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53장 12절, 디모데전서 2장 1절 말씀 묵상 [민경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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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중보적(도고) 기도 intercessory prayer
본문 : 사 53:12; 딤전 2:1
“이러므로 내가 그로 존귀한 자와 함께 분깃을 얻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입었음이라 그러나 실상은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파가, 중보) 하시니라” (사 53:12).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엔튜크시스)와 감사를 하되” (딤전 2:1).
기도! 우리 “영혼의 호흡”인데 하려고 해도 잘 안되지요? 그리고 기도에 신경 많이 쓰지 않게 되지요? 혹시 기도하더라도 자신을 위해서는 하지만 타인을 위해서는 거의 하지 않지요? 과연 우리 신앙인들은 자신을 위한 기도만 하면 되지, 남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할 필요 또는 의무가 있을까요? 또한 어떤 용어가 이러한 기도에 합당한 용어일까요? 가령 “중보 기도”가 맞을까요? 아니면 “중보적(도고) 기도(仲保的 搗固 祈禱, intercessory prayer)”가 적절한 표현일까요?
웹스터 사전에 따르면 “중보하다intercede”는 “사이로 들어 가거나 통과하다; 서로 다르거나 다투는 사람들을 화해시킬 목적으로 당사자들 사이에서 활동하다; 조정하거나 중재하다”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 중재자가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메시테스mesites, mediator, )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이같이 중보자는 오직 한분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기 때문에, 성경적으로 성도는 “중보 기도 한다”라는 말을 하면 아니 됩니다. 신약에 “중보”란 용어가 6회 사용되었는데(갈 3:19, 20; 딤전 2:5; 히 8:6; 9:15; 12:24), 6번 모두 예수님과 직접 연관된 경우입니다 (갈 3:19의 한글성경에 마치 천사들이 중보의 손을 베푼 것처럼 오해될 수 있게 번역되었습니다만...).
중보 기도는 우리 인간들을 위해 오직 예수님만이 드리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배신할 베드로를 위해 미리 중보 기도해 주셨습니다 (눅 22:31-32). 또한 예수님은 잡혀 십자가에 죽으시기 바로 전날 유월절에도 중보 기도하셨습니다 (요 17장). 예수님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나님 아버지에게 하셨습니다(1-5절). 이어서 제자들을 위해 중보 기도하셨습니다(6-19절). 나아가 예수님은 제자들을 통해 앞으로 믿게 될 예비신자들을 위해서도 중보 기도하셨습니다(20-26절).
이뿐 만입니까? 오늘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어 하늘보좌에 앉으셔서도 중보 기도해 주시고 계십니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1).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엔튕카노) 자시니라” (롬 8:34).
그러나 오늘날 보좌에 앉아 계신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기도할 내용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면 그 기도를 중보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바로 “내 이름으로 구하라”는 의미입니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 (요 16:26). In that day you will ask in my name. I am not saying that I
will ask the Father on your behalf.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요 14:13-14).
때문에 오늘날 신앙인의 “도고 기도” 또는 “중보적 기도”는 예수님의 중보사역의 연장인 것입니다. 즉 “중보적 기도”는 몸된 교회를 통한 예수님 사역의 현실적 확장입니다. 이로써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세상을 예수님과 화목시키기도 하고, 사단과 인간 사이에 서서 갈보리 십자가의 승리를 집행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사명은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며 그 고난을 보충하여 온전케 하는 일입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골 1:24).
즉 예수 그리스도가 이미 이루어 놓으신 업적을 다시 나타내는 것이(re-presenting) 우리 신앙인의 사명입니다. 가령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일을 다시 중재하고, 조정하고, 분배하며, 집행하고,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역 가운데 기도의 몫이 바로 “도고 기도”, “중보적 기도”입니다. 때문에 “중보적 기도”는 본질적으로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과 함께 손잡고 이 땅에 하나님의 구속 목적을 실현하는 동반자적 사역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이 “중보적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의 업적을 다시금 재현하시는 복된 삶을 살아 가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중보적(도고) 기도”에는 어떤 원어를 사용할까요?
