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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3장 1-3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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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말씀: 빌3:1-3

제   목: 이렇게 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레파라.(빌3:3)

For we are the circumcision, which worship God in the spirit, and rejoice in Christ Jesus, and have no confidence in the flesh.(Phil 3:3)



* 부족한 종이 9월 6일부터 26일까지 교단총회와 부흥성회 인도 차 고국을 방문합니다. 

   한국에서는 (010-4289-2207)를 사용합니다.*


이 세상 모든 만물은 나름대로 사는 방법이 있습니다.


새는 날며 살고, 짐승은 땅에서 삽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살고, 나무는 흙에다 뿌리를 내리고 삽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살도록 만들어 졌습니까? 


땅을 밟고 살지만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희랍사람들은 인간을 안드로포스라고 했습니다. 


이는 위를 바라보며 사는 존재라는 뜻입니다. 


위를 바라본다는 말은 하나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볼 때, 지혜가 떠오르고, 영혼이 맑아지고 마음에 평화가 임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참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만물 중에 인간이 뛰어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며 영적인 교통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공중에 나는 새와 땅에 기는 것과 물속에 있는 것과 씨 맺는 열매까지 만물을 다스리고 정복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권이요 지혜입니다. 


우리는 이 축복을 누리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은혜요,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다보면 믿음 안에 살면서도, 때 아닌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도 있고 실패를 만나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만날 때도 있습니다. 


신앙생활 잘한다고 고난이 없는 것 아니고, 잘되는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인생의 순간적 과정만 보면, 이해할 수 없고 낙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생의 성공과 실패는 과정에선 모르고 결과까지 봐야 압니다.


저는 성경의 인물 중에 요셉을 좋아합니다. 


요셉의 과정을 보면 파란만장(波瀾萬丈) 합니다. 


아버지께 특별한 사랑받는 것 때문에, 시기한 형제들이 애굽에 팔아버렸습니다. 


애굽으로 팔려가서도 의롭게 살려고, 유혹을 뿌리친 것이 오히려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2년이란 긴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내야 했습니다. 


요셉의 이런 과정만 본다면 절망할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이해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때때로 믿음대로 바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오히려 요셉처럼 시련을 만나고, 고난이 닥쳐오고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이럴 때 낙심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세요. 


끝까지 인내하면서 하나님을 바라보세요. 


하나님의 뜻(작정)을 찾아보세요.


반드시 하나님의 숨은 손길이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 라고 합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와 같이 하나님이 요셉을 애굽의 총리로 세우려고 지름길을 만드는 과정이었습니다. 


이런 과정이 아니었으면 당시 세계를 통치하던 애굽나라에 어떻게 총리가 되겠습니까? 


하나님만 아시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섭리적으로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성공도 실패도 아닙니다. 


끝까지 가 봐야 압니다. 


혹시 고난이 있다고 원망하거나 낙심하지 마세요. 


원망과 불평은 어떤 이유로든 마귀에게 속는 것입니다. 


마귀는 어떻게든지 원망과 불평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과 삶을 파괴하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가 사는 방법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1. 주 안에서 기뻐하며 살라 하십니다.


나의 형제들아 주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1절)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근심과 낙심하며, 원망하며 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항상 기쁨으로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살전5:17) 


기쁨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기쁨의 조건이 있다면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365일 늘 맑고 청명한 날씨만 계속 될 수 없듯이, 인생살이에도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고, 잘되는 일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업이 부도가 날 때도 있고, 갑자기 질병이 찾아오기도 하고, 경기가 풀리지 않고, 직장을 잃고 시험에 떨어져 있는데 어떻게 기뻐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환경에 처할 때 절망과 낙심에 빠지기 쉽습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처한 환경이 그렇습니다. 


전혀 기뻐할 만한 환경이 아닙니다. 


본문은 사도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모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기뻐 할 수 있겠습니까? 


‘주 안에서’ 란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환경이나 조건에서 얻은 기쁨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얻은 기쁨입니다.


1)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는 기쁨입니다.


성경에는 이런 고난과 역경의 환경 속에서도 감사를 고백하고 기쁨을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안에서 환경을 극복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욥은 동방의 의인이요. 부요하던 욥에게 뜻밖에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욥1:13-22)


갈대아 사람들이 쳐들어 와서 약대를 약탈해 갔고, 집이 무너져 자녀를 잃었고, 온몸에는 종기가 나서 기왓장으로 긁고 있을 때, 부인마저 당신이 믿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며 욥을 버리고 떠나버렸습니다. 


