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 5장 3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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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광야를 지나라!(4.현현과 교제)(도약14)
본문 : 출 5:3
여러분은 진실로 하나님을 만나길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제하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모든 것이 풍부하고 편안한 궁궐일까요? 아니면 불편하고 험악한 광야일까요?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소개하면서 아래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4...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25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26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나은 자니라” (눅 7:24-26).
그렇습니다. 선지자를 보려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입니다. 선지자는 히브리어 “나비, “로 “하나님의 입”이란 의미입니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만나려면, 나아가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광야로 나가야 합니다.
오늘은 그 간 시리즈로 나누었던 “광야를 지나라!” 마지막 시간입니다. 과연 광야는 어떠한 곳일까요?
광야는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깊이 교제케 되는 은혜의 처소입니다
본문 3절 전반 " 3 그들이 가로되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은즉 has met with us 우리가 사흘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하오니 to offer sacrifices to the Lord 가기를 허락하소서...”
광야에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나타나 자신들과 만났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 광야로 가야 한다고 모세와 아론이 바로에게 말했습니다. 이 말은 광야에 히브리인의 하나님이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광야에 계신다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광야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교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광야를 뜻하는 “미드바르(Midbar, )”는 “말씀하다(다바르, Dabar, )”와 “장소”를 뜻하는 접두사 “미(Mi, )”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즉, 어원적으로 광야는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오는 장소”라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즉, 광야는 광야에 계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음성에 온전히 귀 기울이는 곳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영적 은혜의 처소입니다.
히브리어 어원에서 “말씀”을 뜻하는 “다바르”와의 연관성은 광야가 단순히 고립된 공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장소, 즉 신성한 계시와 교육의 공간임을 나타냅니다. 비교하자면 “거룩함(카도쉬)”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성전(미크다쉬)”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다바르)”이 임하는 곳이 광야(미드바르)인 것입니다. 광야는 세상의 소음과 유혹이 차단된 고요한 빈 들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보다 잘 들을 수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움을 받은 때는 그가 왕궁에서 왕의 교육을 받고 있을 때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어 양을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광야 서편 하나님의 산 호렙에서 나타나신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였습니다.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4-5).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0절).
다윗과 유대 광야는 성경 역사에서 뗄래야 뗄 수 없는 핵심적인 관계입니다. 유대 광야는 척박한 불모지였으나, 다윗에게는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보석 같은 시편을 탄생시킨 영적 산실이었습니다. 가장 어둡고 절망적인 유대 광야의 환경은 다윗으로 하여금 수많은 찬양과 기도를 쏟아내게 만들었습니다. 성경 학자들은 다윗이 광야 생활 동안 시편의 최소 30여 편 이상을 지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그 중 시편 63편은 유대 광야의 척박한 배경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깊은 갈망과 신뢰를 생생하게 담아낸 대표적인 '광야의 시'입니다.
"(다윗의 시,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곤핍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63:1).
광야는 육체적으로는 가장 두렵고 메마른 공간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영적인 깊이를 더해준 은혜의 공간이었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역사에서 영적으로 가장 혼탁한 시대를 살았던 엘리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타락을 지켜내기 위하여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의 피비린내 나는 대결이 갈멜산에서 있었습니다. 그 후에, 엘리야는 이세벨의 살해 위협 소식을 듣고 도망쳤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고 있던 사명이 너무 힘들고 어려워서 도망치던 엘리야는 탈진하여 네게브 광야에서 하나님께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왕상 19:4).
그렇게 죽기를 간구하던 엘리야를 하나님은 어루만져 살리셨습니다. 숯불에 구운 떡과 물을 공급하여 엘리야에게 힘을 주었습니다. 그 후 40주야를 걸어 엘리야는 광야 깊은 곳 호렙산 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19:9. 11). 또한 그는 세미한 음성을 듣고 굴 어귀에 서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13절). 나아가 그는 3가지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1)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왕이 되게 하라
(2)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왕이 되게 하라
(3)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의 후계 선지자가 되게 하라
아울러 바알에게 입맞추거나 무릎 꿇지 아니한 7천인을 남겨두었다고 하나님의 격려를 받았습니다(15-18).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길 원하실 때, 그분의 음성을 듣기로 결단해야 할 곳이 바로 광야입니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지만,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하시는 자의 입을 통해 역사가 일어나는 생명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단순히 물리적 공간을 넘어, 세속적 의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체험하며 신뢰를 형성하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류의 장입니다. 광야는 현대 신학에서도 중요한 상징이며, 신자들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성장할 수 있는 은혜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외로움의 공간에서 고독을 느낄 때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은밀하게 숨겨 둔 자신의 모습까지 모두 드러낼 때, 그 광야에서 하나님을 비로소 마주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우리는 먼저 고독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고독을 통해서 들려오는 내면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사람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 시간, 하나님의 음성에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TV나 스마트폰, 컴퓨터 영상 시청은 고독을 피하려는 헛된 시도입니다. 본인의 영혼에 거짓된 이미지와 시끄러운 소음이 될 뿐입니다. 또한 사람들과의 잡담 끝에서 밀려오는 것은 피곤함과 권태입니다. 채워짐보다 쏟아냄으로 공허를 불러옵니다. 반대로 고독은 결핍이 아닌 풍요를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고독은 불편한 칩거(蟄居)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는 통로(通路)입니다. 고독의 경험은 처음에는 고통스럽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과 동거하게 됨으로 심령이 풍성해집니다.
오늘날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상처 입은 영혼들이 많아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외로움을 거부하지 말고 끌어안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고독을 계기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깊이 만나 광야의 놀라운 수혜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실제로 현대의 삶 자체는 육체의 먹고 마시는 데만 몰두하게 만듭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여유를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 교제할 생각조차 하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현대의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광야의 장소와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광야를 지나며 보다 겸비해지시길 간구합니다. 자신을 현현, 즉 나타내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기도합니다. 나아가 기도와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보다 더 깊이 교제하시는 축복, 즉 “광야의 영성”을 갖고 삶을 살아가길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