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한 루터

편집인 0 2017.01.27 07:15


 

루터에 대한 납치극      

루터에 대한 제국 추방령이 담긴 황제의 칙령이 보름스에서 내려졌다. 교황과 황제로부터 독일 사회의 이단자로 찍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된 루터는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박탈당하여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즉 그 누구도 루터의 생명을 빼앗는다고 해도 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때 황제가 루터에게 발행해 준 안전 통행증의 시효 기간은 단 3주간이다. 이후에 루터는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를 정도로 상황은 매우 긴박해졌다.      

1521년 4월 18일, 보름스 의회에서 최종 심문 후 8일째 되던 날 4월 26일, 루터는 마차를 타고 서둘러 보름스 제국회의장을 떠났다. 그의 친구 슈르프(Schurf)와 그 도시에 입성할 때 함께한 몇몇 일행과 더불어 비텐베르크로 향했다. 이제 독일에서 숨을만한 곳은 없었다. 그러나 루터에게는 당시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비텐베르크의 선제후(Elector) 프리드리히가 있었다.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개혁자인 루터를 희생시킬 마음은 없었다. 그러므로 루터를 대중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 위해 신임하는 부하들을 시켜 납치극을 벌였다.      

5월 4일, 함께 한 일행들과 루터는 마차를 타고서 청소년 시기를 보냈던 아이제나흐(Eisenach) 마을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복면을 쓴 무장한 남자들이 숲 속에서 매복하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 루터의 마차를 에워쌌다. 마차에서 루터를 끌어내린 괴한들은 루터의 눈을 가리고 말에 태워 숲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괴한들은 루터를 납치하여 한 밤중이 되어서야 산 정상에 세워진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서 내려 주었다. 높은 산의 차가운 밤공기를 흠뻑 들이켰던 루터는 성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그런데 곧 이상한 소문이 독일 전역에 퍼져나갔다. 루터가 비텐베르크로 가던 도중에 괴한에 납치되어 행방물명 되었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감옥에 갇혀 비참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루터를 나무에 매달아 화형 시켰을 것이라고 했고, 또 다른 사람은 루터가 비밀리에 살해되어 죽었다는 소문도 나왔다. 아무도 루터의 생사를 알 수 없는 소문만 무성해져 갔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은둔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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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가 피신했던 바르트부르크 성, 현재 공사중이다.     © 뉴스파워

1521년 5월 4일, 루터는 우뚝 선 절벽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성채,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피신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머리와 얼굴에 턱수염을 기르면서 기사로 변장했고 그의 이름은 에르그 융커(Jarg Junker)로 바꾸었다. 그 성의 최고 책임자였던 한스 폰 베어렙쉬라는 사람만이 루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높은 곳에 위치한 고대의 마을 요새인 이 성에서 은밀하게 숨어 지내는 루터는 이러한 운둔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가족들과 친구들, 슈팔라틴, 멜란히톤에게 편지할 때 주소와 날짜 대신에 발신지를 “높은 성에 둘린 나의 밧모섬(계 1:9)에서, 광야로부터, 새들의 나라에서, 하늘이 열려있는 땅에서.”라고 표기했다.      

바르트부르크 성에서의 생활은 루터에게 결코 안락한 삶이 아니었다. 이야기하기를 좋아한 루터는 세상과 단절된 삶이 고독했고 우울했다. 가끔 무겁고 어두운 생각이 엄습하기도 했고 잠들지 못한 밤도 있었다. 그는 매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을 읽으면서 원어 성경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늘 가방에 라틴어 성경과 히브리어 성경을 지니고 다녔다. 헬라어 성경은 보름스에서 슈팔라틴이 보내주어 받았다. 또한 루터는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찬송으로 여겨 즐겼고, 산책과 토론, 신학적 사색, 연구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는 가톨릭교회의 면죄부와 미사 교리 등을 비판하는 글을 썼으며, 시간 나는 대로 편지와 소책자를 썼다. 그리고 루터는 시편 주석을 꾸준히 저술했고, 마리아 수태고지에 관한 책을 완성했으며, 그 외 기독교인의 삶을 갱신할 목적으로 여러 권의 책들을 완성해갔다.      

그의 강제적인 칩거 생활은 1521년 5월 4일 부터 1522년 3월 1일 까지 약 10개월이었다. 이 기간은 루터의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며, 독일 전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개혁에 힘을 증대시켜 주었다. 그에게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으로 확신 있게 다가왔다.     

