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흠] 말의 신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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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말의 신실성
본문 : 마태복음 5장 33-37절
설교 : 백의흠 목사(엘림교회)
오늘날을 가리켜 말의 홍수 시대라고 합니다.
말이 많고 말이 넘쳐나는 시대입니다.
말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말이 많은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말이 있으므로 사회를, 가정을 더 부드럽고 화목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말들 중에서 신실성 있고 쓸만한 말이 적다는데 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잘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장사군에 말을 손님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값을 자꾸 깍으려고 하고 물건을 산 후에도 간혹 속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정치가들의 말을 국민들이 믿으려고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6.29 민주화 선언이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실현될 것이라고 확신하는 국민들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사업주들의 말을 고용자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노사문제가 점점 확산되며 큰 문제와 위기로 등장합니다.
T.V.의 news 보도를 지각 있는 사람들은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상당수 많은 사람들이 저녁 9시 뉴스 시간만 되면 T.V.를 끄거나 9시 10분부터 TV를 봅니다.
TV 시청료 거부도 보도도 공정성, 말의 진실성이 결려 되었기 때문에 시작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어머니의 말을 자녀가 잘 믿지 못해 “엄마, 진짜지?” 하고 거듭 확인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짜다” “진짜다”를 외치지만 한쪽에서는 “가짜다. 가짜다”를 외치고 “사실이다, 사실이다”라고 말하지만 한쪽에서는 “그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말합니다.
이만큼 말의 진실성이 결여됐고 이 사회는 “참된 말” “거짓없는 바른 말”을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고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이러한 시대에, 말의 신실성이 땅에 떨어진 이 시대에 다시 한번 우리로 하여금 “말의 진실성이 얼마나 중요한가?”하는 것을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맹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맹세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맹세하는 것 자체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정직한 사람은 맹세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맹세를 합니까?
그 말이 거짓말 같거나 자기가 한 말을 지키지 못할 것 같으니까 맹세를 합니다.
그 사람이 한 말이 믿을만 하지 못하기 때문에 “맹세”라는 특별 수단을 동원합니다.
맹세를 자주 하면 할수록 말의 신실성이 떨어지고 우리가 서로 한 약속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람이 어떤 말을 하던지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일 수 있는 그런 사회가 요청되고 그런 말들이 요청됩니다.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남용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인들의 말은 신실해야 함을 가르치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맹세에 대한 세가지 측면의 교훈들이 나옵니다.
첫째, 맹세에 대한 구약의 교훈들입니다.
오늘 말씀 33절은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 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들을 때 “아, 구약에서는 헛 맹세하지 말라 ‘고 그랬구나” “내가 주께 맹세한 것은 반드시 지켜야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와 비슷한 말은 구약에 있지만 이렇게 정확한 표현은 구약성경 어느 곳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모세의 율법을 다루고 계신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을 왜곡해서 다루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대체로 그러했습니다.
성경의 어떤 말씀을 끌어내어 그것을 근거로 하여 교묘하게 거기에 덧붙이고 빼어 버려 자기들의 의의 기준으로 성경을 판단합니다.
마치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말입니다.
아주 위험한 사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에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거기에 덧불이거나 빼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그것을 오늘의 삶의 적용은 할 수 있지만 그 말씀을 가감 시킬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분명히 경고하십니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 만일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 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여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계 22:18-19)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그 말씀의 의도를 변경시켜 자기들의 습관과 전통에 떼어 맞춥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헛맹세만을 금했으므로 헛 맹세만 안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구약은 맹세에 대하여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맹세에 대한 그들의 말도 다음에 구약 성경에 근거로 하여 나왔습니다.
레위기 19장 12절,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민수기 30장 2절, “사람이 여호와께 맹세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신명기 23장 21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이 말씀들의 강조점은 맹세를 금지시킨 것이 아니라 맹세의 신실성에 있습니다.
사람이 맹세로써 자기의 약속을 엄숙히 하였을 때에는 그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분명히 맹세하셨습니다.
구약에서 맹세를 완전히 금했다면 아브람이 소돔왕과 아비멜렉에게 맹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창세기 14장 22절,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게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하나님이 맹세를 금지시켰다면 이삭도 (26:31) 야곱도 (31:53) 요셉도 (47:31)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도(삿 21:5) 맹세를 안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위해 그의 아내를 찾으러 종 한 사람을 보냈을 때도 아브라함은 종에게 맹세케하고 야곱도 요셉에게 맹세하게 하였고 요셉도 형제들에게 맹세케 하고 요나단도 다윗에게 맹세하게 하였습니다.
