가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이민교회의 성도들이 담임 목사님 설교가 만족이 안 돼갖고, 집에 가서 다 이찬수, 유기성 목사님 설교를 듣는답니다.
‘수평 이동’ 이른 말을 많이 합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수평 이동이라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수평 이동’ 이거 목사들이 만든 말입니다. 수평이 돌아오면, 말 그대로 여기와 여기가 같을 때 수평이 돌아오죠. 그렇게 쇼핑하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진짜 신실한 그리스도들은 그렇게 교회 안 옮기더라구요. 교회 옮기기 전에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더라고요. 고민하더라고요. 올해도 연말까지만 한번 참아보자. 그래도 못 견디겠어서 자기 영혼을 살리겠다고 옮기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수평 이동했냐고? . 자기 사냥 했다고 얘기합니다. 자기 영적으로 사냥시켰어요, 무서운 얘기입니다. 사실 진짜 약간 조심스러운 얘기죠. 긴 시간의 고민과 기도, 몸부림 끝에 한 사람이 자기 영혼 함부로 바뀌지 않습니다. 애들, 시설, 이런 사람들을 얘기하자는 게 아닙니다. 절대로 영적으로 갈급하여, 어떻게 다른 교회 목사님의 유튜브 설교라도 듣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의 그 아픔을, 우리 목사님들이 너무 모르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평이동의 원조는 예수님입니다. 성경을 보면 세례 요한의 설교를 듣던 사람들이 다 예수님께 갔거든요. 오병이어의 기적이 있고 나서 어려운 말을 하시죠. 살을 먹어야 돼요. 피를 마셔야 된다. 우리는 이미 성만찬 이야기를 알고 있기에 이 말씀도 어색하지 않죠. 예수님의 몸과 피를 먹어야 된다. 그런데 지금 요한복음 6장입니다. 아직 성만찬 하기 전입니다. 기괴하게 들리죠. 그래서 요한복음 6장을 보면, 그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갔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너희도 가려느냐’ 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이런 얘기를 합니다. ‘생명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온데 어디로 가오리까?’
지금도, ‘영생의 말씀이 있다면 떠나지 않습니다. 너 같으면 니가 목회하는 교회 다니고 싶겠느냐?’ 라고 속으로 말하는 성도의 말을, 한 목사님이 들었대요. ‘너 같으면 너는 네가 목회하는 교회 다니고 싶겠느냐?’ 에스겔 34장에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 그러므로 목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라 내 양 떼가 노략 거리가 되고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된 것은 목자가 없기 때문이라 내 목자들이 내 양을 찾지 아니하고 자기만 먹이고 내 양 떼를 먹이지 아니하였도다.’
목자가 밤에 자기 전에 제일 마지막에 하는 게 뭔지 아세요? 양 숫자 세는 거야. 목자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하는 게 뭔지 아세요? 양 숫자 세는 거야. 왜요? 내 양이 아닙니다. 그분의 양이거든요. 그런데 언제부턴가 나는 양 숫자에는 관심 없다고 말하면, 진짜 괜찮고 의식 있는 목사가 돼버렸어. 숫자가 안 중요해요? 제가 작년에 교단 지방회 목사님들과 그리스 터키 성지 순례 갔어요. 휴게소 들렸다가 떠나기 직전에 맨 날 숫자 세었어요. 왜 셀까요? 한 명이라도 놓고 가면 안 되잖아?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한 자’ 라고 했어요.
