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5장 31-46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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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복음이 통로가 되게 하라
본문 : 마 25:31-46
무슨 일을 결정함에 있어서 늘 걸림돌이 되는 게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각자의 입장 차이 입니다.
사람들은 각자 다름대로 입장이라는 게 있습니다. 입장을 고수하는 이유들을 보면.. 자신의 위치 입니다.
내 입장좀 이해해 줘라..내 입장좀 봐 줘라…내 입장에선 아무래도 안되겠어.. 내가 지금 얼마나 바쁜데.거기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다. 바쁜 것 좀 지나면 돕든지 할테니까.. 나 좀 나 둬라..온갖 이유들로 어렵다. 힘들다. 나중에 하자.. 힘빠지는 말들만 합니다.
서로 자기 입장만 강조 하다보면 때론 싸움도 일어납니다.
“뭐야 너만 바쁘냐:.. 나도 바빠.. 잘난체 하지 말고.. 조금씩 표현들이 거칠어 집니다. 상대방에게 심한 말도 합니다.
언성도 높아 집니다. 씩씩 거리면서 뛰쳐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심한듯 서로 쳐다 보기도 합니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서 뭐할 건데 비아냥 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물론 상대방들의 입장을 들어보면 딱한 처지에 놓여 있거나,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아하 그랬구나..그런 일이 있었군요..몰라서 미안해..뭔가 연결 고리를 찾기도 합니다 .
다 나름대로 입장들이 있다 보니까..공통 분모를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왜 입장 차이가 자꾸 두드러 질까요 ?
이유는 분명 합니다.
눈, 시선 입니다. 바라보는 시선이 어떠하냐에 따라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어 집니다. 좋게 보는 눈이 있는가 하면 아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뭘 그런데를 도와줘.. 우리가 도와주지 않아도 도움 받는데가 많아..
이런 각자의 입장차이를 줄이는 것이 쉽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입장 차이를 줄일 수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주 힘이 되는 단어가 하나 가 있습니다. 바로 서로 라는 단어 입니다.
서로라는 단어가 성경에 100회 이상 나옵니다. 그 예를 들어 보면 서로 사랑하라.. 서로 도우라 서로 배려하라..
서로 라는 말은 같이 힘을 모으자는 의미 입니다.
서로 희생하자는 의미 입니다. 함께 헌신하자는 의도 입니다. 서로 라는 단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서로의 힘을 발휘하려면 서로 가 될 수 있도록 뭔가 통로가 필요 합니다. 브리지가 필요 합니다.
서로를 아주 든든하게 연결시키는 “통로” 가 바로 “복음” 입니다.
복음이 서로의 입장을 통하게 합니다. 복음은 통로 역할을 하는 겁니다. 통로는 파이프다.. 각자의 입장이라는 것이 통로를 꽉 막고 있습니다.
이것을 뚫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복음 입니다.
복음의 위력은 무엇입니까?복음은 갈라진 입장을 묶는 겁니다.
복음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막혀져 있던 통로를 뚫어 주었습니다.복음으로 무너진 관계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복음은 죄로 인해 갈라진 하나님과 인간을 다시 묶어 주셨습니다
복음은 자기를 잊는 자유를 줍니다. 자기 입장만 고수하던 자가 자신을 뒷전에 둡니다.
복음은 나를 증명하려는 피곤한 경쟁에서 우리를 해방시킴니다.
첫째, 복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 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내가 중심이 아닙니다. 상대방 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입니다.
십자가의 핵심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인간을 향한 자아를 내려 놓음 입니다. 부족한 자에게 나의 것을 내려 놓는 겁니다.
나의 것, 내 상황에 우선순위를 두는 게 아닙니다. 먼저 자기 부인 입니다. 나를 살리고 남을 살리는 게 아닙니다. 내가 먼저 죽고 남을 살리는 게 바로 복음 입니다.
복음의 눈이란 ? 자신의 익숙해진 가치관에 따라 결정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는 눈 입니다. 복음으로 서로 접점을 찾으라 입니다.
복음은 세상고 주변을 제대로 보게 합니다. 복음의 눈은 결코 자신의 의가 앞서지 않습니다. 복음은 자신이 아닌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게 합니다 .