욥의 친구들조차도 위로 하러 왔다가 너무 처참한 욥을 보고 한마디 위로의 말도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이런 상황에 원망과 절망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욥은 이 상황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적신으로 나왔사 온즉, 적신으로 돌아간다 할지라도 주신자도 하나님이시고, 취하신자도 하나님이라고 하며,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한다고 했습니다.(욥1:21)


욥은 모든 생사화복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믿기에 감사 할 수 없는 환경에서 감사를 고백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욥에게 훗날 잃은 것의 두 배를 축복하셨습니다.

(욥42:10)


기뻐할 수 없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감사하는 마음이 쉬운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 안에서’ 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주님 밖으로 나가면 환경이 지배합니다. 


주님 밖에서는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주님 밖에는 보호가 없습니다. 


너무 세상이 쉽게 변합니다. 


아침에 웃음이 저녁에는 슬픔이 되기도 하고, 희망이 한순간 절망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주안에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처럼 주님 안에서 살 때 환경과 조건을 뛰어넘어서,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기쁨이 우리를 지배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인 기쁨입니다.


이것이 주안에서 얻은 기쁨입니다. 


주님이 선장이 되시기 때문에 두려움이 없는 기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같은 말을 쓰는 것이 수고롭지 않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선장이 되시면 배가 뒤집히든지 풍랑을 만나든지 염려 할 것이 없습니다. 


주님과 공동 운명체이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주무실 때 풍랑을 만났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깨우면서 우리가 죽게 됐다고 할 때, 바람을 잠잠케 하신 후 어찌 두려워하느냐고 꾸짖었습니다.(막4:35-41


주님이 이 배에 있는데, 왜! 두려워하느냐는 것입니다.


18세기 영국을 변화시킨 존 웨슬레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선교사 파송을 받았습니다. 


미국 조지아 주에서 2년 동안 열심히 사역을 하였지만, 특별한 열매 없이 실패하고 돌아오는 길에 설상가상으로 풍랑을 만났습니다. 


웨슬레는 불안과 두려움에 떨면서 구명대를 찾고 있는데, 선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찬양을 부르고 있었습니다.


지금 배가 뒤집어 지고 있었습니다. 


빨리 살길을 찾으라고 외쳤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모라비안 그리스도인들은 ‘젊은이 우린 염려 없다오. 하나님이 지켜 주고 있다오, 그리고 천국의 소망이 있습니다. 


‘젊은이도 예수 믿으세요.’... 


고국 영국에 돌아온 웨슬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는 목사이며 선교사인데 저들처럼 천국의 소망이 없지 않는가! 마음에 평안이 없지 않은가! 그 후 방황을 하다가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회심을 하고 그곳에서 성령의 불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그를 괴롭히던 늑막염도 치료가 되었습니다.


존 웨슬레 한 사람을 통해 영국을 새롭게 변화시키는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는 모라비안 형제들의 영성을 친구로부터 듣고 기도와 말씀에 전념했고, 그가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소망 안에서 큰 기쁨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기쁨은 이런 은혜를 경험한데서 얻은 기쁨입니다. 


이것은 하늘위에서 내려오는 기쁨입니다.


은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습니다. 


순교자 열전이란 책을 보면, 예수를 끝까지 믿겠다고 하면, 칼로 목을 쳐 죽이는 박해시대가 있었습니다. 


목이 잘린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피를 다 쏟은 하얀 얼굴에서 미소를 잃지 않고 목이 떨어져 죽어 있더랍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 하겠습니까? 


스데반도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그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다고 했습니다. (행6:8-15)


이것은 환경에서 얻은 평안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내적인 평안이요, 참 평안입니다. 


신앙은 이런 평안을 소유하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 안에서 이런 기쁨으로 사시길 축복합니다.

  

2. 또 하나, 악한 것들은 삼가하며 살라 하십니다.


개들을 삼가고, 행악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2절)


‘삼가 하라’ 는 말은 원문에 ‘경계하라. 주의하라’ 는 뜻입니다. 


본문에는 세 가지를 삼가 하라고 했습니다.


1) 개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개들은 당시 유대 사회에서의 인식은 매우 부정적입니다. 


부정한 것들, 세속적인 가치관을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개들로 표현한 것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1) 비양심적인 것을 개들로 표현했습니다.(마15:21-28)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 양심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찾아가는 나침반과 같습니다. 


