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관호목사
f5ccc9c37edb05711ce73b529e61094c_1674518434_13.jpg
 
 

용서, 어떻게 할 것인가?

작성자 정보

  • 정관호 목사 작성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태복음 18:21-35)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용서할 수 있다.


오늘의 주제는 용서(forgiveness)입니다. 이 용서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마음의 상처와 관련된 것이지만, 또한 어떻게 하면 이 마음의 상처를 해결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이 용서만큼 어려운 것도 없습니다. 물론 그 역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용서도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들을 진정으로 용서하고 우리 스스로 그 미움과 원한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미 체험한 자들이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잘못과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우리는 마태복음 18:21-35에 나오는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 주님께서 베드로의 질문에 대답하시면서 말씀하신 비유입니다. 베드로는 주님께 이렇게 묻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베드로는 용서의 필요성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용서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7번 정도라면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말로 용서에대한 제한을 두지만 그 정도라면 충분할 것이라는 자신감 있는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이 용서에 대해 가르치기를 두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라. 세 번째 잘못하면 가차 없이 용서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후 180년경 유명한 랍비 요세벤 유다는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어라. 그러나 네 번째도 잘못하면 가차 없이 용서하지 말아라고 가르쳤습니다.

 

우리 주님의 용서에 대한 교훈


그러나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고 가르쳤습니다. 이는 490번까지만 용서하라는 말씀이 아니라, 무제한의 용서(unlimited forgiveness)를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그 끝이 없어야 합니다. 이 용서하는 일을 한 번, 두 번, 세 번 세는 것은 용서다운 용서가 아닙니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습니다. “한 번만 더 내게 못된 짓을 하면 그때에는 그만두지 않겠다라는 것은 이미 용서한 것이 아니라 보복을 미리 준비해둔 일과 같습니다.

 

이 비유의 핵심적인 교훈은 무엇입니까? 35절에 나와 있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from your heart)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결론은 이렇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빚진 자,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주되 진심으로(중심으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용서를 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 스스로 받은 영혼의 상처


사실 우리 모두 거의 예외가 없을 정도로 지난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영혼의 상처 때문에 고통을 당했었고, 또 지금도 여전히 고통을 당하며 살고 있습니다, 깊이 박힌 가시처럼, 빼내려고 할수록 더욱 깊이 박혀 들어가는 가시처럼 우리는 고통을 안고 삽니다. 그런데 이 가시 박힌 상처는 하나둘이 아닙니다. 크고 작은 상처가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이 상처를 치유하지 못한 채, 치유 받지 못한 채 그렇게 살아갑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은 모욕과 상처로, 우리 마음은 미움과 분노, 원한과 쓰라림, 적개심과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때로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할 가족 식구들부터 받은 마음의 아픔과 상처가 있습니디. 어려서 받은 상처, 청소년기에 받은 상처, 어머니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 남편이나 아내로부터 받은 상처 등이 있습니다. 무관심과 냉대, 거친 말, 물리적인 폭력 등으로 당한 상처가 참으로 많습니다. 또 친구나 이웃이나 연인으로부터 받은 배신 등 쓰라린 상처도 있습니다. 아마 가장 아픈 상처 가운데 하나는 함께 다니던 교회 교인이나 교회 동료로부터 받은 상처일 것입니다. 여기에는 목사나 장로, 권사나 집사, 찬양대원 등이 가해자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그런 일을 겪으면 더이상 교회 다니지도 않고 교회 생활 자체를 그만두는 경우도 생깁니다.

