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지도자 고당 조만식
고당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는 금년 봄 어느 날이었다. 시내에 볼 일이 있어 나갔다가 중구 저동에 위치한 <고당 기념관>을 발견하고 그곳에 들어가면서부터다. 그때 기념관 담당자에게 한 권의 책을 선물로 받았는데, 그것이 계기가 되어 고당을 읽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고당은 나와 같은 조씨 성을 가진지라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그를 만나게 되었던 것 같다. 우리는 고당에 대해선 많은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가 남긴 정신적 유산에 대해선 별로 신통하게 여기지 아니하고, 그저 살아가는 것 같아 아쉽다. 나 역시 그렇게 살아왔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의 인격의 고매함과 민족사랑 정신을 배우게 된다. 고당은 오로지 나라와 민족을 사랑했던 인물이었으며, 동시에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되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고당 조만식(1883-?)은 1883년 2월 1일, 창녕 조(曺)씨 부친 조경학과 모친 경주 김씨 김경건 사이에서 평남 강서군 반석면 반일리 안골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무학산 기슭에 자리한 안골은 강서읍에서 서쪽으로 좀 떨어진 농촌이었다. 이곳에 조씨 집성촌이 있었는데, 일가가 50호 밖에 없었고, 살림살이도 빈궁한 편이었다. 그러나 부친 조경학 가세는 벼 100섬 정도 하는 비교적 풍족한 편이었다. 강서지방 사람들은 군수가 운동회에 참석하여 단발을 적극 장려할 정도로 일찍 개화에 눈을 떴다. 만식은 어린 시절 가정교육이 엄격하였다. 아버지 조경학은 학식과 덕행을 겸비한 전형적인 선비풍이었으며, 아들을 교육할 때는 인자하면서도 근엄하였으니 이런 아버지의 성격을 만식이 닮았던 것이다.
남아 15세면 호패를 찬다고 하듯이 만석은 13세 어른이 되었다. 1895년 당시 풍습에 따라 부모가 시키는 대로 한 여인, 박씨와 결혼을 하면서 한문공부를 그만두고 15세에 장사꾼으로 변신하였다. 그는 평양 종로에 백목전을 차리고 소년 상점주가 되었다. 국내에서 생산된 무명과 베를 전문으로 내다 팔았다. 이는 부친이 일찍 상업에 눈 뜨라고 직접 차려 준 게다. 이러한 때에 첫 번째 아이가 정신박약으로 태어나고, 두 살 연상인 첫 번째 배필, 박씨가 2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다. 만식은 젊은 나이에 배우자를 잃은 슬픔을 당하고, 1902년 두 번째 매필, 안주 태생인 이씨(이의식 여사, 1935년 12월 18일 소천)와 재혼을 한다. 이씨는 좀 가냘파 보였지만, 지혜로운 여인이었다. 만식은 단란한 가정을 꾸미고, 장녀 선부, 장남 연명, 차녀 선희, 차남 연창을 두었다. 만식의 사업은 23세까지 지속하였다. 처음에는 포목상만 열었으나 나중에는 지물포까지 확대해 나갔다. 그는 장사를 하면서 한때 술독에 빠져 지낸 적이 있었다. 이때 시절을 이렇게 회고한다.
“연일 술을 그렇게 마셔대니, 혹 내 몸이 상할까봐 어머니가 어찌나 염려를 하였는지
몰라요. 그때 받은 어머니의 사랑이 일생을 두고 골수에 사무칠 정도로 깊었오,”
그러나 그의 인생의 변화는 숭실학교를 입학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이때 기독교에 귀의하여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하였다. 만식은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숭실학교에 입학하게 되는데,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고당은 친구들을 불러 밤새도록 술을 마시자고 하였다. 그것은 과거에 대한 청산이요, 고별인사였다. 술독이 바닥이 날 무렵, 고당은 이렇게 선언한다.
“오늘까지만 과거의 조당손이고 내일부터는 조만식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이것이 고당의 마지막 술자리였다. 그리고 그는 숭실학교 교장을 찾아갔다. 그리고 무조건 입학시켜 달라고 졸랐다. 교장은 기가 막혀서 왜 공부하려고 하는가라고 물자. 고당은 “하나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교장은 고당의 입학을 허락하였으며, 입학과 동시에 고당은 환골탈태했다. 그리고 일생동안 금주를 실천하였다. 그가 숭실학교에 입학한 때는 그의 나이 23세.
고당은 한 번 결심하면 변함없이 지키는 사람이었다. 처음에는 기초학습이 전혀 안 되어 그는 예비과 무등반(초등학교 5,6학년 수준)에 들어가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 걸리는 과정을 월반하여 2년 만에 마치고 졸업을 하였다. 그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 숭실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6월, 일본 도쿄로 유학길에 오른다. 그는 나라의 앞날을 생각하며 조국의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무엇보다 실력을 배양할 필요가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도쿄의 세이소쿠 영어학교에 입학하여 영어는 물론 수학을 공부하고, 1910년 4월, 메이지 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2년간의 유학을 마쳤다. 그리고 고국으로 돌아왔다.
