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8장 1-11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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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구원받은 죄인!(3)_간음한 여인
본문 : 요 8:1-11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성전에 들어오셔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한가운데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 말을 합니다. “자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령했습니다 (레 20:10; 신 22:22-24). 근데 예수님 당신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을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거였습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을 인정하여 죽이라 말하면 예수님이 사랑을 운운하면서 사실은 사랑이 없는 거짓 구원자, 거짓 메시아라고 떠들어 대려 한 것이었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죽이지 말라” 말씀하면 모세의 율법을 부정하고 어기는 죄를 범하는 죄인이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간음을 저질렀던 여인을 돌로 쳐서 죽이려고 몰려 있던 사람들이 글쎄 하나씩 하나씩 그 자리를 떠나 가는 겁니다. 어른들로부터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손에 들었던 돌을 다 내려놓고요. 결국 다 떠나고 예수님 외에 아무도 남지 않게 됐습니다. 간음하다 현장범으로 잡힌 여인을 정죄하려던 사람들이 모두 다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본문 9절 후반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결과적으로 이 간음한 여인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목숨을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죄인이 구원받는 놀라운 사건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요?
1.첫째는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7절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이 말씀에 간음한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양심의 가책을 받았습니다.
본문 9절 전반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이 세상에 죄짓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엄밀히 돌아볼 때 자신이 죄가 있는데 어떻게 남의 죄를 정죄하고 심판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뜻을 감찰합니다(히 4:12). 안타깝게도 우리는 신앙생활 하면서도 자꾸 말씀을 피하게 되고, 진실된 나눔을 못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의 진짜 모습이 드러나 창피 당하지 않으려 회피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 말씀에 직면해서 말씀이 나를 변화시키도록 하시길 권면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아름다운 인생으로 점점 더 성화되어 가시길 축원합니다.
2.둘째로 간음한 여인이 구원받게 된 것은 예수님의 행동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6절 “...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본문 8절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예수님은 그를 고소하고자 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시험에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예수님은 몸을 굽히시고 뭔가를 손가락으로 쓰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계속해서 쉬지 않고 질문하자 잠시 일어나 위에서 함께 나눈 간단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본문 7절). 그리곤 다시 몸을 굽히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무언가를 썼습니다.
이 예수님의 “침묵의 행동”에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쳐죽이려던 사람들의 마음이 변했던 것입니다.
첫번째 예수님의 침묵은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혈안이 되었던 자들과 군중들의 즉각적인 분노를 지연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두번째 예수님의 침묵은 예수님의 말씀을 그들 각자가 자신에게 적용시킬 수 있는 시간과 분위기를 제공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도 이 같은 침묵의 행동과 시간이 절대 필요합니다. 특히 “거룩한 여가”(Otium Sanctum, holy leisure)가 필요합니다. 자신을 조절하며 하나님 말씀에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생활의 틈이 절대적으로 요청됩니다.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의 대적은 소란함과 조급함, 그리고 혼잡함입니다. 많은 현대인들은 조용한 환경을 참지 못합니다. 듣거나 보지도 않으면서 TV나 인터넷을 켜놓아 뭔가 시끄러워야 합니다. 그리고 참을성이 없습니다. 인내를 싫어 합니다. 뭐든 어떤 결과가 벌어지던 빨리빨리 결정해서 해결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나아가 한꺼번에 뭔가 여러 개를 처리하고자 합니다. 물론 동시에 여러가지 일들을 처리할 수 있는 다중업무처리자(Multi-tasker)들이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너무 복잡하게 얽혀져 있으면 긴장과 스트레스가 보통이 아니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심리적 또는 정신적 안정이 깨집니다. 심지어 육체적 건강마저 잃게 됩니다.
일상의 삶도 이러한데 우리가 침묵의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의 영적 삶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한 사역 가운데서도 “한적한 곳”으로 물러가는 습관이 있으셨습니다.
“무리를 작별하신 후에 기도하러 산으로 가시다” (막 6:46).
우리 모두도 매일의 일상 가운데 “거룩한 여가”를 마련하여 자신을 성찰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 말씀을 읽고 묵상하시길 간구합니다. 또한 단 십분이라도 아침에 일어나 기도하고 하루를 시작하시길 소망합니다. 때로는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수양관 등 조용한 장소를 찾으시길 권면합니다. 때때로 “핸드폰 금식”하며 하나님께 집중하시길 요청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하나님의 뜻을 새로이 발견하게 되시길 기도합니다. 나아가 그 뜻을 준행함으로 범죄치 않고 오히려 선을 행하며 풍성한 생명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이제 간음한 여인과 단 둘이 남은 예수님은 죄인 여인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예수님은 침묵의 행동을 마치시고 일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셨습니다. 그 다음 예수님은 죄인 여인에게 물었습니다.
본문 10절 후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여인은 다들 자리를 떠났다고 예수님을 주라 부르며 대답했습니다 (본문 11절).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본문 11절 중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할렐루야!
간음한 죄인 여인은 자신 스스로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습니다. 아니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정죄 받아 돌로 처형당할 위기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이는 예수님의 일방적인 은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구주, 구원주, 주님이신 예수님 안에는 정죄함이 결코 없습니다. 때문에 사도 바울은 웅변적으로 외쳤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2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할렐루야!
이 세상 어느 누구도, 어느 것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고 정죄할 수 없습니다 (롬 8:33-34 전반).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죄를 짓습니다. 이 세상에 죄 없는 인생은 하나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제 막 뱃속에서 태어난 갓난 아기도 원죄로 인해 죄가 있는 죄인입니다. 때문에 누구나 예외 없이 정죄 받고 그 죄값을 치뤄야만 합니다. 현실에서의 죄값은 가난과 불안, 저주, 질병, 사형 등등입니다. 내세에서는 영원한 멸망, 지옥불 둘째 사망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죄에 대한 정죄를 받지 않는 길이 있습니다. 나아가 죄악된 삶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죄인인 나를 구원하시는 성자 하나님이심을 마음에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모든 죄를 결코 정죄하지 않으시는 주님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본문의 간음한 죄인 여인이 아무 에게도 정죄 당하지 않고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게 된 것처럼, “구원받은 죄인”의 축복을 늘 누리며 사시게 되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