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유혹, 어떻게 이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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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관호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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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유혹, 어떻게 이길 것인가?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린도전서 10:13)
영화 쉰들러의 리스트, ‘오스카 쉰들러’로 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
제가 1991년도 8월 미국으로 유학차 이민 와서 최초로 미국영화관에 간 것은 이민 온 후, 약 2년 정도가 지난 1993년도 여름(7월)으로 기억됩니다. 저희 가정이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었을 때, 저와 아이들의 방학을 맞아 식구들이 함께 보러 갔던 영화가 다름 아닌 ‘쉰들러의 리스트’라는 영화였습니다. 그 영화는 유대계 미국인으로서 영화감독의 거장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감독한 영화로 그 당시 미국 최대의 흥행을 이룬 영화였습니다. ‘오스카 쉰들러’ 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자신의 사재를 다 털어서 거기다 자기 목숨도 아끼지 않고 약 1200명의 폴란드계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시대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살(홀로코스트)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자리에는 늘 그의 이름이 끼어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2차 세계대전 후에 살았던 삶이 어떠했는지 여러분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전쟁 중 그토록 휴매니즘에 입각한 고귀한 마음을 가지고 수많은 생명을 구했던 그는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들과 놀아나는 술주정뱅이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갖고 있던 나머지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해 버리고 다른 사람을 의지해 목숨을 연명해 가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해준 사람들이 의치(치아)를 모아 만들어준 금반지마저 전당포에 저당 잡히기까지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어떻게 고귀한 일을 했던 사람이 이렇게까지 타락할 수 있습니까? 그에 대한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한 본성(육신)이 인간을 그렇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 ‘오스카 쉰들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누구나 그런 끔직하고 비극적인 죄악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죄의 부패, 더러운 타락은 세상 사람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닙니다. 기독교인이나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도 그와 같은 세상에서의 유혹을 받아 죄로 인한 부패, 타락한 모습을 보일 수 있습니다.
다윗과 베드로의 범죄
우리는 구약성경에 나타난 수없이 많은 인물들 가운데서 다윗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입어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이 되었던 자입니다. 그는 양치기 목동 시절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맷돌로 쳐 죽인 이스라엘을 신정정치의 표본으로 알려진 하나님의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와 언약을 맺으시고, 그 이후 다윗 왕가로부터 메시아가 출현할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고, 영성(spirituality)이 아주 탁월했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타락된 본성(육신)을 지니고 있었던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습니다. 그는 전쟁 중이었으나 왕궁에 머물러 있다가 옥상 위에서 저 건너편 목욕하고 있던 한 여인 우리야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보고 그녀를 궁으로 끌어 들어와 그녀와 잠자리를 하는 간음죄를 저질렀습니다. 또 그것을 은폐하려다 오히려 그의 충직한 부하인 밧세바의 남편 우리야 장군을 최전방 최전선에 고의로 내보내 죽게 만드는 살인죄까지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 삶의 현장에서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단순한 happening이 아닙니다. 인간은 그 누구나 그런 죄악을 저지를 만한 악한 본성이 남아 있음을 보여줍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말입니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또 다른 예로 사도 베드로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고기 낚는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12제자(사도)들 중 하나였지만, 예수님은 특별히 그를 수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오라 하실 때 물 위를 걸었던 그런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뿐입니까? 그는 마태복음 16:16에서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기고 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그러던 그가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그 새벽에 닭 울기 전 주님을 3번씩이나 부인하는 엄청난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일이 아닌 우리 자신의 일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닙니다. 물론 그 일 자체가 다른 사람이 저지른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은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저지를 수 있는, 우리도 똑같은 실수와 범죄를 저지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생생한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과 실례를 통해서 우리 스스로 거기에 예외가 아님을 심각하게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들도 그랬으니, 그들도 그렇게 범죄했으니 우리도 그렇게 한들, 그렇게 된들 어쩌랴!’ 그렇게 생각할 것이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그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그와 같이 범죄와 타락에 떨어지지 않도록 각별하게 조심해야겠다는 각성을 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2에 나타나는 사도 바울의 교훈을 다시금 새겨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죄의 비참한 결과와 그 심각성
죄란 이토록 무서운 것입니다. 죄란 무시무시한 비참한 결과를 안겨 줍니다. 그것이 불신자이건 신자이건 상관없이 말입니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 가운데 ‘시험’, ‘시험에 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에도 자주 등장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 시험(test)이란 말은 2가지 의미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째는 시련(trial)이란 뜻으로 우리가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역경, 고난, 고통을 말합니다. 경제적으로, 가정적으로, 육체적으로 겪는 고통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련을 당하거나 겪을 때도 이 시험을 이겨나가고 극복해 나가도록 큰 믿음을 갖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최선을 다해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이 시험이란 말은 더 자주 죄로 인한 유혹(temptation)과 관련해서 사용할 떄가 많습니다. 주기도문 가운데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Lead us not into temptation, but deliver us from evil.)에서 시험은 시련이라는 의미보다는 분명 죄로 인한 유혹을 가리킵니다.
