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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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1장 1-11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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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목: 메시아 예수, 겸손한 등극!

본문: 마 21:1-11


드디어 예수님은 3년간의 공생애를 마치는 마지막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그 첫 날을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등극하는 대관식으로 시작했습니다. 바로 2천여년전 오늘 예수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셨습니다. 

본문 5절 “...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할렐루야!


예수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의 메시아됨을 어떻게 증명했을까요? 나아가 오늘날 우리들은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까요?


1.가장 먼저 예수님은 예지력과 나귀 주인의 태도로 입증했습니다

본문 1-3절 “1 저희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산 벳바게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두 제자를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곧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내게로 끌고 오너라 3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하시니”

6-7절 전반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7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예수님은 벳바게 마을에 이르기 전에 이미 그 동네에 매인 나귀와 나귀 새끼가 함께 있는 장면을 미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이 내어 줄 것을 이미 아셨습니다. 이는 천지만물의 창조주와 주관자가 아니면 미리 알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본인의 메시아 되심을 알렸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나귀 주인은 두 제자가 아무 허락도 없이 나귀들을 풀어 끌고 가려하자 말렸으나 주가 쓰시겠다는 말을 듣고 즉시 보냈습니다(본문 3절). 즉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 주님으로 인정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주”이십니다. 모든 만물의 주인님이십니다. 사실 '주가 쓰신다'고 뽑히는 사람과 대상은 오히려 참으로 축복된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도 이 나귀주인처럼 하나님이 쓰신다 할 때 주저치 말고 모든 것을 내어 드리며 축복받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2.둘째로 메시아됨의 증거를 구약 선지자 예언의 성취로 입증했습니다

본문 4-5절 “4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5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이 예언은 스가랴 선지자의 예언이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슥 9:9).

왕은 '강력한 권세를 소유한 자'라는 뜻입니다. 즉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나아가 제자들이 끌고 온 새끼 나귀는 이때까지 아무도 태운 적이 없었습니다.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막 11:2). 

구약에서 하나남께 제물로 드려지는 암송아지와 젖 나는 소는 멍에를 메지 않은 것이어야 했습니다. 법궤를 실은 수레도 다른 데 사용한 일이 없는 새 수레여야 했습니다 (참고, 민 19:2; 신 21:3; 삼상 6:7). 이처럼 예수님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아니한 어린 나귀를 타신 것은 선지자의 예언은 물론 구약의 비유들 역시 결국 성취한 것이었습니다. 원래 첫 새끼나 첫 열매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졌습니다 (출 23:19; 13:2).

우리 또한 하나님께 드리되 사용했던 낡은 것이 아니라 새 것을 드리시길 축원합니다.


3.끝으로 예수님은 자신의 메시아됨을 환호하는 제자들과 무리의 환성으로 증명했습니다

본문 7절 후반-11절 “...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8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10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시니 온 성이 소동하여 가로되 이는 누구뇨 하거늘

11 무리가 가로되 갈릴리 나사렛에서 나온 선지자 예수라 하니라”


겉옷을 나귀 위에 엊거나 길에 펴는 이러한 행동은 왕을 환영하는 풍습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참조) “무리가 각각 자기의 옷을 급히 취하여 섬돌 위 곧 예후의 밑에 깔고 나팔을 불며 가로되 예후는 왕이라 하니라” (왕하 9:13). 

오늘날에도 이와 유사하게 국가의 귀빈을 모실 때에 red carpet 빨간 양탄자를 깝니다.


'호산나'는 원래 '비오니 구원하소서'라는 뜻이었습니다 (시 118:25-26). 

이처럼 기원의 의미를 지닌 표현이 후대에 와서는 장막절 같은 때에 감람나무 가지를 흔들면서 행하는 일종의 환호 소리로 변형되었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는 명백한 메시아적 표현입니다. 무리들은 예수님을 다윗왕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아로 인정했습니다. 때문에 주의 이름으로 오신 메시아임을 소리 높혀 외쳤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즉 이 세상의 구원주, 구주이십니다. 우리 모두 2천년전 오늘 왕으로 등극하신 구주 예수님을 환영하십시다. 할렐루야! 호산나! 호산나!


그런데 우리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존재로부터 독특한 태도를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바로 “겸손”입니다.

나귀 주인은 예수님을 주로 인정하며 겸손히 나귀들을 내주었습니다.

어린 나귀는 사람을 한번도 태워본 적이 없었지만, 건장하고 무거운 예수님을 힘을 다해 겸손히 태우고 행진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깔았습니다. 겉옷을 까는 행위는 왕에게 드리는 겸손한 예우였으며 환영과 복종을 뜻했습니다.

환호하는 무리들 역시 겸손하게 그들의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다가 예수님이 지나가는 길에 깔았습니다. 종려나무는 승리를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예수님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하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참조, 삿 5:10; 9:6; 10:4). 군대의 지휘관이나 세상의 왕처럼 말이나 꼬끼리를 타지 않았습니다. 겸손히 나귀를 타신 그리스도는 세속적인 정복자 왕이 아니라는 사실을 반증한 것입니다. 오히려 '평화의 왕'으로 '온유의 왕, 겸손의 왕'으로 '저항하지 않는 왕'(사 53:7)으로 오셨음을 알려줍니다. 솔로몬 이후, 아니 세계 어디에서도 나귀를 탄 겸손한 왕은 없었습니다. 사실 나귀의 이미지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이는 멸시와 간고를 겪으시고 질고를 당하신 메시아의 이미지와 같습니다 (사 53:2-3).


그들은 어느 누구도 처음 행하는 일이라고 거부하지 않았습니다. 겸손히 실행했습니다. 그리하여 메시아, 왕의 대관식에 동참하는 축복과 영광을 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우리 모두도 겸손한 심령 되어 예수님의 은혜를 받지 않으시곘습니까?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진실로 그[하나님]는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잠 3:34).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벧전 5:5).


우리 모두 오늘 본문의 모든 등장인물처럼 예수님의 왕되심을 인정하시길 바랍니다. 주님 되심을 “호산나 호산나!”환호하시길 갈망합니다. 때문에 우리의 모든 시간과 재능, 물질 등을 겸손히 주님께 내어 드리게 되시길 권면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으로부터 쓰임 받는 축복을 누리시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주님의 영광에 동참하는 우리 모두 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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