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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고 복된 가정(남편과 아내), 어떻게 이룰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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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관호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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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내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실을 봄이라 3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5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7 남편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그를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1~7) 

 

소크라테스와 그의 아내 악처 크산티페 일화


소크라테스(Socrates)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역사상 나타난 철학자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 크산티페는 세계에서 가장 악처(악한 아내)들 중의 한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하루는 소크라테스의 친구가 그의 집에 방문하는 중이었습니다. 어떤 일인가는 모르나 화가 머리끝까지 난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악을 쓰면서 남편인 소크라테스에게 소리 지르다가 나중에는 그것도 성에 안 찼는지, 물이 가득 찬 물통을 가져다 소크라테스의 머리 위에 쏟아부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그 일을 옆에서 황당하게 지켜보고 있던 친구에게 천둥이 친 다음에는 소나기가 내리는 법이지. 그렇지 않나? 그렇지만 소나기 뒤에는 곧 갤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말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 소크라테스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양처(좋은 아내)를 얻으면 행복자가 되고, 악처를 얻으면 철학자가 된다.” 크산티페라는 악처를 얻어 살던 철학자 중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다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 결혼하여 가정을 갖고 있는 남편 된 자들이여, 여러분은 행복자입니까? 아니면 철학자입니까? 그것도 아니면 행복자와 철학자 사이를 늘 왔다 갔다 합니까?

 

물론 오늘의 제 글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룬 남편과 아내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지 않은 청년들도 머지않아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룰 것이기 때문에 결혼한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은 자들 모두 오늘의 말씀을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 주변에 가정적인 여러 가지 문제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자들에게 올바른 성경적인 교훈을 알려 주어야 할 때도 많이 있으므로 오늘의 말씀은 여러모로 유익하리라 믿습니다.

 

그리스도인 아내들에게 주는 교훈


사도 베드로는 오늘의 본문 베드로전서 3:1에서 먼저 그리스도 된 아내들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하지 않은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실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


여기 이와 같이란 이미 앞에서 가르친 복종의 원리를 따라라는 뜻입니다. 국민이 위정자에게 복종하듯, 사환이 주인에게 복종하듯 그렇게 복종하라는 뜻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 주님께서 성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묵묵히 걸어가신 고난의 발자취를 본받아 그렇게 하라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기독교 가정사역을 하는 송길원 목사님의 칼럼을 읽다 보니 아주 일리가 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 과거에는 유교 사상과 효사상을 중심으로 부모 중심의 가정을 형성하였는데, 이제 지금은 자녀 중심의 초현대적인 가정을 이루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모 중심의 가정을 이루고 있을 시절에는 고부 갈등이 심화되었지만, 자녀 중심의 가정이 되었을 때는 기러기 아빠가 양산되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성경적이면서도 바람직한 가정은 부부 중심, 곧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한 가정이라고 하였습니다.

 

가정은 부모 중심도, 자녀 중심도 아닌 부부 중심


그렇습니다. 가정은 부모 중심도, 자녀 중심도 아닙니다. 가정은 부부 중심입니다. 부부관계가 그 핵심입니다. 정말 행복하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려면 부부관계부터 정상화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보면 먼저 부부관계를 다루고 다음에 가서야 비로소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룹니다. 우리가 자녀라면 자녀로서 부모에 대한 책임을 성실하게 다해야 하고, 또 부모라면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책임을 다 감당해야 하지만, 부부 - 곧 배우자 - 에 대한 마땅한 책임을 부모나 자녀에 대한 헌신으로 바꾸어 버려서는 안 됩니다. 부부관계의 불행을 자녀에게 다 쏟아서 거기서 또 다른 행복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미 결혼한 자기 자녀를 모든 부모는 결혼한 자녀에게 사랑과 배려를 하되 그들 가정이 이미 부모를 떠난 독립적인 가정임을 인정하고 간섭하거나 통제(control)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그런 부모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므로 앞으로 결혼할 자녀를 둔 부모라면 처음부터 결혼한 그들이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그야말로 인격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놓아 주어야 합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2:24).


자녀로 하여금 결혼해서도 마마보이, 마마걸이 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두고 있는 부모들 - 특히 엄마들 - 은 자기 자신이 이루지 못한 것을 자녀를 통해 이루려고 자녀를 압박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를 하나님의 선물이며 독립적인 인격을 가진 자로 알아 최선을 다해 자녀를 양육하되, 자녀에게 자기 자신의 인생 전부를 걸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자녀가 결혼하면 그들은 독립적인 가정을 이루는 것이기에, 자기 배우자와 자녀 중심의 가정을 이루어 가도록 하면 됩니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자신의 인생을 걸면 나중에 크게 후회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편이 해주지 못하는 만족, 위로를 자녀를 통해서 얻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려면 그 시간에 남편과의 관계 회복에 더욱더 큰 관심과 정성과 시간을 쏟아야 합니다.