또한 약 1:13-14에서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서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절에서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여기 시험 역시 유혹, 곧 죄로 인한 유혹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의 시험은 유혹이란 뜻
고린도 전서 10:13에서 시험도 이런 유혹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죄와 관련된 시험, 곧 유혹(혹은 시련)이 다가올 때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다시 한번 우리는 그 누구도 이런 범죄, 유혹에서 예외가 없음을 다시금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3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했습니다. 여기 사람이 감당할 시험이란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있을 만한 보편적인 시험이란 뜻입니다. 우리 스스로 겪는 시험, 유혹은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그 누구에게나 보편적인) 인간적인 것입니다. 누구나 다 겪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그의 공생애 사역 동안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물론 죄는 없으시지만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시험과 유혹을 당할 때 이것은 ‘나에게만’ 주어지는 혹독한 시험이나 유혹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유혹은 청소년에게만 오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 장년, 심지어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다 찾아옵니다. 아니 죽기 바로 직전까지 찾아옵니다. 남자뿐만 아니라 여자에게도, 부자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에게도, 무식한 자뿐만 아니라 식자층에게도 찾아옵니다. 더 나아가 불신자뿐만 아니라 신자에게도 찾아옵니다
시험(유혹)보다 크신 하나님
이 시험과 관련해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은 시험(유혹)보다 더 크신 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일입니다. 고린도전서 10;13을 다시 보십시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faithful, 신실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내서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힘을 줍니까?
하나님은 미쁘십니다. 하나님은 믿을 만한, 신실하신 분입니다.(God is faithful.)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겪는 시험, 유혹에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그대로 이루어 주시는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시험을 당하지만, 우리가 겪는 그 시험을 능히 감당하게 하십니다. 또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은 허락조차 아니 하십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또 다른 사실 하나는 무엇입니까? 신실하신 하나님께서는 피할 길(the way to escape)을 내어 주시는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 피할 길이란, 적진에 포위되어 옴짝달싹하지 못할 때에 유일한 탈출구를 내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포위망에서의 탈출- 얼마나 스릴(thrill)있는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구원병을 보내시고, 보급로를 열어 주시고 무기와 양식을 공급하시면서 우리에게 탈출구를 열어 주십니다. 우리로 시험에 맞서 싸울 수 있도록 감당하게 하시며, 어떻게 해서든지 빠져나올 구멍을 허락하십니다.
유혹의 출처, 육신과 세상과 마귀
그렇다면 이 죄로 인한 유혹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입니까? 이런 유혹은 3가지 방법으로부터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육신(육체, flesh)이요, 둘째는 세상(world, this age)이요, 세째는 마귀(devil, Satan)입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공생애 초기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에서 시험하는 자 마귀에게 받은 3가지 시험과 일치합니다. (마태복음 4장)
예수님은 40일 금식하신 후 마귀로부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마귀로부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높은 산으로 데려가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면서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름아닌 육신적, 세상적, 마귀적인 시험(유혹)입니다.
