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불꽃처럼 확산되는 종교개혁 불길

편집인 0 2017.02.07 06:19

루터 종교개혁 운동의 확산과 문서의 역할 

교황청의 독재와 부패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던 시대에, 종교개혁은 교회의 거대한 역사적 운동으로서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교황이나 황제, 공의회 그리고 제국의회의 그 어떤 권력도 그것을 막지 못했다. 루터의 개혁 수단은 설교와 펜이 전부였다. 그는 이 둘을 최대한 활용했으며, 복음을 무기와 방패로 삼았다. 

종교개혁이 확산되어가는 과정에서 주된 원인은 루터가 번역했던 독일어 신약성경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서 구텐베르크에 의한 활판 인쇄술의 출현이었다. 이로 인해 루터의 번역 성경은 수백만 부 인쇄되었다. 이 책들이 비텐베르크,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아우크스부르크 등 독일의 50개 이상의 도시들에 배포되었다. 이 작고 귀한 성경책은 제후들과 사제들, 시민들, 농민들, 농부들, 기술자들과 교수들에게 보급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루터의 자국어 성경이 가장 크게 쓰임 받게 되었다. 특히 자국어 성경이 교황의 권위를 압도하면서 빛과 자유와 평안을 갈망한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또한 은혜의 교리들로 가득 찬 루터의 독일어 찬송들과 여러 저서들도 큰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다.

루터는 문서를 통해 개혁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그가 쓴 종교개혁의 3대 작품은 “독일 크리스천 귀족에게 보내는 편지, 교회의 바벨론 감금, 기독자의 자유”등이다. 특히 이 루터의 작품들이 종교개혁에 끼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또한 루터의 95개 조항 반박문과 경건서적, 교부 문서, 각종 고전 등 종교, 신학관계 서적들 그리고 독일어와 라틴어로 된 루터의 소책자가 매일 쏟아져 나왔다. 루터가 쓴 책들은 인쇄기에서 나오자마자 무섭게 팔렸고 유럽 전역에 퍼져 나갔다. 

종교개혁이 독일 동부와 북부, 남부로 확산되어감 

종교개혁 운동의 진원지는 비텐베르크이다. 이곳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멜란히톤과 요나스, 부게하겐의 도움을 받아 개혁 운동이 퍼져 나갔다. 루터의 설교와 함께 개신교 운동은 확산되어 갔다. 1520년부터 1530년대 까지 종교개혁은 독일 동부와 북부 그리고 남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 베를린 돔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베를린에는 돔교회(Berlin Dom)가 있다. 돔 교회는 성당이 아닌 루터 신교이다. 즉 지금은 개신교회이다. 1538년, 16세기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인해 종교개혁 정신을 따르는 루터교회가 됐다. 

특히 교회 밖의 벽면에는 루터가 성경을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성경을 읽을 수 있게 한 공적을 기념하는 조각상이 있다. 여기에는 종교개혁자 루터와 멜란히튼, 얀 후스, 비텐베르크의 헬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교수요 언어학자인 마태우스 아우로갈루스, 비텐베르크의 히브리어 교수 요한 포스터, 비텐베르크 신학교수 카스파 크로이쳐가 들어있다. 또 다른 벽면에는 보름스 제국의회 조각상이 있다. 여기에는 루터와 법학자로서 보름스에 동행한 히어로니모스 슈어프와 루터에게 질문 공세를 한 가톨릭 학자 존 에크와 독일 황제 칼 5세가 새겨져 있다.
 

▲ 루터의 보름스 제국의회 모습 ©뉴스 파워 김현배



작센은 요한 공작이 복음주의 교회 구조의 주축돌을 놓았고, 1526년 농노들에 대한 압정으로 유명했던 필립 백작(Landgraf Phillip)이 자기 영토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라이프치히(Leipzig)는 성 토마스 교회 (Thomaskirche)가 있다. 이 교회는 루터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요한 세반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가 27년간 교회 지휘자로서 봉사했던 교회다. 또한 그 시기에 바흐는 약 140곡 이상의 교회 칸타타, 마태수난곡,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등 많은 교회음악을 작곡하였다. 교회 안에 바흐의 무덤이 있으며, 교회 창문에서 스테인드글라스에 새겨진 바흐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지휘자로 27년간 봉사한 바흐의 신앙이 우리들에게 많은 감동을 주고 있다. 
 

▲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은 바흐가 27년간 찬양대 지위했던 성 토마스 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마그데부르크(Magdeburg)는 멜키오르 미리쉬(Melchior Mirisch)가 1522년에 루터의 교리를 전파했으며, 브레슬라우는 요한 헤스(John Hess)가 1524년 개신교 교리를 잘 변호했다. 브레멘은 1522년 11월에 하인리히 몰러(Heinrich Moller)를 앙스가리 교회로 초청하고, 후에 다른 개신교 목사 두 명을 더 초빙함으로써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몰러는 종교개혁 교리를 설교했으며, 나중에는 광신도들에게 붙잡혀 불에 타 죽었다. 1527년에 브레멘의 모든 교회들이 개신교 목사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다. 

독일 북부 상업 도시들의 수도, 뤼벡은 처음에는 루터 설교자들을 추방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그들을 다시 불러 들였으며, 1529년에는 로마 교회 사제들을 추방했다. 부겐하겐이 이 도시의 개혁 작업을 완수했다.
 

