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를 위해 피 흘린 토마스
1866년 9월 2일, 27세의 꽃다운 젊은 나이의 한 젊은이가 창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을 찌른 이에게 성경책 한 권을 건네며 받길 권하였다. 이 사건은 로버트 토마스가 평양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죽어가면서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한 한 장면이다. 과연 140여 년 전에 평양 대동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당시는 주의 복음을 전할 수 없는 상황 하에서 오로지 성경책을 전하기 위하여 미상선 제너럴 셔어먼호를 타고 입국한 토마스는 한국교회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함으로 순교하였고, 그의 핏방울은 헛되지 않고 때가 되매 한국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었다. 장사포에서 성경을 받은 홍신길 소년, 석호경에서 성경을 받은 김영섭, 김종권, 만경대에서 성경을 받은 최치량은 후일 강서와 평양교회 창립자가 되었고, 토마스 선교사를 죽이려던 박춘권은 안주교회의 영수가 되었다.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는 1839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 레드너셔주 라이더에서 영국 회중교회 목사인 로버트 토마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 저매인은 1853년 14세에 크란도버리 컬리지에 입학하여 라틴어, 불어, 헬라어 등을 공부하였고, 다시 뉴컬리지 신학부에 입학하여 본격적으로 신학을 공부하면서 목사의 길을 준비하였다. 시골에서 목회하시는 아버지에게 가급적 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돈을 아껴 생활하므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곧 복학하여 그 학교를 졸업하고 의과대학을 2년간 공부하였다. 토마스의 성격은 매우 도전적이었다. 따라서 그는 성실하게 의학공부를 마쳤지만, 이때에 인간의 육신 뿐 아니라 영혼에 관심을 갖고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매우 결단력이 있는 사람이므로 의사직을 포기하고 일단 잉글랜드 온들(Oundle)에서 교사로 일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만남의 복을 통해 역사하시는 분이시다. 온들에서 그는 자신을 초청한 학교의 교장, 앨프레드 뉴스를 만나는데, 그는 온들 회중교회 담임목사였다. 본래 앨프레드는 중국선교에 관심을 갖고 준비하였지만, 23세에 호머튼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선교사직을 포기하고 목회의 길을 걸었던 인물이었다. 토마스는 바로 그를 통해 중국을 알게 되었고, 심령에 부흥이 일어나 선교를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토마스가 중국선교를 준비하고 있을 때, 이미 런던선교회는 근대선교의 아버지인 윌리암 캐리를 인도에 첫 선교사로 파송하였고, 1807년에 모리슨을 중국에 파송하였다. 토마스는 1861년 4월 25일, 런던선교회에 중국선교사로 가고자 지원하는 편지를 보냈다. 당시 런던선교회는 중국을 집중적으로 복음으로 공략하기 위한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863년 뉴컬리지를 졸업하고, 그해 5월 29일, 캐롤라인(Caroline Godfrey)와 결혼, 6월 4일, 아버가번니(Abergavenny) 하노버 예배당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7월 21일 아내와 함께 그라베센드에서 폴리마이스호를 타고 중국을 향했다.
그 배 안에는 런던선교회로부터 북경 기독교병원 감독으로 임명받은 다젼 선교사 부부와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에서 파송을 받은 윌리암슨 선교사 부부가 동승하였다. 윌리암슨은 지난 1855년 런던선교회로부터 중국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활동하다가 안식년을 마치고 이번에 스코틀랜드 성서공회로부 터 지푸 지부 총무로 파송을 받아 가는 도중이었다. 토마스 부부는 그 틈에 끼어 선교에 대한 벅찬 기대를 가지고 대서양을 가로지르고 아프리카 최남단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는 가운데 자신들이 감당해야 할 사역을 위해 기도로 준비하면서 갔다. 긴 4개월의 항해를 마치고 1863년 12월 초 상하이에 도착하였다. 중국 상해에 도착한 토마스 부부는 기후와 문화, 음식, 언어 등 모든 것이 힘들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감당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기도하면서 견디었지만, 문제는 임신한 그의 아내 캐롤라인이었다.