루터의 신약 성경 번역     

10개월 간의 비텐베르크 성에서 루터가 저술한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업적은 독일어 신약 성경 번역이었다. 그는 헬라어 신약성경을 3개월 만에 독일어로 번역했다. 3월 1일, 루터가 바르트부르크 성을 떠나는 날, 신약 성경 번역은 완성되었다. 그 후 비텐베르크에서 자신의 친한 친구요 탁월한 헬라어 학자인 멜란히톤의 도움을 받았다. 드디어 비텐베르크의 인쇄업자를 통해 1522년 9월 21일에 "독일어 신약성경"을 출판되어 배포되었다. 이 성경은 “9월 성경(September Bible)” 또는 “루터의 성경(Luther Bibel)”으로 불린다.      

루터가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것은 한마디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다시 선포한 것이다. 당시 일반인이나 평신도들이 성경을 갖는 일은 꿈도 꾸지 못하던 시대였다. 겨우 미사 때에 사제들에 의해 읽혀지는 몇몇 구절들만을 들 수 있을 뿐이었으며, 그것도 알아들을 수 없는 라틴어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루터는 성경을 일반 신자들이 교회와 학교와 가정에서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제 평신도들도 말씀의 빛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도 자국어인 독일어로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들을 수도 있게 되었다. 신자들에게는 훨씬 더 분명하고 귀중한 책이 되었다.     

인쇄업자들은 루터의 신약 성경을 마구잡이로 찍어 보급했다. 많은 일반인들이 성경을 구하여 열정적으로 공부했으며, 어떤 사람은 가슴에 품고 다녔다. 이제 교황의 허가나 간섭 없이 누구나 성경을 펼쳐서 읽을 수 있게 되면서부터 짙은 어두움에 휩싸여있던 기독교 세계 전체가 확 달라지게 된 것이다. 말씀 뿐 아니라 사람의 말들까지 독점적으로 통제하고 있던 성직자 계급 엘리트의 특권이 사라졌다. 그가 교황의 교서와 교회법 문서들을 불태운 것만큼이나 혁명적인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의 결과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다. 흠정역 성경이 영국에 미친 것과 버금갈 정도로 독일어와 독일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종교개혁에 강력한 도움을 주었다. 루터의 역본은 독일의 최초의 고전이다. 문학 작품이 되었다. 이 성경은 독일 기독교인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독일 문학사와 언어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루터 생애 최대의 업적 중의 하나는 신약성경 번역이었다. 루터는 에르푸르트대학교 시절에 자신을 “성경 박사”라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믿었고, 성령의 감동이 있었으며, 복음에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잘 하였고, 독일어를 완벽하게 구사했다. 이처럼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한 루터는 원문과 자국어에 대해서도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였다. 루터는 성경 번역자로서 탁월했다. 그는 위대한 성경번역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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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르틴 루터가 성경을 번역했던 방     © 뉴스파워
     
마귀와 싸운 경험담 - “루터가 마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은 신약성경을 번역한 일”     

루터에게서 마귀와의 싸움은 결코 새로운 현상은 아니었다. 본래부터 루터의 삶의 일부였다. 사실 루터는 마귀와 여러 번 직접 대면했다. 마귀의 존재가 자신의 존재만큼 분명했기 때문이다. 루터의 신앙 체험과 신학에 마귀는 늘 부각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항상 강력한 어두움의 영들과의 종교개혁적인 투쟁 속에 자신이 던져져 있다고 보았다. 신학적이든, 교회적이든, 정치적이든 복음의 진리를 거스리는 모든 저항을 마귀의 역사라고 보았다.     

특히 중세의 미신들 속에서 자랐던 루터는 그 외에도 자신 속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의심들, 악한 생각, 대적 자들의 무서운 협박들로 인해 영적 싸움을 치열하게 했다. 또한 루터는 육체의 병 역사, 마귀의 역사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그가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마귀의 작당을 정기적으로 경험했다.      

특별히 비텐베르크 성에서의 은둔생활 중에 있는 루터는 밤중에 종종 사탄이 나타난 것을 목격했다. 그는 악마가 검은 개와 검은 박쥐와 올빼미의 형상으로 나타난 적도 있었고, 악마의 시끄러운 소리를 들었다고도 했다. 루터는 사탄을 향해 아주 저속한 말로 이겨낼 수 있다고 말했다. 어느날 신약성경을 번역할 때 루터는 마귀가 나타났다고 해서 잉크병을 던졌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현재 비텐베르크 성 안에 있는 루터의 방(Lutherstube)에 가 보면 벽이 일부 파였는데, 그곳이 잉크 자국이 있었던 곳이라고 말한다. 물론 나중에 생긴 전설이라고 한다. 어떤 학자는 잉크 얼룩 이야기 자체가 별로 신빙성이 없다고 한다. 분명한 사실은 루터가 신약성경을 번역한 것이 마귀에게 가장 큰 타격을 주었던 것임에 틀림없다.      

