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하우스는 1508년부터 루터가 35년 이상 활동하고 생활하였던 장소이다. 이곳은 루터의 기도 방이요, 말씀 연구 방이요, 성령으로 충만한 방이다. 루터는 성경책에서 하나님의 의도를 캐내기 위해 씨름했다. 그는 묵상했고 연구했고 해석했고, 그렇게 알아낸 진리의 말씀을 성령의 능력으로 선명하게 선포했다.
또한 루터하우스는 루터가 복음을 재발견한 방이다. 그는 로마서를 연구하다가 로마서 1장 17절 말씀을 통해 칭의라는 복음의 빛을 받았다. 루터의 회심체험이다. 루터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하여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칭의를 깨닫게 되었다. 루터가 일생동안 하나님께 헌신하게 된 삶의 원동력이 되었던 그의 회심 체험은 다락의 수도사 방에서 일어났다.
이 건물은 1504년 프리드리히가 비텐베르크 대학과 관련하여 아우구스티누스파의 수도자를 위한 수도원이었다. 1522년 수도원이 해체되고 1525년 루터는 카타리나 폰 보라와 결혼하면서 이 건물을 선제후로부터 선물 받았다. 입구에는 ‘카타리나 문’이라고 불리는 특별한 아치형 문이 있으며, 하얀 외벽의 왼쪽에는 박사 모자를 쓴 루터가, 오른쪽에는 루터의 문장인 장미가 새겨져 있다. 종교개혁과 부흥을 위해 열정적인 사역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바로 루터하우스에서 나왔다.
루터 탄생 400주년인 1883년부터 루터하우스는 종교개혁사를 증언하는 세계최대의 박물관이 되었다. 전체 3층 건물로서 이곳에 루터의 1512-1545년 생애별로 1000여 점의 종교개혁 관련 원본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루터의 영성이 숨 쉬고 있는 흔적들은 수많은 방문객들에게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종교개혁의 신앙을 각성시켜 주고 있다. 또한 루터 하우스를 소개하는 팜플렛이 한국어로 번역되어 있어 한국 방문객들이 유익하게 사용하고 있다.
1층에는 이신칭의를 깨달았던 루터 회심의 탑 체험 장소, 현자 프리드리히의 초상화, 그리스도의 십자가, 면죄부 함, 면죄부, 시 교회에 있던 루터의 설교단, 루터의 95개 논제, 수도원 식당, 십계명 화판 등이 있다.
특별히 루터 사상에 영향을 받은 루카스 크라나흐의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종교개혁의 발단이 된 비성경적인 면죄부와 당시 행위를 강조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원관을 뒤집어 업는 것이었다. 그림으로 종교개혁의 사상을 전한 크라나흐는 십자가의 죽음만이 죄인에게 주는 유일한 구원의 길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2층에는 교황청의 루터 파문 위협의 칙서, 보름스에 루터가 입고 갔던 수도복, 수사복에 박사모를 쓴 루터, 카알 5세 황제, 루터신약성경(9월의 성경), 비텐베르크시의 구제함(공동금고), 찬송가집, 시의원들에게 고함, 농민전쟁 당시의 무기들, 큰 강의실과 제후들의 그림, 루터와 카타리나 폰 보라, 막달레나, 루터의 방,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루터와 동시대인들의 인쇄물, 임종의 루터, 독일어 성경 등의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루터를 주제로 한 짧은 영화도 볼 수 있도록 했다.
이곳 2층은 박물관의 하이라이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목숨을 건 루터의 불꽃같은 사역의 현장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황청의 루터 파문 위협의 칙서를 불태워버렸던 루터,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두하여 황제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결코 철회하지 않은 루터의 용기 있는 모습,당대의 모든 논쟁과 회의에 참석하면서 대체로 지도자로서 신학자의 역할을 잘 감당했던 루터, 농민운동의 기구들, 루터와 카타리나의 초상화, 루터에게 큰 슬픔을 가져온 딸 막달레나, 그리고 탁상담화로 유명한 식탁과 긴 의자로 꾸며진 루터의 방이 큰 시선을 집중시킨다.
