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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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기는 자와 대답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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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석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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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6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 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들어가며]

 

우리는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요한복음의 주제에 집중해 왔다. 사복음서는 모두 우리 주님의 이야기이지만 중심주제는 각기 다르다. 복음서마다 성령의 인도를 받아 복되신 주님의 삶과 일에 특별히 강조하는 측면이 다 다르다. 이 중에서 요한복음의 중대한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이다. 2021절에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한다. 116절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선물의 제안이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모든 일을 하셨고, 다시 살아나셨고 승천하셔서 영원한 영광 가운데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그 아들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바로 그의 충만한 데서받으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의 실제적인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단지 선한 삶을 산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아들에 관한 몇 가지 사실을 믿는다는 뜻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일종의 죽은 정통 신앙이 될 수 있다. 참 기독교는 아들에게서 생명을 받되, “더 풍성히(10:10) 받는 것, 곧 그 안에 있는 충만함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실질적인 주제이며, 신약성경 전체의 주제이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함으로 이 주제를 완벽하게 전달하고 있다. 머리에서 모든 것이 나오고, 머리에 충만함이 있으며, 머리가 신경의 중추이다. 머리로부터 몸의 모든 지체와 부분과 영역과 기관이 생명을 받고 존재하며 유지된다. 우리는 이런 관점에 비추어서 우리는 지금 자신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우리 자신의 생각은 무엇인가? 다른 이들에게 보여주는 기독교는 어떤 것인가? 우리는 지치고 피곤한 세상, 겨우 지탱하는 세상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다. 세상에 생명이 있다면 그토록 쾌락에 의존하여 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극제에 기대어 살아가는 이들마다 스스로 활력이 없음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은 생명이 없기 때문에 자극제에 기대어 살아가고 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생명인데, 그 생명의 유일한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다. 이제 우리가 던질 중대한 질문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나는 그 생명을 받고 있는가? 또 그 충만함을 받았는가? 점점 더 많이 받고 있는가?

 

[우리로 충만하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무엇인가?]

 

지금 교회는 약해지고 있으며 멸시당하고 있다. 별 볼이 없는 곳, 현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시대착오적인 곳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 참 부흥과 개혁이 일어나면 상황이 완전히 뒤바뀐다. 세상이 교회를 다시 보기 시작한다. 이 시점에 가장 필요한 일이 그것이다. 과연 무엇이 우리에게서 충만함을 빼앗아 가는 것인가? 우리는 왜 충만함에 대해 더 알지 못하는 것일까? 왜 우리는 성경의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처럼 기쁨과 찬양과 감사의 영으로 충만하지 못하는가?

 

I. 부추기는 자가 있다

 

1. 첫째는 마귀가 존재하며 그가 꾸미고 있는 계책 중의 하나인 교만 때문이다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혼란을 일으키지만,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다’(고후 2:11). 하나님의 말씀이 그 계책을 가르쳐준다. 그 계책을 분명히 밝혀준다. 그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의 충만함을 받기 위해 제거해야 할 장애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필자는 로이드 죤즈의 강해를 인용하여 그것들을 기록하고자 한다.

 

1) 그 장애물은 교만이다

니고데모가 바로 그런 사람을 대표한다. 그에게는 극복해야 할 어려움과 문제와 장애물이 잔뜩 있었다. 그가 원하는 바는 옳았지만, 바로잡아야 할 잘못된 측면들이 많았다. 본문에서는 세례요한의 친구와 그 제자들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타내는 장애물이다.

우리는 다 교만하다. 교만하지 않은 자가 없다. 교만은 보편적인 현상이며 당연히 죄의 결과물이다.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바로 교만의 죄였다. 마귀가 하와에게 말한 요지는 하나님이 저 열매를 먹지 말라 했다고? 다 너희를 억압하려고 한 말이야! 저것을 먹으면 신처럼 된다는 것을 알거든.” 이였다. 그 말이 여자와 남자에게 호소력을 나타냈다. 이 교만이 모든 문제의 원천이 되었다. 죄의 현상들을 추적하면 대부분 결국은 교만, 곧 크고 중요한 사람이 되려는 욕망과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다윗도 여러 번 교만 때문에 악하고 죄악된 방식으로 스스로 높아졌다가 낮아지는 일이 있었다. 요한의 사건은 우리 자신이 천성적으로 교만할 뿐 아니라, 우리가 잘되길 바라는 주변 친구들이나 지인들이 교만을 부추길 때가 많다는 것이 분명하다. 교만만큼이나 자주 하나님의 성도들과 지도자를 불구로 만드는 죄가 없다.

