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관목사

아무 자리면 어떻습니까?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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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관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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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모임이든 제일 먼저 부딪히는 문제는 ‘자리’입니다. 나는 어디에 앉아야 할지 생각하며 모임 장소에 들어섭니다. 심지어 새로운 교회에 들어갈 때 이 고민은 더 현실이 됩니다. 전에 아는 분이 뉴욕에 처음 와서 어느 교회에서 겪은 일입니다. 이분은 어릴 적 브라질로 이민 갔다가 성인이 된 뒤 뉴욕으로 다시 이민 오셨습니다. 신앙이 돈독한 분이라 도착하자마자 다닐 교회를 찾았지요. 그런데 처음 방문한 교회에서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을 겪었습니다. 예배당이 낯설어 어디에 앉아야 할지 망설이다가 적당한 자리에 앉았는데, 잠시 후 누군가가 등을 툭툭 두드리더랍니다. 알고 보니 그 자리를 오래 앉아 온 교인이었고, “내 자리이니 비켜 달라”는 요구였습니다. 당황스러웠지만 “어디에나 이런 분이 있지” 하고 다른 자리로 옮겼다고 합니다. 어느 교회에서든 벌어질 수 있는 풍경이지요.


     로마 제국 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교회에 자신의 특별한 자리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서 ‘황제의 자리’(solidum)를 만들어 지위를 과시했습니다. 중세에도 세속 권력을 등에 업은 귀족과 영주들이 교회 안에 중요한 의자를 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노약자·병약자, 그리고 사제가 피곤할 때 잠시 기대는 간이 의자를 빼면 교회에서 의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긴 미사에 지친 성직자들이 접이식 간이 나무 의자를 가져다 잠깐씩 쉬는게 전부였습니다. 중세 교회에서 일반 회중은 좌석 없이 서서 미사에 참여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다만 노인과 병약자를 위해 벽면에 살짝 돌출된 건물부분을 잠시 걸터앉을 수 있게 했을 뿐, 의자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죄인이 하나님의 집에 와서 육체적으로도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며 경건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교회 좌석이 보편화된 것은 종교개혁 이후입니다. 긴 설교시간에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등받이가 있는 긴 나무의자, 곧 ‘퓨(pew)’가 그때부터 교회에 자리 잡았습니다. 초기의 퓨는 건물과 일체화된 닫힌 형태의 고정 좌석이었고, 그 폐쇄성은 세상의 불평등을 교회 안으로 들여온 결과이기도 했습니다. 폐쇄된 고정 좌석은 특정한 계층의 사람들만 사용하는 전유물 되었고, 부자와 가난한 자를 구분하는 차별의 표식이 된 것이지요. 1594년 유럽의 한 나라에서는 40년 동안 특정 좌석을 사용해 온 교인에게 교회가 의자 값을 지불하라고 요구했고, 그는 이를 거부하며 소송을 제기해 승소한 기록이 있습니다. 종교개혁 말기부터 19세기 초까지 교회 좌석을 둘러싼 분쟁은 교회와 세속 권력의 갈등을 재현하곤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교회에 들어서면 의자가 기본이라고 생각합니다. 세련된 원목 무늬의 퓨가 단정히 배열된 예배당이 떠오르지요. 어떤 교회는 편안함을 위해 쿠션을 두고, 극장 못지않게 안락한 좌석을 들여놓기도 합니다. 저는 예배용 긴 의자, 곧 퓨를 좋아합니다. 교회는 특정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누구나 들어와 앉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퓨는 지위 고하를 떠나 함께 앉아, 함께 찬양하며, 같은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는 출발점입니다. 개별 좌석은 개인의 공간을 배려하지만, 퓨는 여러 사람이 함께 앉는 긴 의자이기에 다소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용하는 퓨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드리는 공동체 예배’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가르칩니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고전 12:12). 교회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임을 퓨를 통해 물리적으로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4장에는 ‘혼인잔치의 자리배치’가 나옵니다. 높은 자리에 먼저 앉았다가 더 높은 사람이 오면 상석을 내주고 말석으로 쫓겨가야하는 난감한 장면이죠. 자리를 정하는 이는 하객이 아니라 주인입니다. 잔치의 주인이 누가 높은지, 누가 어디에 앉을지를 판별합니다. 그러니 자리 욕심 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목적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느냐가 아니라 ‘혼인잔치’에 참여하는 것 자체입니다. 주어진 자리에서 초대받은 기쁨과 감사로 잔치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초청받은 자의 도리입니다. 자격없는 우리를 천국 혼인잔치에 초대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며 오늘을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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