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21장 14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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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51)-예언과 그 해석
행21:14 “그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 하고 그쳤노라”
예언은 주로 경고의 의미를 지닙니다. 성경에 마치 ‘예언 베틀(battle)’과 같은 장면이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가수 지망생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 두 지망생 간의 경쟁을 베틀로 연출하는 장면과 흡사합니다.
바로 예레미야와 하나냐의 ‘예언 베틀’입니다. 예레미야가 목에 멍에를 메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될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하나냐가 반대 예언의 장면을 ‘연출’합니다.
하나냐는 예레미야의 목에 건 멍에를 벗겨 부수며 하나님께서 2년 안에 느브갓네살의 멍에를 이렇게 부수어 버릴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은 예레미야보다 하나냐의 퍼포먼스에 환호합니다.
결국 하나냐의 예언을 듣게 된 이스라엘은 폐망하고 왕은 눈을 뽑히고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사람들은 듣기 좋은 말씀만 들으려합니다. 경고에는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습니다.
하와이에 가면 많은 사람들이 진주만을 들립니다. 이젠 하와이의 ‘관광 명소’(?)가 된 곳입니다. 미국인들에게는 뼈아픈 실책이 담긴 교훈의 장소입니다. “Remember Pearl Harbor”
이 실책에 담긴 사연이 있습니다.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주재 일본 총영사가 동경에 보고한 정기 보고서가 있습니다. 그 보고서에는 진주만에 주둔한 미해군 전함의 동태가 자세히 적혀 있습니다.
이러한 비밀 내용을 탐지한 FBI는 정부 당국에 긴급히 보고서를 올렸습니다. ‘진주만 근처를 배회하는 일본 어선들은 스파이선이므로 경계 요함.’ 그러나 정부 당국은 이 보고서를 그냥 흘려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외에도 계속된 경계 전보가 들어왔지만 평화롭기만 한 진주만은 그런 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1941년 12월 8일, 주말이라 부대의 대부분의 병사들은 전날 밤 늦게까지 술 파티를 벌였습니다.
술을 마시고 8일 아침 공습이 시작할 때까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나마 휴일이라 레이더 조종을 연습하던 한 훈련병이 우연히 태평양 쪽에서 수많은 비행물체가 날아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병사는 재빠르게 상부에 보고하였지만 “그건 아마 새 떼일 것이다. 신경쓰지 마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훈련병을 무시한 것입니다. 훈련병은 또 다시 “아닙니다. 분명히 비행기들입니다”라고 보고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렇다면 아군의 연습기들일 것이다. 귀찮게 자꾸 보고하지 마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그때 진주만에 정박 중이던 초대형 군함 애리조나호는 단 10분 만에 격추되어 물속에 가라앉았습니다.
그 안에 타고 있던 1300여명의 미 해군 수병들도 그 배와 함께 수장되고 말았습니다. 그 배는 지금까지 건져내지 않고 그냥 수장시켜 두고 있습니다. 경고를 무시한 뼈아픈 결과입니다.
사도 바울의 예루살렘으로 가는 행보를 두고 제자들이 예언을 합니다. 수리아의 두로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행21:4)는 것입니다. 엄연한 경고였습니다. 바울은 반응하지 않습니다.
두로를 떠나 선박 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에 이르렀을 때 빌립의 집에 머뭅니다. 빌립의 네 딸들은 ’예언의 영‘이 있는 처녀들이었습니다. 그녀들도 아마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막으려는 예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때 결정적으로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유대에서 내려와 퍼포먼스로 보이면서 예언을 합니다. 바울의 띠를 가져와 자기 수족을 잡아매면서 극적인 연출을 하며 예언합니다.
예루살렘에 가면 유대인들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예언을 듣고 바울의 일행들과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의 예루살렘 행을 눈물로 막습니다.
이때 바울이 단호하게 답합니다.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행21:13).
바울은 세번에 걸친 모든 예언을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고 ’살라‘로 해석하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죽으라’로 해석한 것입니다.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초개(草芥) 처럼 여긴 것입니다.
바울의 심령 깊은 곳에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에스더의 고백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뜻을 정한 길이었습니다. 예언을 무시한 것이 아니라, 그 예언을 자신의 결심을 굳히는 촉매제로 해석한 것입니다.
예언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되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방향 제시에 그 촛점이 있습니다. 예언이 개인의 영달(榮達)을 위해 ‘사용’된다면 그것은 거짓예언일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방언하는 자들에게 예언할 것을 권하며, 그러한 은사들을 통역할 수 있기를 사모하라 권합니다. 그리고 그 포통역과 해석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나라’가 중심이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 주여
우리에게 분별의 영을 허락하소서
성령이 주시는 계시의 영을
이기적으로 해석하지 않게 하소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갖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다음 주에는 니카라과 선교여행을 다녀옵니다. 이에 한 주간 아침 묵상을 올리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