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에서 빛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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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석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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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3장 19절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들어가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데서 받는 “은혜 위의 은혜”라는 복된 말씀에 대해, 왜 우리는 그분의 은혜를 더 알아가지 못할까? 우리는 왜 마땅히 경험해야 할 이 일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우리가 이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이 모든 가능성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도 왕의 자녀처럼 살지 못하고 거지처럼 사는 것이 비극이라는 것이다. 그보다 더 절실한 둘째 이유는 그리스도인이 성경에 기록된 모습을 실제로 보여줄 때 세상이 비로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교회 체제나 훈련, 프로그램과 제도에 관심이 없다. 세상은 오직 생생하고 활기찬 것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렇게 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들이 많다. 왜 그럴까? 우리 모든 사람이 죄로 가득 찬 사람이며, 우리의 생각과 태도를 흔들고 어지럽히는 강력한 대적이 있기 때문이다. 마귀는 얼마나 뛰어난지 “광명의 천사”(고후 11:14)로 가장하며 심지어 성경까지 인용한다.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생생하고 활기찬 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모든 것을 극대로 활용한다. 우리의 핵심 문제는 요한복음 3장 16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사랑을 거의 알지 못하는 데 있다. 그 사랑만 알아도 대부분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성경에서 그 사랑을 파악하고 붙잡는 것이다. 기도하고 교통하며 교제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추구함으로 그 사랑을 발견하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자신을 속이며 마귀에게 속는지 알 수 있다. 19절은 명쾌하게 그 문제를 말한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여기서 가르치는 원리가 무엇일까? 로이드 죤스의 설교를 통해 살펴보자.
1. 첫째 원리는 자신이 빛을 추구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떤 의미에서 사람들은 빛이 임하기를 희망하고 추구하면서도 정작 하나님이 보내신 빛은 거부한다. 왜 그럴까? 그것은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음을 더 사랑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들은 이 사실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 죄가 얼마나 사람을 무모하게 만드는가? 마치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종 하갈과 같다. 아들을 데리고 광야로 나간 하갈은 물이 없어 죽을 위험에 처했다 어쩔 줄 모르고 절망에 빠져 부르짖는 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보라 네 옆에 샘이 있다.” 샘이 내내 거기 있었는데도 하갈은 보지 못했다. 우리도 그와 같다. 우리가 왜 “그의 충만한데서” 받지 못할까?
많은 사람들은 니고데모처럼 자신과 자신의 인생에 만족하지 못하고 불안해한다. 더 나은 무엇인가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것을 갈망하며 그것을 찾아 나서지만 끝내 찾지 못한다. 왜 찾지 못할까? 그것은 오직 한 곳, 한 분 안에만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니고데모는 탐구자였다. 그래서 밤에 주님을 찾아와 대화를 청했다. 그런데 주님은 “네 태도가 문제다. 빛을 더 이상 찾을 필요가 없는데 찾는 것이 문제다. 내가 곧 빛이다. 네가 찾는 모든 것은 내 안에 있다”라고 하셨다. 이것이 그에게 하신 말씀의 요지였다.
1) 신자가 가진 불신자와 같은 위험성
불신자에게 나타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보통 이것을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찾기를 포기하는 순간, 그토록 찾던 것이 내내 앞에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불신자만 그런 것은 아니다. 충만함에 대한 이 말씀 앞에 선 신자의 상황도 똑같다. 불신자를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잡아끄는 그것이 우리도 잡아끌어 그의 충만한 데서 받지 못하게 하며 은혜위의 은혜를 받지 못하게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한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3:19)“라고 기도한다. 그런데 왜 충만해지지 못할까? 바로 이 다음과 같은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2) 잘못된 접근 방식
(1) 지적인 방식으로 충만함을 찾는다
이런 것들은 접근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지적인 길에서 충만함을 찾고 구한다. 많은 시간을 들여 거룩하고 경건한 삶에 대한 책을 읽는다. 그렇게 연구하다가 철학의 영향을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도 철학적으로 이해한다. 그렇게 지적인 길을 추구하다 보면, 자기가 열망하는 충만함에 결국 이르리리라 생각한다. 이것은 실제적인 위험이다. 충만함에 대한 안내서를 읽고 전기를 읽으며 평생 세월을 보낼 수 있다. 그들의 큰 관심은 충만함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지만, 그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 그럴까? 많은 경우에 지적인 관심만 갖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지적인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나쁜 습관이 형성된 탓에 정작 본인은 결코 그런 경험을 하지 못한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그것만 계속 수집할 뿐이다.
(2)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은 채 잘못된 길을 찾아 헤맨다
왜냐하면 마귀는 언제나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고 가기 때문이다. 성도들의 생애와 전기에서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지식과 정보에만 기대어 살면서 실제로 자기 자신에게는 적용하지 않을 위험이 있다. 또 다른 잘못은 극적인 체험을 기다리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당연히 체험하는 일이 있다. 그런데 주의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다는 것은 단순히 어떤 체험을 기다리고 추구하며 집회를 찾아다니거나 안수를 받거나 비슷한 일들을 할 위험이 있다. 그렇게 잘못된 길로 빠져들 위험이 있다.
(3) 반대로 의지의 관점에서만 충만함의 문제를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신비한 길이나 그 비슷한 길을 따라 크고 강한 의지력을 끌어내고 스스로 다잡는 것이 충만함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스스로 공동체나 사회에서 자신을 격리하며 매우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희생하는데, 그들 중에는 영웅적인 이들도 많았다. 그러나 이 태도는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이런 것은 어떤 행동이나 하나의 체험이 충만함을 얻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나타난 결과이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충만함을 구하는데 시간을 바친다.