육신적으부터 오는 죄의 유혹은 무엇이 있습니까? 성적인 방종, 방탕, 도박, 쾌락, 게으름 등을 들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호기심에서 시작한 담배가 골초를 만들 수 있고, 친구 따라 한 두잔 하던 술이 술고래나 알코올 중독자로 만들 수 있습니다. 심심풀이로 손댄 화투나 카드와 slot machine이 도박꾼이 되게 할 수도 있습니다. 흥미 삼아 댄 마약이 헤어나올 수 없는 마약 중독자가 되게 할 수 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죄에 걸려 그 인생을 파탄에 떨어뜨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은 무엇이 있습니까? 물론 여기서 세상이란 하나님께서 지으신 창조세계를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세상이란 세상적인 가치관과 불신세계가 끊임없이 추구해 나가는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권력, 돈, 명예가 될 수 있고, 그에 따른 교만, 자만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세속적입니다.
마귀로부터 오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이는 영적인 시험입니다. 마땅히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해야 하는데, 이를 가로막고 교묘하게 치고 들어오는, 때에 따라서 직격탄을 날려오는 각종 영적 유혹입니다. 성경을 못 읽게 하고, 기도하게 하지 못하게 하고, 성도 사이의 연합과 교제를 분열시키고, 영적으로 큰 혼란과 고통을 주는 일 등입니다.
유혹을 이길 수 있는 방법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도록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또한 함께 하는 말씀의 동역자들을 허락하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주셔서 그런 모든 시험/시련을 이기게 하십니다. 이 3가지 유혹을 우리는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
우선 육신으로부터 오는 유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 죄악의 현장과 그 죄에서 피하고 떠나야 그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성적인 유혹을 받을 때에는, 이런 유혹은 청소년이나 청년뿐 아니라 그 누구라도 받을 수 있는데, 밧세바를 궁전으로 끌어들인 다윗을 본받을 것이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요셉을 본받아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후서 2:22에서 이렇게 교훈했습니다.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
체중과다로 인해서 어떻게 하든지 체중조절을 하겠다는 사람은 운동을 해야 되겠지만 식사량을 대폭 줄일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할 수만 있으면 먹는 식탁의 현장에서 멀어져 있어야 합니다. ‘나는 이 식욕을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지 말고 끝까지 그 문제와 싸워나가야 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T.V. 리모콘이나, 스마트폰이나 또는 Internet Game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요즘처럼 Internet 정보 홍수 속에 사는 자들은 꼭 필요한 부분, 가장 유익한 부분만 선별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세상으로부터 오는 유혹은 세상적인 가치관을 기독교적인 가치관, 성경적인 가치관으로 바꾸도록 꾸준하게, 계속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사실 가치관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생긴 것도 아니고 하루아침에 바꿀 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매우 점진적으로, 계속해서 변화시켜 나가야 할 것입니다. 교육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롬 12:2에서 “너희는 이 세대(이 세상의 가치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mind, 지성, 정신)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권력, 돈, 명예 등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삶의 목표와 가치관을 비판해 나가면서, 끊임없이 늘 우리의 정신과 사고(생각)와 사상을 기독교적으로, 성경적으로 무장하고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마귀(사탄)으로 오는 유혹은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함으로 이겨나가야 합니다. 야고보서 4:7의 말씀을 살펴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여기 우선순위가 나타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복종하는 일이고, 그 다음이 마귀를 대적하는 일입니다.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란 한자성어를 만일 여기에 적용할 수 있다면 우리 편이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먼저 알고, 또한 우리의 영적인 적인 악한 사탄을 알고 사탄을 대적하면 이 영적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약하고 마귀는 강합니다. 마귀와 죄의 유혹은 강하나 하나님은 더욱 강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면서 마귀를 대적하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승리하라
이 말씀을 삶에 적용하면 우리는 죄의 유혹과 마귀의 시험(유혹)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시119:9,11)
누구나 시험, 곧 죄로 인한 유혹을 받습니다. 사람에 따라 그 사람의 상황에 따라 그런 유혹에 더 잘 넘어가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누구나 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유혹을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죄의 유혹을 이겨나가고, 예수님을 닮아 더욱 거룩해지고 사랑이 넘치는 자가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죄로 인한 유혹으로부터 승리하여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기쁨과 즐거움을 맛보고 체험해나가는 분들이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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