 

3) 사람을 분노하게 하는 것은 비교의식이다

이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조력자였다. 요한은 비범한 인물이었다.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말라기 시대 이후 거의 400년 동안이나 하나님의 말씀이 특별히 임하지 않았다. 그런데 빈들에 있던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갑자기 임했고, 그는 경이로운 인물이 되었다. 이 기이한 인물을 보고 비상한 메시지를 들으며 그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예루살렘을 비롯한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요한은 많은 제자를 모아 자신을 돕게 했으며, 그들은 자기들의 선생님으로 인하여 활기에 넘쳤다.

그런데 갑자기 나사렛 예수라는 또 다른 인물이 등장하더니, 얼마 후에는 요한을 따르는 무리들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참하는 무리가 더 많아졌다. 요한의 제자와 추종자들은 그 사태를 염려했다. 자기들의 스승 요한의 평판과 위대함이 깎일까 봐 염려했다. 요한의 지위를 지켜 주려 했고, 요한이 무슨 조처를 취하기를 바랐다. 마침내 그들은 우리 주와 구주되신 그리스도의 사역을 싫어하고 비판하기에 이르렀다. 요한을 능가하는 무엇인가가 예수님께 있을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인정하지 못했다. 그것을 모욕으로 생각했고, 그들은 분노에 사로잡혔고 그 분노가 정당하다고 생각했다.

우리 선생님의 가르침을 능가하는 가르침이 있다고? 저 선생님은 도대체 누구지? 우리 선생님이 저 사람을 저지해야 하는 것이 아니야?” 그들은 이처럼 교만에 사로잡혀 세례요한의 교만 또한 부추기고 자극하려 들었다. 그래서 세례요한을 찾아가 말한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3:26)라고 했다. 이처럼 그들이 요한의 교만을 부추기는 말을 꺼내려 했을 때, 요한은 즉시 대답했다(27). 그들이 하려는 말을 가로채어 대답함으로 완전히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이것은 우리 자신에게 해당되는 아주 무서운 문제를 나타내어 보여준다. 요한의 제자들 속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가 제안하시는 모든 것에 저항하며 분개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다. 이것이 우리의 무서운 문제이다.

 

그러면 이 문제는 어떻게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왜 그의 충만함과 은혜 위에 은혜를 받지 못할까?

 

2. 우리가 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1) 지금 이대로가 괜찮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주님이 나타나시기 전에 요한은 잘 설교하고 세례를 주고 무리를 많이 모으지 않았던가? 우리도 똑같은 마음을 느낀다. 지금 이대로도 괜찮고 잘 지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독실한 종교인이 빠지는 특정한 위험이 이것이다. 독실한 종교인이 되는 것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아니면서도 얼마든지 독실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니고데모의 사례와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똑같은 문제의 또 다른 측면을 보게 된다. 그들은 지금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바로 이런 생각이 더 충만함을 받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다. 이렇게 생각하며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교리를 알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며 그 밖의 모든 것을 비판한다.

 

2) 자기만족에 빠져 있다.

자기의 삶과 선행에 전적으로 만족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바리새인들처럼 남들과 다른 것에 감사한다. 신문이나 뉴스를 들으면서 자신은 지금 정보를 취하고 있는 그들과 같은 죄악의 소굴에 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악한 범죄를 저지르며, 그렇게 더럽고 극악한 죄에 빠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님은 성전에 올라가자마자 앞으로 나아가서 남의 것을 갈취하는 자들과 같지 않은 것을 감사드린 바리새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문제를 단번에 보여주셨다. 그들은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았기에 구하지 않았으며 그저 비교하여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3) 독실한 종교인으로만 살 뿐이다

바리새인과 세리가 다르듯이 독실한 종교인과 그리스도인도 다르다. 종교인은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다 하고 있다. 용서의 필요성도 느끼지 않는다. 왜 그럴까? 지은 죄가 없는데 무슨 용서를 구하겠는가? 그래서 그는 확실히 무엇을 더 받거나 더 충만해질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남들이 다 자기 같지 않은 것만 안타까워 할 뿐이다. 이것이 그의 고민이다.