1. 구약에서는 “파가, paga, ”란 히브리어입니다. 이는 “만나다 meet(11회), 중재하다 intercede(4회)” 등 46회 쓰여졌습니다. 이 용어는 어둠의 세력들을 만나 그들과 맞서고 하나님과 화목토록 중재하는 기도를 의미합니다. 이를 위해 실체적으로 감당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본문 후반 “... 그러나 실상은 그[예수]가 많은 사람의 죄를 지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중보]하였느니라(파가) 하시니라” (사 53:12). For he bore the sin of many, and made intercession for the transgressors.
한글 번역은 “기도”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영어 번역은 “intercession”(중보 또는 중재)입니다. 히브리어로는 물론 “파가”이고요. 그런데 이 “파가”가 바로 앞의 사 53:6에 “담당시키셨도다”란 의미로도 쓰여졌습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파가)” (사 53:6).
이처럼 엄밀한 의미에서 본문의 “파가”는 예수님이 드린 기도(prayer)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work)을 의미합니다. 즉 예수님은 중간에 끼여 죄인된 사람을 사단과 단절시켜 분리시켰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사이에 들어와 죄인된 사람을 하나님과 화목시켜 연합시켰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놀라운 중보를 위해 예수님은 자기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처참히 죽으셨습니다. 죄가 하나도 없으신 분이 가장 흉악한 범죄자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온갖 모욕과 고초를 당하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잠잠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 모두도 어떠한 고생과 희생을 치룰지라도 “파가, 중보적 기도”를 통해 예수님의 구원사역을 재현하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2.신약에서는 “중보적(도고) 기도”에 “엔튜크시스, enteuxis,”란 헬라어를 사용했습니다
딤전 2:1 본문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엔튜크시스)와 감사를 하되”
이는 “만남, 함께 옴, 접근함, 청원”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서 만나는 것을 의미한 “중보적 기도, 도고 intercessions기도”를 말합니다. 신약에서 단 2회 사용된(딤전 2:1; 4:5) 이 용어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청원 기도”입니다. 마치 구약에서 아브라함의 소돔을 위한 기도(창18:16-33)나 모세의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한 기도(민14:10-19)처럼 “누구를 위한 청원”입니다.
이 “엔튜크시스”는 ‘청원하다 (행 25:24), 간구하다 (롬 8:34; 히 7:25), 송사하다 (롬 11:2)’ 등의 의미를 지닌 “엔튕카노, entugchano, ” (5회 사용)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엔튕카노”는 파피루스 문서에 보면 ‘제3자에 대해서 누군가에게 호소하다’ 라는 뜻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롬 8:34과 히 7:25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중보와 관련되어 사용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엔튕카노)” (히 7:25).
우리 모두 다른 사람들을 위한 청원, 즉 “엔튜크시스, 도고 기도”를 통해 이웃을 살리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그렇습니다. 중보적 기도는 사랑하는 부모형제, 가족을 위한 최선의 사랑의 통로입니다. 타인을 위한 도고기도는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최선의 길입니다. 모세는 죄를 지은 백성들의 죽음 대신 차라리 자신이 죽기를 구했습니다 (출 32:31-32).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은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는 제사장들입니다 (시 110:4). 우리는 우리를 중보하여 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제사장들입니다.
우리 모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살리려 하십시다. 특히 불신자들을 긍휼히 여기시길 간구합니다. 곧 전도를 통해 복음을 받아 들여 우리와 같은 신앙인이 될 “예비신자”로 따뜻하게 바라 보시길 기도합니다.
우리 모두 용기를 내십시다. 다윗처럼 우리의 주머니에 구원의 돌을 가득 채워 골리앗을 대적하기 위해 세상으로 달려 나갑시다. 화목케 하는 자가 되십시다. 주님의 용사로서 예수님을 대표하는 자가 되십시다. 예수님의 은택과 승리를 재현케 하는 자가 되십시다. 출산의 수고를 하며 파수꾼의 기도를 행하십시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을 따라 “파가, 중보적 기도로 / 엔튜크시스, 도고 기도”로 이웃을 놀랍게 살리시는 축복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