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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까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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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희건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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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어 가면서 과거의 일이 선명하게 생각난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나는 대한민국 저 남쪽 항구 도시에서 살았다. 6. 25동란 때, 아버지가 공산 정부에 부역을 한 연고로 전쟁이 끝나고 당국의 눈을 피해 서울 집을 떠나 저 남쪽으로 피난을 가야 했다.
그때 방 한 칸을 내어 준 분이 바로 오까 할머니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오까 할머니라 불렀다. 아버지는 긴 도피 생활을 해야 했고, 거기서 할머니, 엄마, 그리고 큰 누나를 비롯해서 형제 자매 다섯, 모두 일곱 식구가 살아야 했다. 할머니는 한복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밤 늦은 시간, 통금 소리를 들을 때까지 재봉틍을 돌리며 손주들을 돌보셨다.
그 시절 내 머리에 남아 있는 분이 오까 할머니이시다. 이 할머니는 한국 역사에 나오는 김우진씨의 미망인이었다. 김우진씨는 일제 시대 와세다 대학 영문학과에서 공부했다. 거기서 성악가 윤심덕씨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모양이다. 그에게는 오까 할머니와 한 아들이 있었다.
"사의 찬가"로 유명한 평양의 윤심덕과 남쪽의 부자 집 아들 김우진씨는 동경 유학을 마치고 배를 타고 현해탄을 건너 오다가 둘이 현해탄 바다에 뛰어 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까 할머니는 그런 불행을 몸에 안고 사는 분이셨지만, 눈이 서글서글 컸던 할머니는 항상 그의 얼굴이 밝았고, 미음 자 대궐 집에 가난한 사람들이 무료로 살도록 배려 하셨다. 그때 그 집에는 주인 댁 말고 모두 여덞 가구가 살았다.
오까 할머니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다. 그 영향으로 나의 친 할머니도 성당에 다니신 것 같다. 성당은 바로 이 대궐집 옆에 지어진 것으로, 할머니는 주일이면 성당에 출석하여 미사를 보곤 하셨다. 나도 따라가서 어떻게 미사를 보는지 어려서 부터 눈으로 배웠다.
오까 할머니의 아들은 미국 유학을 다녀 오셨고, 나중 서울 문리대 언어학과 교수로 지내셨다. 김방한 교수님이시다. 교수님은 문리대 시절 혹, ROTC에 가입할까 해서 추천서를 써 달랐더니 선뜻 써주셨다. 또 한분은 영문과 은사 백낙청교수의 추천서를 받았다. 그러나 고생을 피해 장교의 길을 가는 것이 편치 않아서 졸업 후 사병으로 입대했다.
김방한 교수님에게는 인동, 우동, 예동, 세 아들이 있었고 둘째 아들이 나와 동갑이었다. 오까 할머니는 덕스럽게 생기신 분으로, 가난한 이웃들에게 항상 선심을 베푸셨다. 그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 월세나 전세를 받지 않으셨다. 내 기억에 그 할머니는 항상 밝은 얼굴로 출입하셨다. 오까 할머니를 만나는 것은 즐거움이었다. 그 여덟 세대는 서로 친척처럼 친근하게 지냈다. 서로의 삶의 모습이 모두에게 알려졌다.
중학교 2학년 때, 생일날이 됬는데도 먹을 것이 없어 빈속으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옆집에 사는 인자 누나의 어머니가 불러 갔더니, 수북히 쌀밥을 차려 놓고 먹으라 하셨다. 어떻게 밥을 굶고 있던 것을 알았을까? 그리고 하시는 말씀: "오늘 네 생일이지?" 나는 어려서부터 무엇을 요구하는 것 없이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왔다.그래도 그때 나는 전교 1등을 하고 있었다.
오까 할머니는 나중에 그 집을 천주교에 기증하였다. 그래서 그 집에 살던 여러 세대의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야 했다. 그때 또 방을 내어 준 분이 행남사 사장의 주인 할머니였다. 오까 할머니의 시동생 김철진씨가 살던 큰 집은 지금도 수녀원으로 사용되고 있다. 천주교는 미음 자 큰 집을 다 허물어 버리고 큰 마당으로 만들었다. 후일 그곳이 그리워 찾아갔더니 그 큰 집은 형체도 없고 창고와 텅빈 마당만 남았다. 크고 널었던 김우진씨의 집이 역사 속에서 사라진 것이다. 평생 베풀며 살았던 오까 할머니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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