아무리 뭐래도 성경적인 가정의 핵심은 부모도, 자녀도 아닌 부부이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를 잘 가다듬고, 세워가고, 아름다운 관계를 형성할 때 비로소 복된 가정을 이룰 수 있고, 더 나아가 부모와 자녀에 대해서도 올바르면서도 균형 있게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나 다른 종교를 가진 남편을 둔 아내


특히 불신자를 남편으로 두었을 때와 신앙이 깊지 않은 남편을 두었을 때 아내는 더욱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고, 신앙인이 되었다. 하나님을 창조주요, 구속주로 믿는 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구주로 믿는 자가 되었다. 나에게 거치는 그 무엇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주장하면서 남편에게 불복종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로마 제국 당시 아내는 남편의 종교를 따르게 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남편은 한 가정의 모든 주도권을 가지고 가정 식구들과 그에 딸린 종들에게 권세를 행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신자였던 아내가 신자가 되었다고 해서 그것 자체로 남편을 맘대로 좌지우지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 일로 가정에서 더 큰 어려움을 당할 입장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한 가정에서 종교가 서로 다를 때 그 가정이 평안하기를 기대하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불교를 따르고 있는 시부모를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 며느리가 겪는 고통은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니 특정 종교를 갖고 있지 않은 가문에 시집가는 일로 겪는 고통도 크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당사자인 불신자와 결혼하는 일은 참으로 커다란 인생의 짐을 떠안고 들어가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6:14에 있는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는 말씀을 인용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아직 결혼하지 않은 상태라면 신자와만 결혼할 것을 마음에 굳게 다짐해야 합니다. 그러나 부부 둘 다 불신자인 상태에서 아내가 먼저 신자가 되었다든지, 이미 신자인 상태에서 불신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성경적인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신자의 행할 본분을 보여야 합니다.

 

결혼한 후에 신자가 된 아내는?


바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경우가 그러한 경우입니다. 이미 결혼한 기혼 상태에서 아내가 먼저 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그 아내는 불신자인 남편에게 말로만 설득하려고 하지 말고, 행동으로 그것도 정결한 행동으로, 한마디로 을 통해서 그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해야 할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통해서 믿지 않는 남편과 결혼했을 때 겪어야만 하는 숱한 어려움들을 지켜보며 성장했습니다. 새벽 기도회를 빠짐없이 참석하기를 원했던 저희 어머니께서 제가 간난 아기였을 때 저를 둘러업고서 새벽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면, 그 추운 겨울날 아버지께서 어머니가 새벽 기도회에 가신 것을 알고는 대문을 꽉 잠가 놓고 문을 열어 주지 않아 애꿎은 저(?)만 고통당한 적이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와 불신자의 갈등은 거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신자는 불신자와 사고방식, 가치관, 시간 사용, 행동, 삶의 양식등 모든 일에서 나타나는 근본적인 차이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믿는 아내가 믿지 아니하는 남편 때문에 당하는 육체적, 정신적, 영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러나 그런 경우라도 그리스도인 된 아내는 불신자인 남편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도할 의무와 책임, 더 나아가 특권이 있습니다. 또 그 일만이 그 가정에 가져다줄 행복과 기쁨을 보장합니다. 그렇다면 그 남편의 영혼을 위해, 남편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남편에게 순종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또 정결한 행위를 가져야 합니다. 권위주의적인 남편을 만나 이렇게 산다는 것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신자에게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일을 명령하실 때 그것을 따를 수 있는 능력과 힘과 자원도 주셨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 보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는 평생토록 안 믿는 남편 파트리키우스에게 미덕을 보여 마침내 남편을 주님에게로 인도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그녀의 주인으로 섬겼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하나님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힘쓰셨습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삶(행동)으로 설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저의 어머니로 하여금 남편에게 존경과 친절을 베풀게 하심으로써 저의 어머니를 치장하셨습니다.” 최고의 현모로 알려진 모니카는 최고의 양처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아내의 화장법


사도 베드로는 벧전 3:3~4에서 그리스도인 아내가 어떻게 화장할 것인가 하는 그리스도인의 화장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너희 단장(화장, cosmetics, adornment)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quiet) 심령(spirit)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이 구절들을 단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겉 화장에 집착하지 말고, 속 화장에 집중하라는 말입니다.