3층에는 루터가 공부했던 책들, 루터 저작들, 각종 필사본, 루터를 기념하는 메달, 주화, 등에 대한 자료가 있다. 또한 박물관 밖 지하에는 루터의 부인 카타리나의 당시 일상생활과 가족의 모습이 모형으로 재현되어 있다. 그녀는 부지런하고 생활력도 강했다. 루터 부부는 좋은 모델이 되고 있다. 필자는 종교개혁사 박물관을 여러 번 다니면서 불변하는 루터의 유산에 많은 감동과 도전을 받고 있다.
루터의 “탁상담화”-경건서적의 고전이 박물관에서 가장 집중을 하게 하는 것은 루터의 방이다. 바로 여기서 그 유명한 루터의 ‘탁상담화’가 나왔기 때문이다. 즉 루터가 식탁에서 나눈 대화이다.
루터의 방은 16세기 루터 생존 당시의 모습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수은유리로 만든 창문과 목재 벽, 자기로 만든 벽난로, 목재가구 등이 있다. 특히 큼직한 루터의 책상과 학생들을 위하여 벽 둘레를 온통 긴 의자로 장식한 구조가 인상적이다.
당시 루터의 집에는 자기 가족뿐만 아니라 공부하러 온 신학생들이 머물고 있었다. 또한 비텐베르크 동료들과 개혁자들, 신학자들, 제후들, 귀족들 등 많은 외부의 인사들도 방문 했다. 그 넓은 집에 모든 방이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기도 했다. 루터를 만나 조언과 위로를 얻기 위해서이다.
루터는 그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루터가 앉아있는 식탁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이런 저런 질문을 했다. 그들은 루터의 답변을 자신들의 공책에 적기도 하였다. 부인 카타리나는 그들에게도 ‘수강료’를 받으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식탁에서 신학생들뿐만 아니라 루터는 필립 멜란히톤,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겐, 요한 포스터, 카스파르 크루치거 같은 다양한 신학자들과 신앙과 교리 문제에 관해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루터의 방은 신학생들이나 개혁자들 모두 개인적인 생각을 나누는 핵심 장소가 되었다.
루터는 활기 넘치는 음성으로 다양한 지식과 위로, 조언, 예언, 훈계, 교훈 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루터는 대화 때마다 라틴어와 독일어를 함께 사용했는데 라틴어를 더 많이 했다고 한다. 손님들은 식탁에서 루터가 해주는 말을 ‘식탁의 양념’이라고 불렀다. 이때 제자들이 한 쪽 구석에서 루터가 했던 말들을 정신없이 받아써서 기록으로 남겼다. 사소한 발언조차 놓치지 않고 꼼꼼히 기록했다.
이렇게 루터의 말을 정성껏 남긴 기록으로 남긴 사람들은 가운데 파이트 디트리히와 라우터바흐, 마테지우스의 기록이 여러 번의 편집을 거쳐 한데 취합되었다. 그 어록들을 모아 출판한 책이 유명한 “탁상담화(Tischreden, Martin Luther's Table-Talk)”이다.
‘탁상담화’는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야기를 주제별로 정리한 책이다. 신학자 루터가 마지막으로 남긴 담화이다. 특히 루터 곁에서 많은 시간을 동고동락한 요한 아우리파버의 편집으로 1566년 ‘탁상담화’의 첫 독일어 판이 출판되었다. 이렇게 해서 출판된 ‘탁상담화’는 곧바로 여러 나라말로도 번역되었다. 한국 크리스찬 다이제스트에서는 마르틴 루터의 “탁상담화”라는 제목으로 2005년에 번역 출간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 세상의 본질, 우상숭배, 예수 그리스도, 성령, 죄, 자유의지, 요리문답, 율법과 복음, 의롭다 함(칭의), 기도, 세례, 성찬, 교회, 출교, 설교자와 설교, 적그리스도, 연옥, 공의회들, 교부들, 족장들과 선지자들, 그리스도의 사도들, 천사들, 마귀와 그의 일, 시험과 환난, 루터의 대적들, 범죄, 그리스도인의 삶, 결혼과 독신, 제후들과 권력자들, 불화, 질병과 그 원인, 죽음, 부활, 알레고리, 성직록, 정당방위, 법률가들, 대학교와 학예, 천문학과 점성술, 지식인들, 유대인들, 터키인들, 나라들과 도시들, 직업과 소명, 다양한 주제”들에 관하여 말하였다.