복음의 눈으로 바라 보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나 편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말씀과 십자가의 관점으로 사람과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겁니다.
복음을 아는 사람이 가져야 할 눈은 세상의 눈이 아닙니다. 복음의 눈입니다.
복음으로 바라본 세상
40절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복음의 눈이 바라보는 포인트는 보는 대상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들 입니다.
그런데 복음은 자신을 희생하고 남을 살려낸 희생의 시간 입니다.
별 볼일 없어 보이는 대상이라 할지라도 함부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존귀하게 바라 보는 겁니다.
강도를 만난자에게 다가가는 힘의 근원
복음에 있습니다. 깨진 사람에게 다가가 버팀목이 되라.. 복음의 눈이 희미하면 자기 입장만 고수할 뿐 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을 보라. 자기 입장에서만 해석할 뿐이다.
자기 입장에 머물러 있으면 행함으로 믿음을 보여주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합니다.
복음의 눈을 갖고 살면 나의 입장에 머물지 않습니다. 먼저 상대방을 향한 복음의 손을 내미는 겁니다. 먼저 상대방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다가오신 것처럼 접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선한 사마리아인의 눈에는 자기를 먼저 보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봅니다.
상대방은 평상시에 사마리아인을 무시하던 사람입니다. 상대방이 절박한 상황 속에 처해 있을때에 자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자기 부인을 좋아 합니다.
복음의 파워는 다양한 문화를 연결시켜 주는 고리 입니다.
둘째, 복음 인생은 사해 인생이 아니라 갈릴리 인생으로 만듭니다
사해의 특징은 받기만 하지 나눌줄 모릅니다. 베풀줄 모릅니다. 반대로 갈릴리 인생은 늘 신선한 것을 받아서 남에게 나눠 줍니다.
“받고 주는” 인생을 삽니다. 그래서 바울도 주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해 인생으로서 자기 입장은 다양한 문화에 대한 생각이 갇혀 있다. 하지만 갈릴리 인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복음의 자연스러움을 즐거워 합니다. 늘 신선한
생각과 행동이 주변을 아름답게 합니다.
복음은 갈릴리 인생처럼 주변을 돌아 보는 눈을 즐겁게 합니다. 복음으로 다가감은 불행을 행복으로 만들어 줍니다.
복음이 없는 사해의 눈은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삽니다. 뿌듯함이 없습니다. 얻어도 기쁨은 없습니다.
복음의 눈은 행복을 가져다 줍니다. 갈릴리의 눈은 내가 먼저 받은 은혜를 이웃과 나누는 마음 입니다.
마지막, 자기 입장에만 머물러 있던 눈을 버리고 이 땅 구석 구석을 예수님의 눈으로 바라보라.
42절 입니다. 나만 신경썼지.. 돌아보아야 할 주변은 아예 관심도 없었다는 겁니다.
겉은 양인데 염소처럼 사는 사람들이 자꾸만 많아져만 갑니다.
주님의 반응은 싸늘 합니다.45절 입니다.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복음의 눈으로 필요로 하는 곳을 제대로 보자
하나님이 집중하는 곳이 어디인지를 제대로 보고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과 우리의 시선이 평행을 그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시선이 나의 시선이 되어야 합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 했습니다. 눈이 밝아야 삶이 밝습니다. 눈이 밝아야 인생이 밝습니다.
네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 라고 말씀 합니다. 나쁘면의 의미는 악한 상태, 인색한 상태를 의미 합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라. ..“바라보라” 는 말은 다른 시선들은 다 떼어내라. 이제 우리는 “비천한 것”을 우리 “눈 앞에” 두지 않는 결단이 필요 합니다.
이제 우리 모두 복음의 통로로 쓰임받으면서 삽시다.
우리의 입장만 내세우다가 타이밍을 놓치지 않기를 기대 합니다.
하나님은 늘 지금 행동으로 옮기는 것을 좋아 합니다.
나중에가 아니라 지금 복음을 통로가 삼아 세상에 예수의 가치를 실현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종들이 되시길 축복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