이 제자들의 입장도 그런 것이었다. 우리 중에도 그런 입장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사람이 많다. 그는 종교적 양육을 받고 온갖 보호를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다. 늘 교회 울타리 안에 있던 사람이며, 한 번도 세상에 나가 밑바닥 인생을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무엇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은 것이 확실하며, 자신의 삶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들을 한번 보라는 것이다.

 

3. 체험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교만 때문이다

1) 성숙해지는 것을 거부한다

그래 나는 체험이 있지, 나는 결단했어.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 확실해. 나는 이미 그리스도인이야. 그날 이후 계속 그리스도인이었지라고 말한다. 늘 과거의 결단에 대해 이야기한다. 수년 전에 그랬는데, 그것을 의지하고 그 상태에 머문다. 사람이 그토록 쉽게 과거사에 의존할 수 있다는 점은 거듭 생각해도 놀랍다. “할 것은 이미 다 했어. 더 필요한 것은 없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 중생하고 회심할 때 받은 것이 전부이다. 이것이 교만이 나타나는 한 가지 방식이다. 이처럼 스스로 잘하고 있다는 자기만족에 빠진 사람은 자동적으로 전에 듣지 못한 가르침이나 새롭게 무엇인가를 강조하는 가르침을 싫어하게 된다. 이들의 문제도 그것이었다. 요한의 가르침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이런 자들은 약간만 달라도 새로운 것을 강조한다고 싫어한다. 이미 다 있는데 왜 굳이 다른 것이 필요하겠는가?

 

2) 교회 역사에서의 실례

 

(1) 종교개혁과 로마가톨릭

교회 역사 중에서 위대한 개혁과 부흥의 시기에, 사도행전의 복음을 새롭게 강조할 때마다 심각한 반대에 부딪쳤던 것을 알 수 있다. 전통과 비교되거나 새롭거나 색달라 보이는 가르침에는 항상 반대가 따랐다. 종교개혁 때가 바로 그때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과 신약 성경 일부, 구약성경 상당 부분을 뒤섞어 정교한 가르침과 체계를 만들어 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신학대전이라는 위대한 책에 정교하게 다듬어 놓았다. 이것이 가톨릭의 가르침으로, 그들은 이것을 가르치고 설교했다. 신약성경과의 접촉점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신약도 기계적으로 사용하기는 했지만, 실제로 가르친 것은 이 교의와 일단의 가르침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마틴 루터가 빛을 받고 성경에서 발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전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분노하였고, 반대하였다. 이렇게 교회는 옛 가르침을 새 가르침으로 치부하는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2)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와 당시의 영국의 교회

18세기에 성령의 능력을 받아 절대적 필요성 및 중생을 전했던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도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혁신자 취급을 받았고, 새로운 교리를 전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종교는 약간의 도덕으로 된다는 것이 당대인들의 종교관이었다. 이신론자(deism)들을 비롯하여 초자연적 요소들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에게 종교는 더 이상 인격적인 것이 아니라, 지루하고 의무적이고 건조한 도덕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주 문학적인 수사와 인용을 동원해서 설교하는 것 외에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휫필드가 중생과 거듭남의 교리를 설교하기 시작하자, “저 새로운 가르침은 뭐야? ‘ 하며 반발한 것이다. 그들은 초대교회 가르침을 새롭고 낯선 가르침으로 치부했다. 오늘날 우리도 그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회에서 이상한 사람이 되고 싶으면 신약의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 된다. 신약의 복음은 거의 새롭고 낯선 가르침으로 치부되고 있다. 교회 안에 있는 선량하고 독실한 자들이 이런 상태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은 정말 기이한 일이다. 참된 메시지를 듣고도 새롭고 낯설고 다르게 보인다는 이유로 분개하며 멀리할 수 있다.

 

3. 동요되기 싫어하는 마음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의 삶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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