이 모순된 이야기를 하면서도 이게 모순이라는 생각을 못 해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모든 부흥은 다 수적 성장이었습니다. 사도행전 6장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많아지고, 하루에 3천이나 더하더라고요. 5천이나 더하더라고요. 놀랍게도 사도들이 말하는 모든 부흥은 수적 성장에 동반된 부흥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 위기는 뭐죠? 사람들이 떠나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장에 양 떼가 떠나가서 텅텅 비고 있는데, 목사라는 사람들이 팔짱 끼고 앉아서 ‘나는 수적 성장 따위는 관심이 없다’. 저는 이런 말씀들에 대한 반성부터 시작되니까. ‘제가 수적 성장이 전부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비본질적인 얘기를 너무 많이 합니다. 건물, 건물. 비본질입니다. 누가 몰라요? 그런데 비본질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건물 얘기를 제일 많이 해요. ‘우리 교회는 건물을 가지지 않고 학교 강당을 빌려서 예배합니다’ 제가 궁금합니다. 그게 왜 자랑이죠? 비본질이라면서요? 그런데 그분들이 광고 하면서, 건물 얘기를 제일 많이 해요. ‘우리 병원은 건물을 가지지 않습니다. 학교 강당을 빌려서 진료합니다’ 라고 광고하는 병원을 본 적이 없어요. 그게 본질이 아니니까. 제가 보기에 건물을 가장 많이 갖고 있는 곳은 병원입니다. 지금도 병원은 계속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구도 비판하지 않잖아요? ‘뭔 놈의 병원이 이렇게 비까번쩍하게 건물을 지어?’ 라고 얘기하지 않는 이유는, 본질이 아니기 때문이죠. 본질이 아니면 얘기하지 말아야 되죠. 우리는 안 그래요. 우리는 본질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건물 없는 교회 광고하고요. 사실 병원이 광고하려면 이걸 광고하는 거죠. ‘우리 병원에 오면 불치병 환자가 낫습니다’
단 하나의 병원도 ‘우리 병원은 학교를 빌려서 진료합니다’ 를 광고하지 않아요. 우리는 이상하게 됐어요. 비본질이라고 말하면서, 이렇게 말하면 괜찮은 목사가 돼버렸어요. 여러분, 의료계도 썩었어요. 그런데 의사들이 개혁 얘기 많이 안하잖아요? 우리는 개혁 얘기를 너무 많이 해요. 커피 타는 의사, 이상하지 않아요? 바리스타 자격증 가진 의사,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바리스타 가격을 가진 목사님이 너무 많아요. 여러분, 영혼들은 말씀에 목말라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잖아요.? 그런데 ‘그 교회’를 가는 이유는 목사님을 통해 선포되는 말씀 때문입니다.
말씀이 너무 중요한 것 같아요. 디모데전서 3장 2절에 ‘감독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40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마음에 닿도록 말하라’ 굉장히 중요합니다. 설교는 마음에 닿도록 얘기하는 것이고, 귀에 닿아야 되고, 마음에 닿아야 되고, 영혼에 닿아야 돼요. 그런데 성도들의 대부분의 불만이 뭐냐면,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 더 모르겠다는 거예요.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에티오피아 내시가 이사야서를 읽고 있어요.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요. 성령님께서 빌립을 보내십니다. 내시가 빌립에게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는데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답합니다. 여러분, 지도해주는 사람이 필요해요. 누가복음 24장을 보면,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말씀을 풀어주실 때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성경이 풀어지면 성도들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키에르 케고르가 어떤 말을 했냐면 ‘인간을 유혹하지 못하는 자, 구원하지도 못하리라’ 고 했어요. 대단한 문장입니다. 우리는 유혹을 항상 나쁜 것하고만 연결을 시켰어요. 그런데 제가 이 문장을 만나고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유혹하지 못하는 자, 구원하지 못하는 우리 설교가 매혹적인가요? 매력적인가요? 호켄다이크라고 하는 선교학자가 ‘선교는 매력의 감염이다’ 라는 얘기를 했어요. 설교가 매력적이어야 삶이 매력적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설교자는 예술가다’ 그랬어요. 단어로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다, 화가들은 정지된 공간에 그림을 그리지만, 설교자는 흐르는 시간의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를 그렸어요. 월터 브루그만 목사는 ‘목사는 시인이어야 된다’ 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시인이 온다> 라는 책이 있습니다. ‘교회와 세상은 마침내 시인이 오기를, 시인과 같은 설교자가 오기를 고대한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이 시대의 성도들이 정말 갈망하는 것은 설교자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제 설교 3대 원칙이 있습니다. 짧게, 쉽게, 새롭게. 그 이유는 제가 평생 자란 우리 아버지 목사님 설교가 길었고요. 너무 어려웠고요. 나 다 아는 얘기 했어요. 짜증났어요. 우리 아버지 얘기해서 좀 그런데, 1시간 기본, 1시간 반, 필 받으면 1시간 45분. 미쳐버리겠네! 친구들 데리고 왔는데, 외계어 하나도 모르는 언어 너무 어려워. 엘리아가 갈멜산에서 850명과 대결한 것 다 아는데, 그걸 굳이 다 설명하고 있어요. 내가 회중석에 너무 죄송해요. 이러니 부흥이 안 되지! 내가 회중석에 앉아서 한탄을 한 게 한 두 번이 아니야. 내가 아들이니까. 짜증이 나! 짜증이! 진짜!