더구나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려 할 때 하나님 자신이 친히 맹세 하였습니다.
창세기 22장 15-16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르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내 아들 내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 즉”
이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가리켜 맹세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의 교훈은 맹세를 하면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지, 맹세를 완전히 금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맹세의 심각성을 말합니다.
보통 말도 지켜야 하는데 특별한 강조를 둔 맹세는 말할 필요조차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더우기 맹세를 아무렇게나 해도 안되면 또 사소한 것을 인해 맹세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구약의 율법은 맹세를 전혀 못하게 하기 위해 맹세를 제한 한 것이 아니라 분별력 없이 맹세하고 사소한 것을 위해서도 맹세하는 잘못된 행위를 교정시키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이 맹세를 교묘하게 이용합니다.
둘째로, 맹세에 대한 바리새인의 태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간음이나 이혼에 대해서도 문자적인 태도를 취하였습니다.
구약 율법의 정신은 귀중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 문자에만 치우쳐 간음 행위 자체만 범하지 않으면 자신은 그 문제에 관한한 깨끗하고 이혼을 자주해도 이혼 증서만 써주면 그만이라고 잘못된 해석을 하는 것처럼 맹세하는 것도 문자적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법정에서 거짓 증언만 하지 않으면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처럼 그들은 맹세하지 말라는 말씀을 거짓 증언에 국한시킴으로써 사실상 바리새인들은 율법에서 말하는 많은 부분을 지키지 않아도 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들의 행동을 꺼리낌을 가리지 않고 막 행동합니다.
그들은 불필요한 것도 맹세를 하고 사소한 일을 위해서도 맹세를 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법정에서 거짓 증언만 하지 않으면 다른 여러가지 맹세를 해도 성경의 교훈에 배치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맹세하는 대상이 다르면 맹세하는 대상에 따라서 맹세를 지키기도 하고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한 맹세는 반드시 지켜야 하되 주의 이름이 분명히 언급되지 아니한 맹세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대신에 자연히 “하늘로”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하는 맹세들이 자꾸만 늘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에게 어떤 감명을 주기 위해서 맹세를 하는데 자꾸 새로운 이름들을 갖다 붙입니다.
그래서 “성전으로 맹세한다” “이 제단으로 맹세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는 “자기 머리로” 맹세하는 자들까지 있었습니다.
자기 머리로 맹세한다는 것은 “만일 내가 당신에 하는 말이 사실이 아니라면 혹은 만일 내가 내 약속을 지키지 아니한다면 내 머리를 잃어도 좋소. 나는 죽어도 좋소”라고 말합니다.
즉 우리가 누구에게 약속할 때 “나의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은 목숨을 걸로 꼭 지킨다는 것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맹세하지 않는 모든 약속은 거짓말이 될 수도 있고 그것이 안지켜 지더라도 그리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바리새인들은 맹세를 구분하여 어떤 것으로 맹세하면 지켜야 하고 다른 것으로 맹세하면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맹세를 절대적으로 지켜야 할 맹세, 어느 정도 지켜야 할 맹세, 전혀 지키지 않아도 될 맹세 등으로 구분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맹세를 남발하게 되었으면 따라서 그들의 맹세는 신실성이 없는 것이 그 특징이었고 위선을 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교훈을 왜곡하게 된 것입니다.
세번째로 맹세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 예수님은 맹세를 완전히 금지시킨 것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견해를 교정해 주신 것입니다.
34절에 예수님은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기독교의 종파인 흔히 퀘이커 교도라고 불리우는 형제 사회 단원들은 본문의 말씀을 기초로 하여 법정에서까지도 맹세하는 것으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교훈이나 예수님 자신의 교훈은 맹세를 완전히 금지시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잡혀 끌려 가서 심문을 받고 있을 때 대제사장이 물었습니다.
마태복음 26장 63절,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그 때 예수님의 대답은 “네가 그렇게 말하면 안된다”라고 하지 않고 “네가 말하였느니라”라고 말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금하지 않고 그것을 완전히 합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사도 바울도 로마서 9장 1절에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하니하노라.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로 더불어 증거하노니”라고 말하므로 맹세의 말을 했습니다.