1913년 메이지 대학을 졸업할 때, 고당의 나이는 31세, 본래 그는 미국 유학의 꿈을 꾸었으나 뜻한 바가 있어 접고 귀국의 길을 택했다. 그리고 평양에 돌아와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게 된다. 오산학교는 1907년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학교로서 민족지도자들을 양성하는 학교였다. 그리고 2년 후에 이 학교의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고당은 봉급을 받지 않고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교장이요, 선생이요, 사감이요, 교목이요, 사환이었다. 1인 5역을 감당한 셈이다. 그의 모습은 항상 비슷하였으니 머리를 짧게 깎아 버렸고, 무명두루마기 옷차림에 말총모자를 쓰고 갓신을 신었다. 고당의 평생머리는 짧게 했는데, 인도의 간디와 흡사하였다. 일본제품은 거의 사용치 않고 당시 일본제인 비누, 치약대신 소금, 팥가루를 사용하였다. 그리고 교장이었지만, 권위를 앞세우지 않고 학생들과 함께 조깅을 하면서 장작을 패고 실천을 보여 주었다. 당시 학생이었던 한경직 목사의 회고 글을 보면,
“한 번은 기숙사에서 공부하다가 크게 하품을 한 적이 있는데, 마침 방마다 돌아보시던
고당 선생이 그 소리를 듣고 들어오셨습니다. 지금 하품을 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기에 나는 ‘접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때 고당은 한 방에 혼자 지내는 것도 아닌데 하품을 크게 하면 다른 학생들의 공부에 방해가 될 수 있으니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고당은 3.1운동 직전, 1919년 오산학교 교장을 사임하였다. 그 후 3.1운동을 치룬 후 상하이로 망명해서 독립운동을 국제적으로 펼 계획을 세웠다. 그러므로 그는 3.1운동의 33인에서 제외되었으며, 이 일을 남강과 상의한 것이었다. 즉 고당은 제2선에서 활동하기 위함이었다. 서울에서의 3.1운동은 종로 태화관에서 일어났지만, 평양에서는 장대현교회 옆 숭덕학교와 남산현교회의 뜰이었다. 이때 장로교 대표는 길선주였고, 감리교 대표는 신홍식이었다. 평양시위는 남강이 직접 지휘하였다. 이 집회에 마포삼열 선교사가 직접 참여하여 독립시위를 전세계에 알리게 하였는데, 장대현 집회와 남산현 집회를 주도한 인물들은 점거 투옥되었다. 고당 역시 검거되어 4월부터 옥살이를 시작하여 10월에 출옥하였다.
출옥한 고당은 문화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투옥 전에 품었던 해외에서의 독립운동은 접었고, 대신 민족의식을 계몽하는 비폭력저항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25년 오산학교의 교장으로 초청을 받아 다시 교장이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이때 그의 나이 44세. 그는 청년교사로 오산학교에 부임한 이래 15년 동안 청장년기의 모든 정열을 쏟아 부었는데, 이제는 육영사업을 마감하고 교단을 떠나야 했다. 그리고 1927년부터 그는 더 적극적으로 정치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고당은 1927년 민족단일전선 신간회를 창립하여 신간회 중앙위원 겸 평양지회장으로 피선, 1930년 국민체력 육성을 위해 관서체육회를 평양에서 창립하여 회장이 되었고, 1936년 평양에서 을지문덕 장군 묘수보회 창립하여 회장으로 피선되었고, 1945년 조선건국 평남준비위원회 창립하여 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그해 11월 3일, 조선민주당 창당하여 당수로 활약하였다.
고당이 사회적 분야에서 활동한 분야는 YMCA이다. 그는 1921년 3월 21일, 산정현교회 김봉은 장로와 함께 평양 YMCA를 창립, 총무로서 11년 동안 무보수로 섬기었다. 그리고 1926년 백선행으로부터 당시 20만원을 기부 받아 평양 중심가에 500평의 대지를 구입, 사서 기념관을 건립하였고, 이 기념관은 평양 대중들이 모이는 장소로 활용되었다. 1931년에는 김인정이 희사한 기금으로 최초의 사립도서관인 인정도서관을 설립하였다. 그는 또한 기독교 단체를 중심으로 농촌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일제의 항거하는 농촌진흥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당은 경제분야에서는 산정현교회 중심으로 물산장려운동을 펼쳐 국산품 애용하는 운동을 펼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기금을 마련, 근검저축 식산조합을 설립하였다.