음식도 맞지 않고 문화도 다른 곳에서 남편만 뒷바라지를 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토마스가 런던선교회 본부가 있던 내륙도시 한구로 출장간 사이 이웃 미국 선교사 부인의 갑작스런 죽음에 그녀는 충격을 받아 하혈하면서 유산이 되었다. 게다가 그녀를 돌봐줄 사람이 없어 그만 1864년 3월 24일 소천하고 말았다. 이것은 토마스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토마스의 편지에 기록하길,
“이 사건으로 나는 완전히 실의에 빠졌습니다. 나는 완전히 상심하였습니다. 더 이상은 쓸 수가 없습니다. 이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하려고 하니 슬픔이 또다시 복받쳐 오릅니다.”
하지만 그는 심기일전하여 재기하기 위해 노력을 다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선교할 축복을 허락하지 아니한 것으로 판단하고 1864년 12월 7일, 런던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는 산동성 지푸(오늘날 연태)에 있는 윌리암슨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특별한 묘안이 없었고, 자신의 생활을 하기 위해 지푸 세관 통역관으로 취직을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성령께서 다시 선교의 사명감으로 불타오르게 하셨다.
토마스는 통역관 시절, 외국인과의 교제를 통해 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를 습득하기 시작하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전혀 예상치 못한 두 사람, 한국에서 온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천주교 신자로서 사업관계로 지푸에 온 것이다. 이들을 통해 한국 상황을 전달 받았고, 당시 쇄국정책으로 한국에는 입국하지 못한다는 것과 천주교 박해에 대한 내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한국에 관심을 갖고 선교사역을 준비하여 첫 번째 한국방문을 하였다. 이때 윌리암슨은 한문성경을 후원하여 주었고, 중국인 우문태의 배를 타고 김자평과 최일선의 안내로 1865년 9월 4일, 지푸를 출발,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 근처 포구에 정박하였다. 이때 토마스는 한문성경만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아무 소득 없이 돌아왔고, 단지 한 가지 배운 사실은 한국의 박해상황의 경험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종교서적을 구입하는 사람은 참수 혹은 최소한 벌금과 투옥의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적 상황을 인식하고 철수한 토마스는 다음 기회를 엿봐야 했다. 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었던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호가 많은 상품을 실고 한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토마스는 이 배의 안내원으로 부탁을 받았고, 토마스는 윌리암슨로 부터 많은 성경을 후원받아 승선하였다. 그리고 셔어먼호는 1866년 8월 대동강 입국에 진입하였다. 평안도 감사는 문청관을 보내 입항한 이유를 물었다. 당연 통상문제였기에 감사는 이를 거절하였다. 하지만 상선은 이를 묵살하고 평양시 대동강 하구 보산까지 들어갔다. 마침 여름 장마철이라 대동강은 폭우로 홍수가 나고 만조가 되어 배는 포리에 정박하였을 때, 이 배에 몰려온 사람들에게 성경책 500권을 배포하였고, 계속 배는 만경대까지 입항하였다. 이곳은 평양성에서 10리 밖에 안 되는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여기서도 토마스는 열심히 성경을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함께 동승했던 중국인 이현익이 관원들에게 붙잡혀 선원들은 총을 난사하였고, 평양성 관군들은 이에 대응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이현익이 구출되었지만, 셔어먼호와 관군 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 사태를 평양감사 박규수는 조정에 보고하였으며, 조정에서 고종은 셔어먼호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배는 퇴조가 되어 진흙에 걸려 오갈 수 없도록 좌초된 상황이었다. 관군은 불화살을 셔어먼호에 날리고, 배는 불타기 시작하였으며 선원들은 강으로 뛰어 들기 시작하였다. 배에서 뛰쳐나오는 선원들은 관군들이 휘두른 곤봉에 맞거나 창으로, 칼로 살해당했으며, 토마스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토마스는 1866년 9월 5일, 27세 약관의 나이에 대동강 쑥섬 모래사장에서 자신의 고귀한 육체를 주의 복음을 위해 아름답게 순교의 제물로 드렸다.