 

용서를 받을 줄도 알고 용서를 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이 모든 쓰라린 일들로부터 피해자는 용서를 하고, 가해자는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피해자로서 가해자를 용서하지 못한 일로 받은 상처는 결국 쓴 뿌리로 남아 평생 고통을 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물론 가해자가 자신의 잘못이나 악행을 스스로 인정하고 사과를 하면 당연히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 가해자가 자신이 저지를 잘못이나 피해를 입힌 일을 인정하지도 않고 용서를 구하지 않고 뻔뻔스럽게(?) 행할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지라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해자가 찾아와서 사과하고 용서를 구할 그때에 가서 용서하리라는 생각을 접고 미리 하나님 앞에서 그에 대한 용서를 해야 합니다. 그 이후의 일은 하나님께 맡겨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마음에 평안과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죄인들을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가해자에 대한 보복이나 복수는 우리 스스로 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그 처분을 맡겨놓아야 합니다.

 

아픔과 피해를 자를 용서하는 일은 가능한가? 어떻게?


그렇다면 정말 우리에게 엄청난 마음의 상처와 물리적인 손상을 준 자를 과연 우리는 용서할 수 있습니까? 용서할 수 있다면 어떻게, 또 어떤 과정을 통해 용서할 수 있을까요? 우선 우리는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피해를 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고 용서할 수 있음을 믿고 알아야 합니다.

 

첫째, 우리가 받은 상처를 회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일은 있었던 행위나 사실을 묻어둔다거나 무시해버린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사건이나 진실을, 그리고 자신이 받았던 상처니 아픔 등을 꺼내놓아야 합니다. 끄집어내어 회상해내야 합니다. 이 회상하는 일(recall the hurt)이 우선 필요합니다. 물론 아픈 상처를 끄집어내어 회상하다보면 또 다른 아픔과 상처가 재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회상단계는 용서를 위한 전단계로서 반드시 필요합니다.

 

둘째, 가해자에 대한 이해와 공감이 있어야 합니다.

이해와 공감하는 일은 가해자가 자신에게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유나 배경을 긍정적으로 살펴보는 일입니다. 피해자는 자신이 겪은 아픔과 고통을 넘어 가해자에 대한 긍휼과 공감대를 형성하여 사랑의 단계로 넘어가야 합니다. 가해자에게 가졌던 부정적인 정서를 긍정적인 정서로 바꾸어가야 합니다. 상대방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상황, 상대방의 성격과 성장배경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용서라는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가게 됩니다.

 

셋째, 용서를 선언하고 지속적으로 용서해야 합니다.

가해자 역시 죄와 사탄의 희생물이었음을 알고, 하나님께서 나와 같은 죄인도 용서하셨는데 그 역시 용서받을 수 있는 죄인이기에 나와 관계된 일에 내가 먼저 용서하는 일이 필요함을 드러내야 합니다. 이 용서하는 일이 우선 자신에게 필요한 일이며, 이 용서한 일을 가해자와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릴 수 있으면 알려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그 용서를 계속 지켜나가야 합니다. 물론 용서했다고 해서 있었던 사실이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과 기억이 남아 있어서 괴로움을 겪게 된다면, 오히려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생각을 더 많이 해서 그런 기억들이 점차 없어지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때에 따라서 이와 같은 용서는 단번에 이루어지기도 하지만(결단적 용서), 대부분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집니다.(점진적 용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용서 체험이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게 한다.

 

용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는 그 누구라도, 그 어떤 경우라도 용서할 수 있으며, 그 용서는 마음과 진심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함을 받은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죄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용서받지 못할 죄악을 다 용서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진노와 형벌로부터 용서받은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일상적인 삶 가운데서도 우리가 저지른 죄와 실수에 대해서 부모나 교사나 친구로부터 용서를 받은 경험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와 실수를 용서할 수 있고, 또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우리는 더욱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과 용서를 깊이 체험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는 일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태복음 6:14-15)

 

우리 스스로 저 사람 만큼은 정말 용서할 수 없다는 사람마저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하심을 통해 용서함으로, 우리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용서를 통해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참된 자유와 해방과 기쁨을 누리게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전체 8 / 1 페이지
번호
제 목
이름

8b418fa90f9f2f95e82f4fab17f43c42_1677894975_7876.jpg

최신글 모음


새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