루터는 마귀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아무런 실제적인 힘도 발휘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는 마귀와 벌이는 전투를 주제로 다음과 같은 찬송을 지었다.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2절 가사에는 “내 힘만 의지할 때는 패 할 수 밖에 없도다 힘 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 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또 3절 가사를 보면 “이 땅에 마귀 들끊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나라 영원하리라.” 아멘.     

루터는 “만일 내가 나의 경험들을 성경 속에서 찾아낼 수 없다면, 그것들은 주님이 아니라 마귀에게서 온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어떠한 피조물도 마귀를 이길 수 없다고 말한다. 루터는 악마의 유혹에 기도로 맞서 싸웠다. 지금도 마귀는 믿는 자들의 삶 속에서 다양한 싸움을 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과 주님 보혈의 십자가 앞에서 도망치며, 특히 기도를 매우 싫어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승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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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에서 내려다 본 마을     © 뉴스파워
  
비텐베르크에서의 종교개혁 -“칼슈타트와 루터의 견해 차이”     

루터가 비텐베르크에 없는 동안 루터는 멜란히톤이 개혁운동을 주도해 주기를 기대하였다. 하지만 그의 소심함 때문에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인 안드레아스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가 영향력 있는 인물로 등장하였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개혁을 이끌기 시작했다. 칼슈타트 교수는 사람들과 함께 급진적 종교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설교와 집필을 통해서 미사와 성체 숭배, 독신제도와 수사의 독신 서약, 수도원 제도 자체를 비판했다. 교회에서 모든 형상들을 제거하였으며, 고해성사를 반대하며 성찬식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정기 미사 드릴 때 사제들이 입는 복장 대신 평상복을 입고 미사를 집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사제가 떡을 회중의 입에 넣어주는 대신 회중 각자가 자신의 손으로 직접 떡과 잔을 받도록 했다. 칼슈타트의 영향으로 인해 사람들은 비텐베르크 교구 교회에 있는 성인들의 화상이나 성상, 제단, 그림, 깃발 등의 제거를 결의했다. 이 모든 것들을 우상숭배로 여긴 그들은 철거하기 시작했다.      

칼슈타트는 예배에서 외면적인 개혁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칭의론과 복음의 영성을 저해하는 새로운 율법주의를 소개했다. 루터를 따를 것인가? 칼 슈타트를 따를 것인가? 그래서 작은 읍 비텐베르크는 많은 혼란을 빚었다. 평신도 신분인 비텐베르크 선제후는 신학적, 교회적 문제들이기에 개입을 꺼려했다.      

비텐베르크의 심각한 상황에 대해 보고받은 루터는 1522년 3월 6일, 체포될 위험을 무릎 쓰고 비텐베르크에 황급히 달려왔다. 그는 곧바로 그 다음 주일, 사순절의 첫 번째 주일부터 설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물론 칼슈타트가 이미 언급했던 성체 숭배, 수도원 제도, 성인과 성물 숭배, 미사제도, 그 밖의 여러 미신적 의식들의 반대와 변화에 대해서는 루터도 수긍을 하지만, 칼슈타트의 급진적 개혁에는 반대했다. 루터는 사태의 본질에 대해서는 강경했지만 대적들에 대한 아량은 많았다. 불친절한 단어는 그의 입술에서 새어나오지 않았으며, 태도는 유순했다. 지금까지 루터는 설교와 글을 써서 교황들에 맞서 싸웠으나 폭력이나 소란을 일으킨 적이 없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설득하고 권하고 선포하는 일만 했다. 왜냐하면 믿음은 자발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칼슈타트와 몇몇 극단적인 개혁가들은 비텐베르크를 떠났다.     

비텐베르크로 귀향한 루터는 설교사역을 통해 교회 개혁에 집중했다. 그는 사람들을 죄로부터 행방시키고 그들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만드는 복음의 중심성을 강조했다. 루터의 설교를 듣고 많은 주민들이 다시 진리의 길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는 비텐베르크의 질서를 회복했으며, 1523년부터 1526년까지 점진적으로 교회의 예배와 예배의식의 개혁을 문서화하였다. 루터는 정말 탁월한 설교자였고 위대한 설교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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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텐베르크 성교회     ©뉴스파워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GMS 독일 선교사,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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