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철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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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위일체 1 (The Triune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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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철 목사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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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장 삼위일체(1): 이 짧은 연속 강의에서 우리는 성경이 어떤 책인가 하는 문제를 논하면서 살펴보았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그 책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는 문제로 들어왔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우리는 조금 시작할 시간 밖에 없었다. 우리는 단지 성경이 우리에게 세상의 창조주요, 통치자이신 인격적(人格的)인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연의 강력한 과정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이름이 아니고, 그러한 과정의 어떤 일부분 혹은 일면이 아니다. 그의 뜻의 명령(fiat)에 의해 자연의 과정을 창조하셨고, 그가 만드신 우주와 영원히 독립하여 계신 자유롭고 거룩하신 인격이시다.


이제 우리는 좀 더 자세하게,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고 질문한다. 우리는 그렇게 질문할 때, 나는 우리가 반론(反論)에 직면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종교의 죽음과 같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말고 그를 느껴야(feel) 한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모든 신학을 치워버리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존재의 깊은 심연에 잠기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상과 같은 것은 옛날과 오늘날의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들의 태도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신비주의자와 달리, 자기가 믿는 분을 알고 있다. 신학(神學)을 무시하고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무시하는 종교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 한 가지, 그것은 거의 전혀 어떤 윤리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순수한 감정은 만약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비윤리적이다. 그것은 인간관계의 측면에서 관찰될 수 있다. 친구에 대한 사랑을 그렇게 고상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친구의 인격과 필요물들에 대한 지식이다. 그러한 지식에 무관심한가? 그것을 부정하려고 하는 오류에 대해 무관심한가? 친구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야비한 비방들에 대해 내가 무관심한가? 만약 내가 친구라는 이름을 가질 만한 자라면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사랑이 실제로 교리(敎理)로 차 있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사랑은 사랑의 대상에 대한 마음에 저장된 많은 관찰들에 의존한다는 것은 아주 분명한 것 같다.


흔히 본능적이라 생각되는 그러한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것이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생각해보자. 이 사랑이 어린아이 속에 있는 뛰어난 특질과 독립되어 있음은 의심할 수 없다. 그 아이가 무엇을 할지라도, 어머니의 사랑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어머니의 사랑은 그 어린아이에 대한 어떤 지식과 독립되어 있는가? 그 어린아이의 고통들과 필요들에 대한 어떤 지식과 독립되어 있는가? 동감(同感)하고 이해하기 위하여 그 어린아이의 영혼에 깊이 관심을 가질 어떤 가능성과 독립되어 있는가? 만약 그것이 그와 같이 모든 지식과 독립되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전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거의 인간 이하의 수준에 떨어진 사랑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신비주의자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떨어뜨리려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 이하의 비인격적인 수준으로이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매우 다르다. 성경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 그의 거룩한 성경에서 그의 사랑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셨고, 우리가 사랑해야 할 분으로 자신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만약 우리가 성경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을 순종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할 것이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들을 의식적으로 항상 되풀이한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어떤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삶의 전투로 피곤한 하나님의 자녀가 마치 그가 누워 쉬듯이, 오직 주여, 당신께서는 우리가 옛날과 같이 동일한 관계에 있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하고 말한 시간들이 있다. 비록 그리스도인이 그가 하나님에 관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 당장에는 자세히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그가 이상스럽게도 하나님의 임재(臨在)를 의식할 시간들이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에게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떤 다른 경험들과 다른 하나님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제시한다. 그리고 물론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단순히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을 구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그의 하나님과의 이러한 아름답고 복된 교통의 밑바탕에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이 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지식과 독립되어 있는 하나님과의 교통은 어떤 다른 신()과의 교통이지, 성경이 제시하는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과의 교통은 아니다.

 

참된 사람은 누구나 친구를 비방하는 말에 대해 분개한다.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비방하는 말들에 열 배나 더 슬퍼해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들이 하나님과 사람의 구별을 부수어 뜨리고 하나님을 사람의 수준으로 끌어내릴 때, 우리가 어떻게 공손하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어떻게 매우 흔한 이런 식으로 혹은 저린 식으로 말해지는 바와 같이, 정통성(正統性)은 별로 중요치 않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인간 친구에 관해서는 그런 식으로 결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인간 친구에 대해서는 그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옳든지 그르든지 별로 중요치 않다고 겨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에 대해서 그러한 어리석은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참으로 철저한(논리 일관된) 그리스도인은 그러한 교리적 무관심주의(indifferentism)와는 아무런 관계를 가질 수 없다.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성경에서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에 무관심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은 없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성경에서 자신에 관해 우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가?


물론 이와 같은 질문에 지금 충분히 대답할 수 없다. 그러나 말하기를 원하는 몇 가지 사실들이 있다. 그리고 만약 그것들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성경 읽는 일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된다면, 이 강연의 목적이 달성될 것이다.