저는 여자들이 화장하는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화장하는 일이 옳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모든 여성이 요즈음 말로 자연산’ ‘자연 그대로’ ‘산소 같은 여자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에게는 죄 때문에 생긴 어쩔 수 없는 여러 가지 나쁜 모습들을 갖고 있습니다. 외모가 아주 잘 생긴 남자나 여자라도 자세히 뜯어보면 어느 구석인가 흠 잡힐 만한 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죄가 세상에 들어온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할 수 있다면, 고칠 수 있다면, 가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일은 아주 정당한 일입니다. 오히려 너무 초라하게, 볼품없이 꾸밈이 없이 아무렇게나 지내는 일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낮추어 보게 만드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여성은 화장을 하십시오. 자신을 아름답게 꾸미십시오.


그러나 (여기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너무 지나친, 너무 사치스러운 화장을 하지 마십시오. 심지어 성적인 범죄까지 유발 또는 유도할 수 있는 그런 유혹적인 화장은 하지 마십시오. 사도 베드로가 가르치는 내용이 그것입니다. “머리를 꾸미고이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머리를 높이던, 그래서 거기에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금을 차고이는 금, 은 보석으로 자신을 치장하고 감싸야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체면을 유지해 나가고 매력적인 여자로 보이도록 만들려던 모습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는무조건 비싼 옷, 화려한 옷, 값나가는 옷, 명품으로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여인들의 모습을 비판한 것입니다.


오히려 이보다는 속 화장에 힘쓰십시오. 속 화장은 무엇을 말합니까? “너희 단장(화장)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4) 인격에, 마음에, 속 사람을 화장하라는 말씀입니다. 얼굴보다는 마음입니다. 얼굴보다는 마음에 더 신경을 쓰십시오. 외모보다는 인격에 더 마음을 쓰십시오.


마음이 부드럽고 겸손하고 온유해지도록 힘쓰십시오. 마음이 늘 안정되어 있어서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에 있게 하십시오. 여기 온유하고 안정한 마음은 타고 태어날 때부터 갖는 선천적인 성격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을 성령의 다스림, 성령의 충만 아래 둘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겉 화장은 사람의 관심을 끌고 사람에게 값진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속 화장은 하나님의 관심을 끌고 하나님에게 값진 것입니다. 남성에게 있어서 외모가 아름다운 여성을 보는 것은 한때의 기쁨과 쾌락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잘 다져진 온유하고 조용한 인격적인 여성을 보는 것은 오랫동안 즐거움과 깊은 감동을 줍니다. 미스코리아나 미스유니버스를 꿈꾸느니(꿈꾼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니지만) 오히려 하나님이 보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 앞에 값진 인격적인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멋진 여성 모델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


이를 위해서 사도 베드로는 한 여성을 모델(model)로 들어 예시하고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입니다. 5, 6절을 보십시오.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종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lord, master)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예를 들어 남편인 공포 분위기 조성 또는 구박하거나 못살게 구는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her, 사라의) 딸이 되었느니라.”


지금도 남편을 (主人)’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라가 남편인 아브라함을 로 여겨 섬겼던 것처럼, 그런 원리 가운데 순종하면서 살라는 뜻입니다. 남편을 우습게 보지 마십시오. 남편에게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 남편이 부족한 것이 많아도 남편을 남편으로서 받들어 순종하십시오. 남편을 주(, lord, prince)로 모시면, 아내 자신은 자동적으로 여주(女主, princess)가 됩니다. 남편을 왕(, king)으로 모시면 아내는 여왕(queen)이 됩니다.


한국에서 지구촌교회를 목회하는 이동원 목사님이 쓴 어느 책을 보았더니 이런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불신자 남편이 술에 만취되어 밤 12시 넘어 밤늦게 들어 왔을 때 아내는 남편에게 아휴, 지긋지긋해, 또 처먹고 왔군.” 이렇게 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폐하, 지금 오십니까? 건강에도 좋지 않은 술을 드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심하셨습니까?”


여러분, 아브라함의 아내인 사라를 본받으십시오. 그리스도인으로 아내는 선을 행하고, 어떠한 두려운 일(남편이 공포심 조장하는 일, 폭언하는 일, 심지어 폭행하는 일) 등에도 놀라지 말아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 그의(her), 사라의 딸이 되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우리나라 말에는 부전자전(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말이 있지만, 영어에는 Like Mother, Like Daughter라는 말이 있다고 합니다. 그 어머니의 그 딸입니다. 이 말을 오늘 본문에 적용하면 그리스도인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선행을 하면 사라의 딸(후예)이 된다는 말입니다. 사라가 받은 모든 영적 축복을 함께 누리는 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내들이여, 여러분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거룩한 아내, 선을 행하되 어떤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않는 아내가 되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스도인 남편들에게 주는 교훈


이제는 남편 된 자들에게 주는 사도 베드로의 권면, 교훈, 명령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기에 나타난 남편은 불신자 남편이 아니라 신자인 그리스도인 남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인 남편만이 7절에 나타난 말씀을 실행에 옮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 아내에게 해야 할 의무와 책임은 무엇입니까? 7절 서두에는 1절 서두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란 말이 들어 있습니다. ‘이와 같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순종의 모범을 보인 예수 그리스도처럼이란 말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해서 남편은 그 권세를 마음대로 휘둘러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피차 복종하는 자세로 남편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해주어야 할 2가지 일


베드로는 오늘 본문에서 남편은 아내에게 2가지를 해주어야 할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는 일입니다.


