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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24장 25절 말씀 묵상 [이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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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55)-떼는 떼대로 간다


행24:25 “바울이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니 벨릭스가 두려워하여 대답하되 지금은 가라 내가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 하고“


요즘에도 그런 말을 쓰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적에 자주 듣고 쓰던 순수한 우리 말 가운데 ‘떼는 떼대로 간다’는 표현이 있습니다. 잘못한 사람은 마침내 하늘의 벌을 받게된다는 뜻입니다. ‘공의’의 개념입니다.


양심을 속이고 뒤에 숨어 있다가 나중에 슬쩍 다시 나타나 활보하는 ’얌체‘ 같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이 알아서 벌을 내리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떼는 떼대로‘ 간다는 ’불편한 진실‘입니다.


바울은 지금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설교하고 있습니다. ’불편한 진실’의 말씀입니다. 벨릭스가 계속 듣기가 거북하고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중단시키고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고 합니다.


바울의 설교는 정의가 죽어가는 순간에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共謀)라는 무서운 진실을 상기시킨 것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약4:17)는 말씀을 풀어서 설명한 것입니다.


오래 전 퀸즈의 한 주택가에서 일어난 사건이 이를 연상시킵니다. 키티 제노비스라는 젊은 여성이 새벽 3시경, 자신의 아파트 앞에서 괴한의 칼에 찔렸습니다. 그녀는 비명을 질렀습니다.


“오, 하나님! 저 사람이 저를 찔렀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아파트 몇몇 집의 불이 켜지고, 창문으로 사람들이 내다보았습니다. 한 남자가 ’Leave her alone(그 여자 내버려 둬)’하고 소리치자, 범인이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아무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고, 아무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범인이 다시 돌아와 그녀를 또 칼로 찔렀습니다. 키티는 계속해서 비명을 지르며 도망치려했습니다.


범인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가 세 번째 공격을 가했습니다. 이 끔찍한 살인은 30분이 넘게 이어졌습니다. 나중에 경찰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소 38명의 이웃이 그 비명 소리를 듣거나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나서기 싫다’는 이유로, ‘다른 누군가 신고하겠지’라는 생각으로, 그저 침묵하고 방관했습니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라 공모’라는 불편한 진실을 뉴욕시민들에게 알려준 사건이었습니다.


키티의 비명을 외면한 38명의 이웃은 그녀의 영혼을 죽였습니다. 도울 수 있었으면서 돕지 않은 것, 그것이 바로 소극적인 형태의 가장 잔인한 살인이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빌라도와 로마 군인들 그리고 유대의 율법주의자들 뿐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대신 바라바를 풀어달라 외쳤던 군중들은 예수님을 ‘살릴’ 기회가 있었지만 악에 동조했습니다.


두려워 도망쳤던 제자들도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침묵했던 것입니다. 공범자입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예수를 죽인 흉악한 ‘죄인 중 괴수’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공의’와 ‘장차 오는 심판’에 대해 말씀한 것입니다. 이것이 벨릭스가 듣고 두려워한 ‘불편한 진실’입니다. ‘떼는 떼대로 간다’는 진실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사랑과 정의의 문제 앞에서 중간 지대는 없습니다. 적극적으로 살리려 하지 않는 자는, 소극적으로 죽이는 일에 동참하는 자입니다. 우리 신앙은 결코 ‘방관자의 종교’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크고 작은 불의 앞에서, ‘나는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선택해야 합니다. 무엇이 ‘선’인지 알면서도 아무 것도 하지 않기로 작정하는 모든 것도 ‘죄’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죄입니다. 불쌍한 이웃을 돕는 것, 복음을 전하는 것이 선인 줄 알면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하지 못하는 것— 죄입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선을 행하는 것을 방해할까?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이 클수록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은 우울함만 남깁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는 것을 바울은 ‘절제’라고 합니다.


절제가 진정 기쁨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한 가지씩이라도 세상 것에 대한 집착을 끊어가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참 기쁨은 세상 기쁨을 끊어갈 때 옵니다. 세상 기쁨을 하나 끊을 때마다 천국의 기쁨이 하나 더 채워집니다.


이번 주간은 감사주간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바로 대강절이 시작되어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이하는 크리스마스 시즌입니다. 우리 주변을 바라봅시다.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가 찾아보십시다.


그리고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의 불편한 진실을 가슴에 새깁시다. 오늘 무엇을 할 것인가가 마음 가운데 다가오지 않으십니까? 그것을 주저없이 하십시오. 그것이 ‘오늘 복음’ (Here and Now!)입니다


오 주여

선을 알면서 행하지 않는

죄를 범하지 않게 하소서

오늘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하소서

이 아침의 기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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