장로교회의 소요리문답(Shorter Catechism)에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What is God?)’하는 질문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답이 있다:“하나님은 그의 존재와 지혜와 능력과 거룩과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신 영(Spirit)이시다.”이 대답은 확실히 성경과 일치한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 말하는 것을 우리의 마음으로 바르게 이해하는 데 이 대답이 약간의 도움을 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는 말에 주목하자. 그가 무한하시다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무한하다는 말은 끝이나 제한이 없다는 의미이다. 다른 것들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비제한적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려고 할 때 우리의 일반적인 공간개념(空間槪念) 속에 떨어지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구로부터 현대천문학에 알려진 가장 먼 - 아주 여러 광년(光年) 떨어진 - 별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상상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거기에 도착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을 때보다 무한(無限)을 측정하는 데 1인치의 몇 분의 일도 더 가까이 가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천만 배, 천만 배나 더 멀리 여행하는 것을 상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우리가 출발했을 때보다 무한에 더 가까워지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공간의 제한을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무한한 공간도 상상할 수 없다. 우리의 지성은 무한 앞에서는 약해진다.


그러나 사실 무한을 생각함에 있어서 우리가 그러한 공간개념을 사용하는데 잘못이 있었다. 그리고 특히 무한하신 하나님을 생각함에 있어서 공간개념을 사용하는 데 잘못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과학에 의해 알려진 우주의 광대한 영역 전체에 가득 차게 계시며, 그 보다 더 무한하시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를 진리의 문 앞까지는 인도해 줄 런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 무한한 공간 안에 거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를 진리의 문 앞까지는 인도해 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하면, 그러한 공간 자체가 유한한 것에 속하며 무한한 공간이라는 생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 자신은 공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에게는 가깝고 먼 것이 없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똑같이 가깝다.


우리가 하나님을 영원하시다고 생각하려고 할 때도 마찬가지다. 만약 무한이라는 말이 공간개념과 대조적으로 관계된 것이라면, ‘영원이라는 말은 시간개념과 대조적으로 관계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원하시다고 우리가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시작이 없으셨다는 것과 끝이 없으실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실 그 이상을 의미한다. 시간이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에게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시간이 그를 위해서는 아무 의미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의미한다.


그는 유일한 피조세계를 창조하셨을 때 시간을 창조하셨다. 그 자신은 시간을 초월하여 계신다. 그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성경은 그것을 시적(詩的)으로 이렇게 표현한다.:“주의 목전(目前)에는 천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경점(更點) 같을 뿐임이니라.”우리는 물론 하나님의 행위들을 시간 속에서 일어난 일로 생각해야 한다. 그는 한 가지 일을 하시고 또 그 다음에 한 가지 일을 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그는 오늘 이것을 행하시고 내일 저것을 행하시는 분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 완전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러한 권리에 대해 우리를 충분히 확증한다. 우리에게는 사실 과거의 일과 현재의 일과 미래의 일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다루실 때에 참으로 시간적인 연속 속에서 행동하신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똑같이 현재이다. 그분에게는 이전의 일이나 이후의 일이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것은 매우 종요하다.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屬性)들은 흔히 부정되고 있다. 그것들을 부정하는 자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유한한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비록 세상의 일들이 아주 옳지는 않다 하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비난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의 최선을 다하고 계시다고 한다. 그는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져오려고 하시지만, 그가 창조하지 않았고 그가 그의 뜻에 따라 단지 점진적으로 그리고 불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반항적인 물질에 직면하고 있다고 한다. 그를 돕는 것은 우리의 임무이고, 우리가 처음에는 우리가 송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던 전능하신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섭섭히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의 도움 없이는 무엇을 행하실 수 없다는 것을, 영감을 주는 생각으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로할 수 있다고 그들은 말한다.


우리는 그러한 유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그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지 분명하게 말하겠다. 그는 하나님(God)이 아니고 하나의(a god)이다. 그는 인간들의 생각의 산물이다. 인간들은 그러한 작은 신()들을 많이 만들어 왔다. 신들을 만드는 것은, 책들을 만드는 것처럼, 끝이 없다. 그러나 우리 앞에 성경을 가지고 있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이 만든 그러한 작은 모든 신들로부터 돌아서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두려운 신비를 향해 나아가며, 어거스틴(St. Augustine)이 말했던 바와 같이, 거룩한 두려움으로 가지고 당신께서는 당신 자신을 위하여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마음은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는 안식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성경이 하나님에 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는가를 요약하기 위해 우리가 인용한, 소요리문답의 그 정의(定義)는 단지 하나님께서 그의 존재와 그의 능력과 그의 거룩에 있어서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고 말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가 그의 지혜와 의와 선과 진실에 있어서도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불변하시다고 말한다.


각주 1) 

이러한 반론에 대한 이하의 취급은 J. G. 메이첸의 책, 이민철 역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 1923, p. 54이하에 취급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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