제 설교 3대 원칙은 아버지로부터 배웠습니다. 반면교사. 짧게. 제 설계는 짧습니다. 혹은 짧게 느껴지게, 쉽게. 예수 설교가 쉬웠어요. 예수 설교가 짧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새롭게. 예수님의 설교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이 사람의 설교는 서기관과 바리세인과 같지 아니하다. 권세 있는 새 교훈이다’ 그랬어요. 여러분, 설교는 반드시 새로 해야 됩니다. 성도들이 이미 QT 정도 해서 다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저는 설교할 때 이 세 가지를 항상 점검합니다. 어저께 프라미스 교회에서 아침에 설교할 때 너무 짧았죠? 우선 우리 교회 대부분의 반응 속에 보시면 되지 않습니까? 좋아합니다.
설교, 짧게 하십시오. 옛날에 아버지 교회에서 13분 설교하고 내려오니까 성도들이 너무 좋아하더라고요. 짧게 혹은 짧게 느껴지게. 짧게만 해도 됩니다. 어차피 처음부터 기억 못해요. 저는 반드시 설교는 짧아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다음에 제발 좀 쉽게, 너무 어렵게 하지 마세요. 성경이 어려워요. 그러니까 목사의 사명이 뭐냐면, 성경의 행간과 행간을 채워주는 게 목사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워요. 절과 절 사이가 너무 어려운 거예요. 그런데 여기를 풀어주는 거죠. 이러지 않았을까?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런데 이게 상상의 ‘나름 표면’이 되면 안 되고, 거룩한 상상력 아닌 개연성 있는 이야기를 할 때 새로운 설교가 됩니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설교에 인사이트가 있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적을 거리’가 있는 설교. 성도들이 적으려고 펜을 꺼냈는데, 하나도 적을 게 없다? 너무 실망스러워요. 적을 것이 있는 설교.
인사이트보다 특별히 적용점이 있는 설교. 대부분의 설교는 본문을 많이 주해한 다음에, 마지막에 적용 조금 하고 마는데 그러면 안 돼요. 저는 거의 모든 절에서 적용점을 찾아요. 왜냐하면, 저는 아버지 설교를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으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했어요. ‘So what?' '그리고 어쩌라고?' 그 생각 되게 많이 했어요. 길게 1시간, 1시간 반 설교까지 내가 듣고 나서, '어쩌라고?' 진짜 그 생각 많이 했어. 어쩌라는 거야? 도대체 그래가지고 어떻게 살아야 된다는 얘기를 해줘야 될 거 아니에요? 그 얘기는 안 해! '당신한테 맡깁니다' 이런 거잖아요? 제가 보기에 적용이 없는 설교에 성도들은 실망합니다. 제 설교에는 항상 적용점이 있습니다.