산정현교회는 민족지도자들을 배출한 교회로 유명하다. 도산 안창호, 남강 이승훈도 이 교회와 깊은 인연을 가진다. 1930년대 일제는 창씨 개명을 강요할 때이다. 고당은 다른 장로 4인(오윤선, 박정익, 유계준, 정재윤), 청년 집사 4인(한원준, 김승기, 김경진, 김성식)과 함께 창씨 개명을 거절하였다. 이때는 정주 오산학교 출신이며 신사참배를 철저하게 거부했던 주기철 목사가 부임하여 목회할 때인데, 죽음을 각오한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고당은 교회 장로로서도 모범적인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는 언제나 예배시간에는 맨 앞좌석에 앉아 예배를 드리곤 하였다. 교회의 최고 의결기관인 당회에 참석할 때도 별로 말씀을 안 하시고 그저 앉아만 계셨다. 간혹 발언할 기회가 있으면 그의 인격의 감화와 위력에 당회는 일치단결하여 바른 결정을 내리도록 주도하였다. 그런 당회의 후원을 받아 교계의 거성인 강규찬, 신학자 박형룡, 송창근, 순교자 주기철이 배출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그의 세 번째 부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고당은 1935년 12월, 이의식 여사와 사별하고 삶의 외로움 가운데 있었을 때, 고당을 가까이 돕던 배민수, 박학전 목사의 중매로 당시 개성 호수돈여학교 교사로 있었던 전선애 여사와 결혼을 하였다. 전 여사는 참 지혜로운 여인으로서 고당의 일을 도왔다. 가정의 살림을 알아서 해 주었고, 자녀들을 건강하게 키웠으며, 고당이 신경 쓰지 않고 나라 일을 하도록 내조하였다. 그러다가 남북문제가 심상치 않자 전 여사는 아이들을 데리고 월남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곳은 고당도 찬성한 일이다. 왜냐하면 북한에 남아 있으면 반동으로 모두 숙청을 당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반동의 자식들은 초등학교 이상 교육을 시키지 않는다는 정책이 있었다. 전 여사는 마지막으로 고당과 만나는 자리에서 고당은 이런 말을 남겼다.
“여기서 눈 뜬 장님을 만드느니 위험이 따르겠지만 애들을 서울로 데려다 공부를 시키는 것이 좋겠어요.”
고당은 평남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나라 건국을 준비하였고, 공산당이 들어왔을 때는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설립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이때 소련군정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이 고당을 수차례 찾아와 회유하기도 하였다. 김일성의 말을 인용하면,
“고당 선생님을 지지하는 대중을 조직화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선생님이 정당을 조직하시면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이것은 소련당국의 희망이기도 합니다.”
당연히 고당은 소련의 신탁통치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소련군 수뇌부는 고당을 끈임 없이 회유하였지만, 그는 모든 공포와 시련 압박을 견디었다. 결국 그는 반동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중에 그의 숙소인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1946년 1월 5일, 조선민주당 청년당원들은 그 속에서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고당을 구출하고자 하였지만, 고당은 “북한 동포를 이대로 두고 나 혼자 어디로 가겠나.”라면서 그 곳에 남아있었으니, 이후의 고당의 행적에 대해서 아는 이들은 아무도 없다. 다만 당시 신문보도와 소문에 의하면 1950년 6.35전쟁이 발발하고, 유엔군의 개입으로 퇴각하면서 김일성은 감옥에 있는 정치범들을 모두 처단하라고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고당은 아마도 그때 민족을 위한 하나님의 종으로 자신의 생명을 초개와 같이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리라.
1991년 11월 5일, 고당의 두발을 동작동 국립묘지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하였다. 고당은 죽어서도 민족의 독립과 발전을 보고자 하는 염원이 강했다. 그래서 해방 전에 이런 말을 되풀이 하였다. “조선이 독립되기 전에 내가 죽으면 비석에 두 눈을 그려서 한 눈으로는 일본이 망하는 것을 보고 또 다른 눈으로는 내 조국이 독립하는 것을 보게 해 달라.” 고당은 실로 하나님이 이 민족 가운데 보내신 거룩한 지도자임이 틀림없다. 그는 일제 강점기와 남북 이념전쟁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한 시대에 지도자로 세워졌던 분이시다. 고당은 먼저,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하였다.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장로로서 그 책임을 다했고, 둘째는 민족을 위해 문화와 정치 분야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충실하게 담당하였다. 누가 그를 가리켜 비겁한 정치인이라 말할 수 있을까? 지금 이 시대는 바로 충직한 지도자가 필요한 시대가 아닌지 반문해 본다.
민족이 풍전등화와 같이
위험한 때에
모세와 같은 인물, 고당을
보내셨으니 감사하여라.
장사꾼 같은 소인배들과
다르고
물질에 눈 어두운 협작꾼
아니었으니, 고당은
민족 사랑과 백성 사랑하는
민족지도자더라
시대는 변해도 지도자는
변해서는 안 될 것이니
우리 시대를 이끌고 나갈
고당 같은 지도자를 염원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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