지식을 따라 아내와 동거하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참으로 사려 깊게 생활하라는 말입니다. 자칫하면 남편은 자기 마음대로 아내나 자녀를 다룰 수가 있습니다. 권위주의적으로, 즉흥적으로, 감정적으로, 기분이 내키는 대로 무책임하게 그렇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아내가 바라고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며 배려할 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아내의 생일을 기억합니까? 결혼기념일을 기억합니까? 그 날을 우리 남편들은 소홀히 여기기 쉽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그날들을 아주 소중히 여깁니다. 저 같은 경우 아내의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을 절대 잊어먹지 않습니다. 아니 잊어먹으려도 잊어먹지 못합니다. 그날이 되기 적어도 3주전부터 제 아내가 미리 그 날을 일러 주고 또 지적해 주어서 잊지를 못합니다. “126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요?” “43일이 무슨 날인지 알지요?” 그러니 잊을 리가 있습니까? 요즈음은 발렌타인데이까지 찾아 먹으려 합니다.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난 200943일은 결혼21주년(은혼식)을 맞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제가 난생 처음 (결혼 처음) 꽃가게 가서 장미꽃 화환을 마련해서 아내에게 주었다는 것 아닙니까? (꽃집 들어가서 주문하기가 얼마나 어색하던지요!) 남편은 아내의 취미, 성격, 소원을 잘 헤아려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시간을 내서 아내와 대화하십시오. 대화가 싸움이나 다툼이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 필요하면 식구들과 함께 외식도 해보십시오. 가끔(?) 허그도 해주고, 설거지도 해주십시오.


마이클 벤틀리(Michael Bentley)라는 목사님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남편은 자기 아내보다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을 더 기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남편은 아내와 많은 시간을 가지려고 해야 합니다. 또한 가정생활보다 직장이나 사업을 더 중요시해서도 안 됩니다. 친구들과 즐겁게 보내는 일을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보내는 일보다 더 즐거워해서는 안 됩니다. 취미 생활이나 사회활동이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져서는 안 됩니다.”

 

둘째, 아내를 귀히 여기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로 알아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아내는 남편보다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이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남편보다 나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가 더 연약한 그릇이란, 아내가 남편보다 육체적으로 약하고 또 감정적으로 상처를 받기 쉬운 존재임을 보여줍니다. NIV 성경은 연약한 그릇을 연약한 파트너(partner, 동반자)란 말로 번역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내는 남편과 함께 이 생명의 은혜를 함께 나눌 동반자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는 이생의 동반자일 뿐 아니라 영원한 동반자입니다. 생명의 은혜를 함께 이어받을 자입니다. 영원한 동반자, 영원한 파트너, 영원한 삶을 함께 누릴 파트너, 남편에게 있어 아내는 얼마나 귀한 존재입니까!


남편 된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아내를 귀하게 여기십니까? 아내를 존중합니까? 아내를 존경합니까? 모든 남성, 그리스도인 남편들이여, 아내를 사려 깊게 배려하여 돕고 사랑하며 또한 존경하며 귀히 여기도록 하십시오. 이렇게 해야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해나갈 수 있습니다. 아니 이 일이 바로 올바른 신앙생활입니다. 이렇게 하는 자라야 기도생활을 올바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습니다. 아내와 다투면 기도의 문이 막힙니다. 아내와 다투는 일을 하나님이 싫어하시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생활, 특히 기도 생활을 원활히 하기 위해서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에베소서 5:25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우리 주님께서는 교회(하나님의 백성들)를 사랑하실 때, 자신을 주심으로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그렇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정말로 목숨을 내놓기까지 하면서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큰 것을 내놓을 결심이 서 있다면, 작은 일, 사소한 일들에서도 그렇게 사랑하고 배려해야 합니다.

 

아내와 남편, 남편과 아내!


특히 아내 된 자는 남편에게 교회가 교회의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해야 하듯 그렇게 순종하며, 남편 된 자는 아내를 사랑하되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드려 십자가의 사랑을 교회에 나타내신 것처럼 사랑하며, 앞으로 결혼을 앞둔 모든 청년들도 이런 교훈을 따라 기도하면서 결혼을 준비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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