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누가복음 15장 29-30절 말씀 묵상 [한삼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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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 집(교회) 안에 있는 첫째 아들

본문: 누가복음 15:29∼30, 그러나 그가 대답하여 말했다. “보십시오, 제가 이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위해 종처럼 일해 왔고, 아버지께서 제게 말씀하신 것 가운데 단 한 가지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는 제 친구들과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어린/새끼 염소 한 마리조차 제게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이 아들(this son of yours=당신의 이런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께서는 살진/특별한 송아지를 잡아 주셨습니다!”(NLT의 문자적인 번역)



우리는 흔히 둘째 아들만 탕자라고 생각합니다만, 사실상 첫째 아들도 탕자이기는 마찬가집니다. 둘째 아들은 드러내놓고 노골적으로 막돼먹은 자식이다. 재산분할을 요구해서 현금을 챙겨 아버지와 집안을 떠났을 뿐만 아니라, 가문에 불명예를 안겨준 망나니이다. 후에 자기 몸과 인생을 방탕하게 놀리다가 인생의 바닥(=돼지/짐승보다 못한 사망에 처한 인간, 눅 15:16)에 이르러서야 죄를 깨닫고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되었다.


한편 첫째 아들은 소처럼 집 안에서 꿋꿋하게 일하는 충성스러운 자식 같으나, 내면에서는 쓴 뿌리와 분노가 가득한 탕자였다. 스타일은 다르지만, 두 아들 모두 아버지(θ)의 용서와 긍휼하심을 필요로 하는 죄인이요 방탕아였다. 둘째 아들은 만인의 지탄의 대상으로써 죄와 악을 일삼았다면, 첫째 아들은 쓴 뿌리와 분노를 감추고 살아온 멀쩡하게 보이는 병든 자식이다. 혹자는 두 아들을 이렇게 비유한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교회) 밖에/세상에 있는 탕자라면(=이방인),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교회) 안에 있는 탕자(=유대인)라고 한다. 둘째 아들이 자기의 죄와 악행을 깨닫고 아버지(θ)께 돌아와 큰 은혜를 입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이야기다(=들킨 죄인 이방인의 회심과 어메이징 그레이스, 찬송가 305장과 존 뉴턴의 생애를 회상하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첫째 아들, 즉 아버지의 집(교회) 안에 있는 탕자(유대인과 같은 성도)에 대한 교훈을 결코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유대인과 비슷하게 어쩌면 일찍이 교회 안으로 들어왔지만 ‘석화된 성도’(영적으로 굳어져 변화가 없는 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왔고(I have slaved for you) 아버지께서 시키는 일은 단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나이다(29절 a). 여기서 우리 독자는 첫째 아들이 아들로서가 아니라, 종처럼 아버지를 섬겨왔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원하는 심령이 아니라, 아버지 집에서 비참하게 스스로 종 노릇(종살이)하였던 것이다. 그는 스스로 아들 의식(sonship=아들의 신분)을 가지지 못하였고 종 노릇하였던 것이다. 교회 안에서 스스로 종 노릇하는 대표적인 경우를 마르다와 마리아에게서도 볼 수 있다(눅 10:38∼42). 동생 마리아는 주의 발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들었던 반면,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때 매우 날카로워졌다. 그래서 마르다는 심지어 예수님께 이렇게 말했다. “주여,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녀를 명하사 나를 도와주라 하소서.” 이때 주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유명한 말씀은 이렇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생략)) 혹은 한가지 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셨다. 더 나아가서 첫째 아들의 “단 한 번도 아버지의 뜻을 거절할 적이 없었다”고 하는 말은 ‘자기의’가 가득한 바리새인과 너무나 비슷하다.


⦁그런데 그동안 아버지는 제가 친구들과 잔치를 벌일 수 있도록 “어린/새끼 염소(작은 거)”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었나이다(29절 b). 아들로서 자원하는 심령과 삶이 되지 못하자, 점점 더 종살이는 무거워졌고 훗날을 기대하는 특별대우와 기대감은 쓴 뿌리와 분노로 변해갔다. 이윽고 동생이 받은 큰 것(“살찐/특별한 송아지”)과 자신은 작은 것 그 하나도 받지 못하였다고 불공평에 대한 쓴 뿌리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분노가 폭발합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 이 아들(this son of yours=당신의 이런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말씀은 아버지의 집(교회) 안에 있는 우리(유대인 같은, 교회 안의 석화된 성도)를 대변합니다. 그와 그들을 위한 말씀이 아니라, 나와 우리를 위한 말씀입니다. 바라고 소망하기는 변화되기를 멈추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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