▲ 함부르크 성 미가엘 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함부르크는 1523년에 개신교를 받아들였다. 이 도시에는 서유럽의 대표적인 개신교 교회로 불리우는 성 미카엘 교회가 있다. 교회 앞에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동상에 세워져있다. 이 동상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항하던 개신교의 역사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특별히 종교개혁의 실천자, 요하네스 부겐하겐(Johannes Bugenhagen, 1485-1558) 박사는 함부르크에 청빙 받았다. 그는 곧바로 개혁 작업을 시도했다. 부겐하겐 목사는 예배와 성찬과 그리고 세례 등 이 모든 예전을 바꾸었다. 또한 그는 개혁 교회 규정을 작성하여 교회 조직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그가 작성한 교회법은 다른 교회들에 모범이 되었고, 북부 독일 함부르크와 뤼벡, 브라운슈바이크, 뤼네부르크 까지 전하여 실천되어졌다. 그는 개신교 개혁의 물결을 확장시키고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은 독일 남부로 계속 확산되었다. 아우크스부르크는 종교개혁사 초반에 중요한 도시로 떠올랐다. 1530년에는 루터교의 표준 신앙고백서가 나왔다. 또한 뉘른베르크(Numberg)에서는 성 제발두스 교회와 성 로렌츠 교회의 설교자들이 종교개혁을 따랐다. 또한 루터의 친구인 벤체슬라우스 린크(Wenzelaus Link)의 복음적인 설교는 뉘른베르크의 종교개혁 진영에 크게 이바지했다. 

린크 다음으로 종교개혁을 크게 진척시킨 사람은 평신도 라자루스 슈펭글러(Lazarus Speegler, 1479-1534)이다. 그는 루터를 예찬하는 글과 이신칭의를 주제로 한 대중 찬송을 썼고, 개신교 대학 설립을 도왔다. 또한 신학자인 안드레아스 오지안더(Andreas Osiander)는 성 로렌츠 교회에서 로마의 적그리스도를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1524년 미사가 폐지되었다. 
 

▲ 함부르크 성 미가엘교회 옆에 있는 루터 동상 ©뉴스파워 김현배



제국의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타오르는 종교개혁의 불길 

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개혁은 이제 독일 제국의 국경을 넘어 전 유럽으로 크게 확산되었다.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은 결정적으로 가톨릭에서 단절되는 최초의 나라들이었다. 1520년부터 루터의 사상이 전파되었던 덴마크가 프로테스탄트 영역으로 들어온다. 1529년 크리스천 피터슨(Christian Peterson)이 신약성경을 덴마크어로 번역 출판했다. 또한 덴마크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을 채택하고 이듬해 슈말칼덴 동맹에 가입했다. 

스웨덴도 프로테스탄트 영역으로 들어오면서 복음 설교가 전파됐다. 비텐베르크에서 교육받은 울라프(Olaf)와 라르스 페트리(Lars Petri), 그리고 라르스 안테르쏜(Lars Andersson) 등은 루터주의를 전파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성경을 스웨덴어로 번역하여 출판하였다. 

핀란드도 자연스럽게 루터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핀란드의 개혁자인 마이클 아그리콜라(Michael Agricola)는 시편, 예언서들 중 일부와 신약을 핀란드어로 번역하였다. 이를 통해 핀란드어가 문학어로 발전하게 되었다. 

네덜란드에도 종교개혁의 영향이 크게 미쳤다. 네덜란드 영토였던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지역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으며, 1525년 5월, 네덜란드 의회가 복음의 순수한 선포를 공인하였다. 

스위스에도 이러한 확산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루터와 동 시대의 사람, 울리히 츠빙글리(Ulich Zwingli, 1484-1531)는 스위스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취리히에 있는 그로스민터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폭넓은 복음적 개혁운동을 주도해 나갔다. 이어 종교개혁은 계속해서 프랑스, 영국, 스코틀랜드, 오스트리아, 헝가리, 프로이센 등으로 순식간에 확산되었다. 

루터는 개신교 개혁의 물결을 확장시키고 뿌리를 내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칼빈의 영향도 컸다. 숨겨진 진리를 재발견한 루터, 한 사람의 영향력이 너무 컸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결국 중세를 문 닫게 하고 새로운 세계를 열기 시작했다. 그는 교회사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개혁과 부흥은 전염성이 강하다. 종교개혁의 진원지, 비텐베르크에서 지펴진 종교개혁의 부흥은 독일 동부와 북부와 남부 그리고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또한 종교개혁의 부흥의 불꽃은 유럽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종교 등 여러 분야에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제 종교개혁의 발상지 독일 베를린에서 조국교회를 바라본다. 정말 개혁이 필요한 때이다. 개혁을 위해 사도들이 붙잡았고 루터가 붙잡았던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붙잡아야 한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말씀 없이는 참된 개혁이 일어날 수 없다. 또한 부흥이 없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종교개혁의 부흥이 다시 조국교회와 유럽교회와 온 열방에 일어나야겠다.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에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부흥을 위해 다시금 말씀을 붙잡고 하나님께서 부어주시는 성령을 사모해야 한다. 부흥은 말씀과 성령으로 일어나게 된다. 다른 방법은 없다. 루터 시대처럼 종교개혁 운동이 불꽃처럼 타올라 확산되기를 갈망한다.
  

▲ 김현배 목사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는 현재 베를린 비전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그는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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