비록 그가 선교의 꿈을 모두 펼치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지만, 그의 피는 헛되지 않았으니 당시 11세였던 최치량은 숙부와 함께 구경하러 갔다가 토마스 선교사가 뿌린 성경 3권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고, 그때 20세였던 이신행은 한 권을 얻었고, 그녀는 평양 최초의 여교인이 되었다. 그녀의 아들인 이덕환은 오랫동안 평양 장대현교회 장로로 시무하였다. 당시 토마스는 수많은 성경을 배포하였는데, 정부에서 그 모든 성경을 몰수하라는 명령으로 성경을 소지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태워버리든지, 강에 던지든지 하였다. 그러나 영문주사로 있던 박영식은 사람들이 버린 성경을 수집하여 평양 대동문 안에 있던 자기 집 벽지로 사용하였다. 최치량은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개조, 마포삼열과 한석진을 투숙시키기도 하였다. 이들의 전도로 최치량은 평양 최초의 교인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마포가 평양에 선교하러 올 때, 토마스의 성경을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고 한다. 이미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도록 토마스를 통해 준비시켜 주셨던 게다.
우리 주님은 토마스의 순교를 받으시고, 마치 한 알의 밀알이 떨어져 죽었을 때 많은 열매를 맺는 것처럼, 그의 순교로 인해 한국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교회를 통해 수많은 영혼을 구원하시기로 섭리하셨던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진리이다. 오늘날에도 주님은 당신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한 알의 밀알로 썩어져 죽는 이들을 통해 역사하신다. 지금은 이 모든 일을 이해할 수 없지만, 훗날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되리라. 한국의 초기 역사를 보라.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무리한 선교여행을 마치고 부산에서 천연두에 감염되어 소천 하므로 호주장로교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으며, 캐나다 독립선교사인 윌리암 맥켄지의 소천으로 캐나다 장로교 선교부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외에도 수많은 선교사들이 어린 자식을 땅에 묻고, 부인과 자신이 순교함으로 이 땅에 복음이 힘차게 전파되었고, 오늘날 교회가 아름답게 세워져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 토마스는 비록 평양 대동강 쑥섬에서 관원의 창에 맞아 순교함으로 젊은 나이에 주님 품으로 갔지만, 그는 도전의 사람이었다. 그는 본래 의사였으나 복음을 위해 과감히 의사직을 포기하고 목사가 되었으며, 중국에서 아내를 잃고 실의에 빠졌으나 다시금 본래의 사명을 깨닫고 한국에 복음을 들고 나섰던 것이다. 이는 그의 도전적인 성격을 반영해 주는 것이리라. 둘째, 그는 열정의 사람이었다. 성경을 들고 첫 번째 한국에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에게 성경을 나눠주면서 전도하였다. 두 번째 평양에 방문하였을 때도 그는 부지런히 윌리암슨이 후원한 성경을 열정적으로 나눠주었다. 그때 성경을 받은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신자가 되었다. 그런 열정은 희생으로 표출되었다. 세 번째 그는 희생을 각오하는 사람이었다. 당시 한국에 입국하는 데 있어 위험하였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아니하고 입국한 것은 그의 희생정신이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린 그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 너무 많음에 부끄럽다.
그의 몸 안에 끓는 피
보인다.
그 혈관으로 예수사랑의
피가 흘렀으니
무지한 백성 주께 인도하려
소중한 생명 걸고
평양 대동강에 닿았다.
생명의 등불 꺼져 가는데,
두 손을 내밀며 생명책을
건네주었지만 무지한 이들
분노의 창으로 옆구리 찔러
확인살해 하였구나
그의 피, 대동강에서 한강으로
흘러흘러 죽은 생명들
마시면 살아났으니 아,
순결한 토마스 영혼 이제
편히 쉬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