제가 창세기 2장 강의하거든요. 2장 4절부터 6절, 지난번에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 설교했는데, 다음으로 넘어가려다가 가만히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더라고요. ‘아직 여호와께서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경작할 사람이 없으므로, 아직 초목이 나지 않았는데 안개만 무성하다’ 그렇구나! 하늘에서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리고 경작할 사람이 없으면, 열매를 기대할 수 없는 거구나! 적용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은혜가 필요하고, 인간의 수고가 필요한 거죠. 경작할 사람, 그래서 제가 이제 돌아가면 그 부분을 발전시켜 설교할 건데, 이 ‘경작하다’ ‘섬기다’잖아요? 섬길 사람이 있어야 되나? ‘예배하다’라고도 번역이 되잖아요? serve, 예배할 사람이 필요하고, cultivate, cultivate에서 culture가 왔잖아요? 문화를 만들 사람이 필요하고 거기에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 되는 거예요.
저는 항상 적용 하려고 노력을 하는 거죠. 여러분, 직장에서, 여러분 구역에서 수고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섬길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배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저는 적용되지 않으면 설교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전도서 12장 9절 말씀이 어떤 말씀이냐면, ‘전도자는 지혜자이어서 백성에게 지식을 가르쳤고 또 깊이 생각하고 연구하여 잠언을 많이 지었으며 전도자는 힘써 아름다운 말들을 구하였나니 진리의 말씀들을 정직하게 기록합니다’ 여러분, 설교자의 사명이 여기 있다고 봅니다. 설교자는 지식을 가르쳐야 되고요, 깊이 생각하고 연구해야 되는 사람입니다. 아름다운 말들을 구해야 되는 사람이 전도자, 설교자입니다.
저는 독서가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왜 하느냐? 우리 머리에서 다 나오지 않잖아요? 저는 책을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읽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 문장을, 우리 머리에 남는 문장을 훔치기 위해서. 우리는 성도들이 페이스북이나 인스타에 뭐에 ‘좋아요’를 누르는지 잘 보세요. 자기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공감이 가는 거예요. 여러분들, 책을 읽다가 문장 훔치는 줄 치쟎아요? 그럼 문장을 모으기 위해서 독서하는 거예요. 제가 이번에 새 성전에 입당해서 설교하면서 나희덕 시인의 말을 인용했어요. 나희덕 시인이 뭐라고 그랬냐면 나에게 시란 닻이며 돛이다. 제가 이걸 써먹었어요. ‘우리 교회의 이 새 성전은 이민사회에 단단히 뿌리 내릴 닻이고, 순항할 수 있는 돛이 되어야 한다’ 이런 문장, 제 머리에서 나온 거 아니거든요. 성도들이 이런 문장에 굉장히 반응을 합니다. 정채봉 시인이 무슨 얘기를 했냐면 ‘온실로 보낸 자식은 콩마물이 되었고, 광야로 보낸 자식은 콩나무가 되었네’ 이 문장을 외우고 있다가 9주년 때 인터뷰할 때 써먹었어요. 콩나물 될 뻔한 자식을 콩나무를 만들어주셨답니다. 저는 전도자로서, 설교자로서 연구해야 되고, 좋은 문장들을 모아야 되고... 내 거 아니잖아요? 그냥 소개하면 되는 거예요. 저는 독서를 어떻게 하냐면, 어떤 사람의 책을 읽었는데 Insight가 있는 책들이 있잖아요? 그럼 저는 그 사람의 정신이 귀해서 그 사람 책을 사요. 어떤 책을 샀는데 줄칠 게 없잖아요? 아무리 유명해도 그 사람한테 배울 게 없거든요. 그래서 저는 독서가 그런 면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묵상하고 그러니까 요리에 굳이 비유하자면 원재료는 성경이고, 뜨거운 기도가 필요하고, 불이 필요하고, 양념이 필요한데, 독서할 때 맛있는 양념들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말씀에 대한 이야기, 짧게, 쉽게, 새롭게
김동욱 기자 ⓒ 복음뉴스(BogEum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