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21장 18-22절 말씀 묵상 [김연희 목사]
작성자 정보
- 복음뉴스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제목 : 응답 받는 믿음의 기도/믿음과 행함의 양 날개를 점검합니다
본문 : 마태복음 21:18-22
18 이른 아침에 성으로 들어오실 때에 시장하신지라
19 길 가에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20 제자들이 보고 이상히 여겨 이르되 무화과나무가 어찌하여 곧 말랐나이까
21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하지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 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하여도 될 것이요
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본문 22절 말씀,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마 21:22)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자주 읊조리는 성경 구절입니다. 믿음이 있는 우리는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이 말씀을 붙들고 기도해 왔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은 우리에게 큰 위로이자, 구원의 하나님을 기대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제 신앙생활을 돌아보면, 예수님의 이 말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는 모습이 지금 우리 신앙의 현주소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믿고 구했지만, 간절히 기도했지만, 응답은 더디고 이루어지지 않은 경험들이 쌓이면서 기도에 대한 확신은 점점 희미해졌습니다. 그 결과 기도는 어느 순간 간절함을 잃었고, 반복되는 습관과 형식으로 채워지면서 영적 무감각 상태로 이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는 몸에 이상 신호가 오거나 병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병원을 찾습니다. 정확한 진단을 받고, 처방을 받아 약을 복용함으로 병을 낫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몸이 의복보다 중하고 목숨이 음식보다 중함을 알기에, 육신에 불편함이 느껴지면 원인을 찾고 낫기를 구합니다. 이와 같이 신앙의 삶에서도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믿기에, 육체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영혼의 건강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요한삼서 1:2)
기도는 영혼의 호흡입니다. 영혼의 호흡인 기도의 열매가 보이지 않는 상태가 지속된다면 신앙은 점점 힘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 호흡이 어려워지면 힘을 쓸 수 없는 것처럼, 응답 없는 기도가 반복될수록 기도는 생명력을 잃고, 결국 외식과 형식만 남게 되는 위험 속에 놓입니다. 그렇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호흡이 끊임없이 되고 있다는 것이고, 그 호흡이 멈추면 사망입니다. 이처럼 겉으로는 신앙의 모습이 남아 있지만 영혼의 호흡이 멈추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신앙이거나 식물인간 상태와 다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멈추어 서야 합니다. 그리고 다시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나의 기도는 어디에서 시작되고 있는가. 내가 붙들고 있는 믿음은 무엇인가.
이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본문이 놓인 배경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맨 먼저 성전에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매매 행위로 가득 차 있는 모습을 보시고 모든 것을 둘러 엎으시며 선언하십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드는도다'(마 21:13). 강한 경고이며 책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침으로 이어지는 장면이 오늘 본문입니다. 예수님은 길가에서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무화과나무를 향해 '이제부터 영원토록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마 21:19)고 저주하셨고, 나무는 곧 말라버렸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기적이 아닙니다. 하나의 상징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과 성전을 가리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열매는 없고 잎만 무성한 무화과 나무는 겉모습은 있으나 실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맺어져야 할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상태, 성전의 상태를 보여줍니다(렘 8:13, 호 9:10). 절기마다 예배하고, 금식하고, 십일조하고, 기도에 열심을 내지만 — 무성한 잎처럼 신앙의 외형은 가득하지만 — 정작 하나님과의 소통이 끊어져 믿음의 열매, 기도의 열매가 없는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예수님은 이 나무를 통해 진단하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 이후에 이어진 종교 지도자들과의 논쟁 속에서 예수님은 그들의 상태를 더욱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 하시고(마 21:31–32), 하나님 나라를 너희에게서 빼앗아 열매 맺는 백성에게 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마 21:43). 즉, 그들의 신앙은 형식은 있었으나 본질은 사라진 상태였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찾았지만 마음은 탐심과 자기 유익, 사람의 영광과 위선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 주어집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기도의 능력을 강조하는 일반적 선언이라기 보다는 열매 없는 신앙을 향한 심판 선언 이후에 주어진, 참된 믿음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는 것은 믿는 자라면 모두 다 아는 진리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의 열매가 없다면 — 그러기에 먼저 우리가 붙들고 있는 믿음을 점검해야 합니다. 그 믿음이 나에게서 난 것인지…아님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내 욕망과 바램으로 기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주께서 이미 계획하신 것을 믿음으로 반응하며 드리는 기도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우선이며 이 분별이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공중의 새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이 새를 창조하실 때, 두 날개를 가지고 공중을 날도록 설계하셨습니다. 사람은 직립보행을 합니다. 두 발로 서고, 걷고, 달립니다. 몸통이 중심 구조이기 때문에 한쪽 팔이 없어도, 한쪽 다리가 약해져도 여전히 걷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새는 다릅니다. 날개는 새에게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목적 그 자체입니다. 두 날개가 균형 있게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떠오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한쪽 날개만으로는 결코 날 수 없습니다.
이 모습을 통해 우리 신앙을 비춰 보았습니다.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내 상황과 형편에 따른 의심을 동시에 붙들고 있다면, 그 모습은 마치 한쪽 날개만 작동하고 다른 한쪽은 움직이지 못하는 새와 같습니다. 그러기에 믿음과 의심이 동시에 있다면 아무리 기도해도 응답이 없는 것은 당연합니다. 날개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날개는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고보서 기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선언합니다.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한다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신앙의 두 날개는 믿음과 행함입니다. 이 두 날개가 균형 있게 함께 작동할 때 비로소 날아오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기도와 응답도 이와 같습니다.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야고보서 2:22–24)
오늘도 하루가 시작됩니다. 어쩌면 수십 년을 지나온 신앙을 점검해 보며, 이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인지 모릅니다.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말씀이 살아있는 실체로 경험되었던 그 자리로, 혹은 아직 그 경험이 없었다면 처음으로 그 자리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성령님을 의지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믿음인지를 점검해 봅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입어 내 안에 불신앙적인 요소들을 버리고 주께 돌이키며, 감사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갑니다. 오직 성령님의 능력 힘입어 기도 후에는 다시 염려와 불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행함이 있는 믿음의 첫 걸음으로 새로워지기를 소망할 뿐입니다. 마침내 믿음과 행함이 함께 일하여, 두 날개로 창공을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처럼,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는 말씀이 우리 삶 안에서 살아 역사할 때,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이 실제로 경험되어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