마치, 양심과 믿음은 새의 양 날개와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양심을 버리면 믿음도 파선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양심을 버린 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2) 탐욕을 개들로 표현했습니다. (눅12:13-21)


자기 욕심만 채우려는 이기적인 삶입니다. 


자기 욕망과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기적인 자들입니다. 


이런 자들 때문에 우리 사회가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3) 음란을 개들로 표현했습니다. (마7:6)


계22:15에 개들을 삼가고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사회가 개들의 문화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세상이 음란문화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도, 사상도, 마음도, 가정도, 음란 문화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건강한 사회, 건강한 문화, 건강한 교육을 위해서는 개들과 같은 비양심적이고, 탐욕과, 음란과 더러움을 삼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비결입니다.


2) 행악자들을 삼가라.


행악 자들이란 ‘악한 일꾼’ 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불신자가 아니라, 신앙이 잘못된 자들입니다. 


바울은 이들을, 하나님의 일군이 아니라, 악한 일꾼이 라고 했습니다. 


분쟁을 일으키고 원망과 불평으로 하나님의 일을 방해 하는 자들이 있으니, 이런 자들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살면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사람’ 입니다. 


외진데서 사람을 만나면 반가우면서도 가장 두려운 존재가 사람이랍니다. 


우리는 사람을 떠나 살수 없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너무 믿어도 안 되고 불신해도 안 됩니다.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국제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사람입니다. 


특히 바울은 행악 자들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이간시키는 자들, 원망 불평하는 자들, 거짓을 행하는 자들을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전염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염병이 돌 때는 그곳을 피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여러분이 만나고 있는 이웃이나, 친구나 성도나 주변을 살펴보세요. 


만나면 신앙에 유익을 주십니까? 아니면 신앙을 병들게 합니까? 


삼가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성도의 지혜요 사는 방법입니다.


3. 또 하나, 항상 성령으로 충만하여 살라하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3절) 

  

본문에 두 가지 모습이 나옵니다.


1) 성도는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봉사한다는 말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서 자원하는 마음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지난번 목회자 세미나에 암에 걸려서 거의 말기에 이르는 집사님이 몸이 매우 쇠약한데도 불구하고, 나와서 봉사를 기쁘게 하면서 섬기는 것을 보고, 담임 목사님께서 그 분의 이야기를 하면서 목이 매여서 말을 못하고 우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의 고백이 저의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 모르나, 할 수 있는데 까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목사님을 섬기다가 천국에 가고 싶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같이 기도 해드리면서 함께 울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하는 봉사입니다. 


가슴에서 우러나와서, 마음이 뜨거워서, 전도하고 심방하고 주의 일에 봉사하는 성도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예수자랑입니다.


2) 성도는 예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3절)


두 가지 자랑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체적인 자랑이요. 또 하나는 영적인 자랑입니다. 


자랑거리가 많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문을 자랑하고 명예를 자랑하고 자식을 자랑합니다. 


우리 집도 아버지가 생존해 계실 때는, 명절 때가 되면 족보를 펼쳐놓고, 족보 중에 몇 대조 할아버지가 이런 벼슬을 한 사람이라고 자랑을 하십니다. 


좋은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자랑하고 가문을 자랑 할 수 있다는 것은 다 좋은 일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자랑해야 합니까? 


바울은 자랑할 만한 육체적인 조건이 굉장하게 많았습니다. 


당시 가말리아 문화생의 지식과 바리새인으로서의 최고 종교지도자였습니다, 


로마의 시민권자로 지식과 권력과 명예까지 다 갗춘 사람입니다. 


그러나 변화 받은 이후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이나 자랑거리를 오히려 배설물처럼 여긴다고 했습니다.(빌3:8)


바울은 오직 그리스도를 자랑했고, 구원 받은 은혜를 자랑했고,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갈6:4) 


그렇습니다. 이것이 진정 은혜 받은 자의 모습입니다. 


성도의 자랑은 차원이 다릅니다. 


주님을 자랑합니다. 


구원 받은 은혜를 자랑합니다. 


믿음의 가정을 자랑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고 있습니까? 


성도는 세상 사람들과 사는 방법이 다릅니다. 


삶의 가치관이 다르고 세계관이 다르고, 추구하는 목표가 다릅니다. 


기쁨의 출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어둠과 절망을 털어버리고 주안에서 기쁨을 회복하세요. 


또한 행악 자들을 조심하세요. 


그리고 성령으로 봉사하며 예수님을 자랑하세요.


목자 장 되시는 주님이 나타나실 때 풍성한 은혜로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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