필요한 때는 그리고 적절한 때는 맹세를 할 수도 있습니다.
법정에서 맹세하는 것도 그런 경우에 속합니다.
성경도 히브리서 6장 16절에서 말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성경은 맹세를 완전히 금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본문에서 예수님이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라고 말한 것은 무슨 뜻입니까?
주님이 하시고자 하는 것은 맹세나 저주하는 일에 항상 성스러운 칭호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는 일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맹세할 때나 저주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가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맹세와 저주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저주를 받아라”
“하나님, 저 사람 벌 주세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수원에서 실제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집사님이 아들 2명이 너무나 막나니로 어머니 속을 썩였습니다.
하도 답답하니까 이 어머니가 이 어머니가 “저 두놈 한꺼번에 다 죽어라”
“한꺼번에 죽어 같이 묻어야겠다” “하나님! 저 놈 안 데려 갑니까?”
입머룻처럼 중얼 거렸습니다.
자기 아들 죽기를 바라는 어머니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하도 답답하니까 농담반 신경질 나서 화풀이로 자주 그런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사고가 나서 두 아들이 같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 두 아들을 한꺼번에 묻으면서 회개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두 아들을 한꺼번에 죽으라고 했더니만 진짜 두 아들을 한꺼번에 묻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맹세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죄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이 맹세하지 말라고 한 것은 만물은 하나님께 속해 있으므로 아무 피조물로도 맹세하지 말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연히 “하늘로” “땅으로” “예루살렘”으로 맹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별 상관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늘로”하는 맹세는 신실한 것이어야 하고 또 지켜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가 아닙니까?
그러므로 하늘로 맹세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두고 맹세하는 것입니다.
땅도 마찬가지입니다, 땅은 하나님의 발등상입니다.
“예루살렘은 큰 임금의 성입니다.우리는 머리칼 하나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일은 모두 하나님의 권한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어떤 하나를 두고 맹세할지라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때와 마찬가지로 분명한 책임이 저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평상시의 대화에서도 맹세를 금해야 합니다.
이웃과 대화나 토론을 할 때 맹세가 필요없습니다.
이웃과 약속을 할 때도 맹세가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나약한 인간이기에 약속을 어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 약속을 어기면 누구 이름이 먹칠 당합니까?
누구의 영광이 땅에 떨어집니까?
우리들이기에 앞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먹칠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땅에 떨어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맹세가 과장된 호언이 불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그저 그 말이 옳으면 “녜, 녜”, 틀리면 “아니요, 아니요”가 필요합니다.
주님은 단순한 진실을 요구하시며 우리의 일상의 대화나 약속에서 항상 진실을 말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들이 일상 대화가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지켜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인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도 야고보서 5장 12절에서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신실성이 없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면 할수록 자신의 말이 참 진리라고 덧붙여 강조합니다.
그래서 “진짜야” ‘참말이여” “사실이야”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알고보면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거짓말과 거짓 행동이 악한 자에게서부터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은 신실한 말이 적은 이 시대에 적절한 말씀입니다.
오늘날은 국가의 약속도 잘 믿지 못합니다.
상품의 광고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친구의 말도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특기 교회 일부에서는 목사님의 말까지도 믿기 어려운 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맹세할 필요없이 과장할 필요없이 정직하게 말하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사실상 우리들이 말을 신실하게 하지 않으면 그것은 우리 속에 거하시는 성령님을 거스리는 것이며 섭섭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는 복음 전도와 관련 있습니다.
전도를 받는 사람이 전도하는 사람의 말을 들을 때 그 말이 신실하다고 믿을 때에만 복음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른 말, 신실한 말은 불신자로부터 우리가 인정받는 길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으로부터 우리는 “저 사람의 말은 확실하다. 틀림없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어야겠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본문에서 맹세를 전혀 하지 말라고 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저 감명만 주기 위해 지킬 의도도 없이 외식적으로 그리고 아무렇게나 맹세를 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오늘날처럼 부정직과 사기가 많은 시대에서는 중요한 약속을 보증하는 뜻에서 때로는 맹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우리들이 말할 때 하나님의 면전에서 하는 것처럼 사실 그대로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말의 홍수 시대에 살면서도 바른 말, 정직한 말로 보다 신뢰감 있는 사회를 이루어 나갈 책임이 있습니다.
엘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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