다양한 주제 가운데 하나의 예를 들면 식탁에서 루터는 ‘설교자와 설교에 관하여’ 말했다.
“설교자가 청중을 불필요하게 괴롭게 하거나 길고 지루한 설교로 붙들어 두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말씀 듣는 일의 즐거움을 앗아가 버리면 결국 그 해가 설교자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루터의 ‘탁상담화’, p.266-267)좋은 설교자가 되려면 다음과 같은 능력과 덕목을 갖추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 말씀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둘째, 기지(機智)가 있어야 합니다. 셋째, 언변이 뛰어나야 합니다. 넷째, 음성이 좋아야 합니다. 다섯째, 기억력이 좋아야 합니다. 여섯째, 맺고 끊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일곱째, 교리를 확실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여덟째, 하나님 말씀을 위하여 생명과 재산과 명예를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아홉째, 모든 사람의 조롱과 비방을 받을 각오가 있어야 합니다." (루터의 ‘탁상담화’, p.268-269)
이처럼 ‘탁상담화’에서 루터의 신앙과 신학, 인격, 사고방식, 말투, 습관, 성향과 삶을 잘 알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와 기독교 교리를 분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또한 그는 로마 교황과 가톨릭교회의 부패상과 그 원인들을 정확히 파악하여 지적하였다.
루터의 ‘탁상담화’에 힘입어 독일에서 시작된 종교개혁의 불길은 이웃 영국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들에도 불길처럼 번져나갔다. 하지만 이 불길은 교황의 권력에 엄청난 타격을 주게 되었다. 당시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루터의 ‘탁상담화’ 책을 모두 수거하여 소각할 것을 명령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평범하면서도 다양한 내용은 500년을 지나오는 동안 독일 개신교도들 뿐 만 아니라 다양한 교단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에 버금갈 정도로 많이 읽혀지고 있다. 독일교회가 지금 침체된 원인 중 하나는 은혜의 1세대가 다음세대에 복음 전하는 일에 실패했다고 한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독일교회를 반면삼아 종교개혁 1세대들이 붙잡았던 진리를 다시 붙잡아야 한다. 그리고 다음세대에 그 진리를 잘 가르쳐야 한다. 다음세대 사역이 중요한 것이다. 종교개혁 세대가 붙잡았던 중요한 진리들을 후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서 깨닫게 할 때 부흥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루터 탄생 500주년, 하지만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루터 박물관 2층에 의미심장한 그림이 하나 있다. 1983년, 루터 탄생 500주년이 되었다. 하지만 유럽종교개혁사의 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마르틴 루터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를 환영하지도 않는다. 그때 한쪽 구석에 있던 마귀가 그 광경을 보고서 루터를 비웃는 모습을 그린 내용이다. 필자는 이 그림이 오늘날 독일교회의 침체해져가는 영적 상황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왔다.
"내가 죽으면 귀신(ghost)이 되서도 추기경과 하나님이 없는 수도사들을 괴롭게 하여 살아있는 천명의 루터보다 죽은 한명의 루터가 더 괴롭다는 것을 알려줄 것이다.“
그림 속에 쓰여져 있는 위의 말은 루터가 생전에 살아서 했던 말이다. 즉 자기가 죽어서라도 하나님이 없는 추기경과 수도사들을 괴롭게 할 것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이 루터의 말을 비꼬아 죽은 루터를 더 이상 기억하지 않는 오늘날 모습을 더욱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김현배 목사는 베를린 비전교회, 총신대학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후, 영국 런던신학교와 웨일스 복음주의 신학대학교에서 청교도와 부흥에 대해 연구하였다. 총회세계선교회(GMS) 파송 독일 선교사이며, 베를린 비전교회 담임목사, 유럽성시화운동본부 상임회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영국 부흥의 주역들](CLC)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