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준희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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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이란 무엇인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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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준희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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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은총의 논쟁

신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성경은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토대로 공부하게 된다. 그런데 신학을 지식적 관점에서 보면 도무지 성경말씀이 절대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기록된 성경말씀을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 이유를 지난 글에 잘 설명해 놓았었다.(이성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것만 납득이 가능하기 때문에 하나님말씀과 이성은 대치된다)

 

우리 이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권위를 말씀 자체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 말씀이 인간의 이성을 초월하는 기적이 있어야 이성이 굴복을 하게 되어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보통 안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라는 것이다. 그때 이 증명을 말씀의 내용으로 아무리 설명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뭘로 해야 받아들일까 바로 이성을 초월한 기적이 동반되어야 하나님이 살아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내 주먹을 믿어라말한 사람에게 주먹이 마비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의 이성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굴복되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성은 이성을 뛰어 넘는 기적이 동반될 때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 말씀의 권위를 초월적인 것에 두어야 인간이 기독교를 받아들일까? 사실 많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초월적 능력을 더 기대하고 있지 않은가, 성경 말씀에 의도된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대해서는 그렇게 큰 관심이 적다는 데 문제가 있지 않나 보여진다.

 

물론 기독교는 초월적이다. 자연적인 것을 배제하고 거의 초월적인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일을 하신다는 것이다, 마리아를 통해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 귀신을 좆아내고, 죽은 자를 살리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는 가하면, 풍랑을 잔잔하게도 하신다, 그리고 3일만에 부활하시는 모든 것이 다 인간의 이성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초월적인 것들이다.

 

성경을 초월적인 역사하심에 그 권위를 둔다면 자연적인 방법으로 일하시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나님말씀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더욱이 자연적인 이 세상 원리는 사실 많이 타락되어 있다. 정상적인 하나님말씀에 의해 인간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타락과 부패한 죄의 소용돌이에서 이 세상은 움직여 나가지 않은가, 그런 부패한 타락의 자연을 하나님께서 통치한다고 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 아니라 악도 조장하는 분으로 밖에 뭐라 설명해야 옳은 것일까,


이 세상과 자연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고 다스리고 계신다면 하나님은 악한 것에도 원인이 되시고 문제도 일으키시는 분이라는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게 되다보니 하나님을 하나님말씀으로 권위를 두려면 반드시 자연적인 방법이 아닌 초월적인 기적이 동반되어야 권위가 인정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자연과 초자연은 대립관계가 될 수밖에 없고 자연적인 것에 하나님의 역사하심보다 초자연적인이고 기적적인 역사하심에 기독교의 권위를 둘 수밖에 없는 것이 된 것이다.

 

이런 초월적인 신학에 토대를 둔 종교가 로마 카톨릭이다. 로마 카톨릭은 타락한 자연으로부터 도피해야 한다. 그 도피처가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부여한 최고의 초월성을 지닌 곳이기에 교회 안에 들어와야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내려진다는 것이다, 교회의 절대 권위, 교회 조직의 절대화, 교황 무오설이 다 교회만이 천상적인 은혜를 수여하는 초월적인 곳이기 때문이다. 이에 신부는 그 은혜를 시여해 주는 분이고 죄를 용서해 주시는 분이다, 초월적인 분이다. 교회 밖, 세상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 그래서 신부는 자연적인 결혼도 금지한다. 언제나 신부는 초월성을 가진다.

 

과연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자연 속에는 없는가,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신학이 일반적 개신교 신학이다. 예를 들어 믿는 신자가 교통사고가 나서 허리를 크게 다쳤다고 해보자. 일반적으로 사고의 원인은 졸음운전이었다. 그것이 자연적인 원인분석이다, 그런데 초월적인 신앙에 근거를 둔 신자들은 남모를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것이다. 라고 여긴다. 그러기에 먼저 회개해야 한다, 그리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우리에게 이런 하나님의 징계라는 것에 더 초점을 둘 확률이 높다. 왜 그런가, 죄값을 받는다는 사상이 더 많기 때문이다. 인과응보의 불교적 문화가 우리 삶에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자연적인 사고(思考)가 아니라 초월적인 사고이다.

 

자연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것은 죄를 범하면 죄값으로 처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사건에 결과를 통해 아프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게 하는데 자연적인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친구 집에서 놀다 큰 유리를 깨뜨렸다. 아버지가 그 유리 값을 지불해 주고 난 후 두들겨 맞았다. 며칠 후, 친구가 우리 집에 놀러 와서 똑같이 유리를 깼다. 유리를 깨뜨린 친구에게는 한마디도 안하고 보냈다. 이 애가 생각하기를 왜 친구가 깨뜨릴 때에는 아무소리 안하더니 내가 깨뜨렸다고 두들겨 패는가, 이게 죄값으로 때린 게 아니라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경종이고 네가 한 짓이 무엇인지를 깨달으라고 징계를 하는 것 아닌가.

 

자연 속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말은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져도 그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 있다는 말이다. 그 사고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이제부터는 사고당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힘이 되어주는 은혜받은 자로 살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연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교회에서만 은혜가 있고 기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상 속에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초월적이신 분이시지만 자연 속에 들어오셔서 인간의 처절함을 체험하시고 인간의 한계를 아시기에 기적같은 은혜로 자연 속에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적이신 분이다. 어쩌면 우리는 초자연적인 은혜를 간구하고 그 기적같은 은혜를 자연 속에서 누리고 사는 자라는 것으로 정의하고 싶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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