2. 빛이 이미 왔다는 점에서 이 모든 방식은 잘못된 것이다
요한복음은 명백하게 “영원한 생명”, “영구한 생명”에 대한 말씀을 계속 반복해서 말한다.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영원하고 영구하고 충만함-을 얻게(점점 더 많이 얻게)하려 하심이라”
1) 이 말의 의미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미 전부 있다는 것이다.
신약 전체의 가르침은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그에게서 받으면 되고 그의 충만하신 데서 취하면 된다는 것이다. 주님은 이 충만함을 여러 가지 말씀으로 표현하셨다. 그것은 우리 안에 솟아나는 “샘물(4:14)”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전부 주어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자. 바울 사도는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라고 말씀한다. 그는 “만유시오 만유 안에 계신”(골 3:11) 분이시다. 온전히 충분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와 지혜의 모든 보화가 그 안에 감추어져 있고 비축되어 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지길 기도했다(엡 3:18-19).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빛이 왔으니 그 빛을 바라보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구원받을 때와 똑같다. 주님은 자신이 장대에 달린 놋뱀과 같다고 하셨다. 그를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지적인 길이나 경험의 길을 따라 막연히 무엇인가를 기다리다가 세월을 다 허비하고 잃었다는 사실을 뉘늦게야 깨듣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비극이다. 그들은 더 많은 지식의 필요성을 느끼며 평생 살다가 불모의 상태로 인생을 마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일이요 정죄 받을 일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잘못된 길에 빠져 있다. 더 많은 빛을 구하면 안 된다. 왜냐하면 그 빛이 이미 다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천년 동안 과거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충만해졌는가? 놀라운 현대의 지식을 비롯한 온갖 것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얼마나 높은 경지에 이르렀는가? 얼마나 놀라운 경험을 했는가? 단순하고 평범한 자들이나 뛰어난 천재들이나 어떻게 충만해졌는가? 그 대답은 그들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충만해졌다는 것이다. 현대인만 아는 특별하고 새로운 교훈이 있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며, 기독 신앙 전체를 부인하는 생각이다.
2) 우리는 왜 이런 잘못된 길에 빠질까?
왜 이렇게 자신을 속이는 것일까? 겉보기에는 괜찮은 사람 같다. 더 높은 경지에 이르기를 추구하며 계속 탐색하는 훌륭한 사람 같다. 그러나 사실은 완전히 잘못되었다. 왜 잘못되었는가? 본문이 그 이유를 정확히 알려준다. 충만함이란 지적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도덕적인 데 있다는 것이 성경의 대답이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 지점에서 문제의 핵심 본질을 깨닫는데 실패하고 있다. 우리는 이해가 안 되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마치 니고데모와 같이 말로는 빛과 통찰을 원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원치 않는다. 그것은 위장에 불과하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빛이 이미 왔는데 왜 그 앞에 나아가 볕을 쬐고 활기와 활력을 되찾지 않을까? 성경은 대답한다: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3) 인류 전체의 유일한 공통분모가 있는데 그것은 ‘악한 마음’이다
천재나 위대한 철학자나 가장 악명 높고 난폭한 죄인이나 이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영적인 영역에서는 특별한 사례가 없다. 그런데 우리는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우리는 저마다 자신을 특별한 사례로 여기려 든다. 니고데모도 그랬고 우리도 그렇다. 우리는 다 자기 문제가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만, 특별한 문제를 가진 자는 아무도 없다. 우리 모두가 가진 은밀한 비밀과 특별한 문제는 전부 한 지점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본문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하게 밝히는 이 한 지점으로 모이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죄의 형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죄를 지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중요하며 이 점에서 모든 사람은 똑같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바리새인들이 주님의 가르침과 설교에 분노한 이유가 여기 있다. 주님은 그들이 죄인임을 깨닫고 느끼게 하셨다. 그 때문에 주님을 미워하고 죽인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모든 사람이 죄인임을 아셨기에 그 사실을 일깨우셨다. 이것은 모든 인류의 공통된 특징이다.
3. 이 특징은 어떻게 나타날까?
1) 우리의 문제는 지적인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사랑하는데 있다.
“그 정죄는 이것이니.” 빛은 이미 온전히 왔다. 모든 시대 성도들이 받고 기뻐했던 빛이 지금도 그리스도 안에 충만히 있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는 빛이 없을까? 우리가 내세우는 문제들 때문이 아니다. “더 많은 빛, 더 많은 교훈”이 필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의 진정한 문제는 천성적으로 어두움을 사랑하는데 있다. 죄의 핵심적인 본질이 이것이다. 당연히 이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나쁜 짓을 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것도 포함되지만 죄의 실제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우리의 실제적 문제는 게속 나쁜 짓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 그 자체에 있다. 바로 이것이 문제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그것은 오직 하나, 어두움을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이것은 단순히 어두움 안에서 살고 어둠의 특징이 나타나는 짓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빛으로 돌이키지 않을 만큼 어둠을 사랑하고 좋아하며 흐뭇해한다는 뜻이다.
(1) 우리의 도덕 체계는 아주 피상적이다
오직 행동과 행위에만 관심이 있다. 문제의 실제 근원 곧 성경이 탐심이라고 부르는 과도한 애착과 욕망과 정욕은 절대 건드리지 않는다. 사도 바울도 성령이 빛을 비추어 주시기 전까지는 이것을 전혀 몰랐다고 말한다. 자기에게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롬 7:9)고 한다. “탐내지 말라”는 계명의 의미를 깨달을 때 끝장 나 버렸다. 그는 자신이 탐낸 것을 알았다 바리새인들은 실제 행동만 하지 않으면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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