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선구자들" 23 - 재물의 선한 청지기, 유일한

조경현 0 2018.03.07 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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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의 선한 청지기, 유일한

 

기독교는 자신을 위한 삶을 가르치지 않고 남을 위해 살라는 교훈을 준다. 예수님 역시 전인류의 구원을 위한 십자가의 삶을 친히 사셨고, 결국에는 희생적 죽음을 맞이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모두 이타적인 삶, 희생적 삶, 남을 위한 삶을 살아야가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일한은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한 획을 그은 선구자임이 틀림없다. 필자는 그런 유일한이 베푼 교육의 현장에서 한때 공부했던 추억이 있으며, 그런 연유로 여기에 그를 수록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으로 볼 때, 이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 교훈할 수 있는 삶을 몸으로 직접 사셨던 분이시다. 우리는 그의 행적을 모두 말 할 수는 없지만, 그의 삶의 일부분을 살피면서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의 책임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이 시대에 주의 손에 들려진 몽당연필로 쓰임 받는 재물의 청지기가 되길 간절히 기대하는 것이다.

 

유일한은 이 땅에 청일전쟁이 한창이던 1895115, 아버지 유기연과 어머니 김기복의 사이에서 9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평양에서 태어났고, 9세에 미국으로 떠나기 바로 전까지는 주로 평양 종로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자라고 성장한 곳은 조선왕조로부터 소외를 받았던 서북부지역이었다. 하지만 그곳 사람들의 기질은 매우 진취적이고 도전적이어서 새로운 문화, 문명을 갈망하는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아버지 유기연은 본래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부모를 잃고 고아로 자라 개척정신이 투철하였다. 더군다나 평양은 미국 선교사들이 주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때라 유일한 가족들은 자연스럽게 복음을 받아 들였고, 아버지 유기연은 마포삼열 선교사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았다. 그렇게 하여 정착한 곳이 바로 평양이었으니 유일한의 기질은 아버지를 닮아 개척자적인 자세로 충일하였다.

 

유기연은 장사에도 남다른 소질이 있어 당시 잡화점, 비단장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장사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싱거(Singer) 미싱 평양 대리점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유일한의 어린 시절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유일한은 부친에 대해서는 엄격한 추억을 가지고 있지만, 모친에 대해선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어머니의 영향이 깊었다. 그가 아버지의 권유로 유학을 가기 전까지 특별한 교육을 받진 않았고, 단지 서당을 다니지 않았을까 하는 추정을 할 따름이다. 유일한이 미국으로 유학 가는 이야기는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인생의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아버지 유기연은 당시 서양의 문화, 문물을 접하면서 개화에 관심이 많았다. 당시 이승만, 정순만, 박용만 등 개화파는 서양문물을 받아 들여야 한다는 주장을 하였다. 이에 유기연은 자신의 아들, 유일한을 미국으로 보낼 결정을 하였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도움이 켜던 것을 알 수 있다. 유일한 여동생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아버님은 모험심이 많으신 분이었어요. 스스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었기 때문에 큰 오빠

도 선교사가 되길 바랬어요. 그래서 미국에서 온 마포삼열이라는 선교사의 도움으로 미국유학을 하게 되었지요.”

 

유일한은 19049세에 미국 네브라스카 커니(Kearney) 아주 작은 농촌도시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6년 미시간주 앤 아버에 있는 미시간대학 상과에 입학 하였다. 대학시절 그는 미식축구를 하면서 지도력과 인간관계 훈련을 거쳐, 1919년에 졸업하였다. 1922년 미국에서 쑥주 나물 사업(라초이 회사)을 운영, 이때 그의 나이가 27세였다. 그러다가 1925년 의사인 중국인 호미리와 결혼을 하여 새로운 가정을 일구었다. 그리고 1926년 부인과 함께 한국에 입국하였다. 그녀는 처음에는 서대문 부근에서 진료소를 차리고 환자들을 돌보았으며, 후에는 보건계통의 사회봉사에도 참여하기도 하였다. 결혼 4년 후, 유일한은 첫째 재라를 얻었고, 6년이 지난 후에는 아들 일선을 얻었다. 그의 가정은 행복하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국제결혼으로 인한 안락한 가정적 분위기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유일한의 행적에 대해 좀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때 그는 애국과 애족에 대한 사상을 직접 배우고 체득했기 때문이다. 1919413,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가 열렸는데, 이때 유일한은 미시간대학 졸업반이었고, 이 대회에 지도자급 인사는 서재필, 이승만, 장덕수, 김도연, 이대위, 정한경 등이었다. 이 대회의 의장은 서재필이었고, 이 대회에서 채택한 결의문은 주로 학생들이 작성하였다. 이때 유일한은 직접 참여 하여 리더십을 발휘하였다. 이 대회 참석은 유일한에게 새로운 사상적 전기를 마련해 주었다. 특히 서재필은 유일한에게 사상적 도전을 주기도 하였다. 그는 크고 작은 일에 대해서 모두 서 박사에게 가서 의논하고 조언을 받기도 하였다. 1926년 유일한이 영구 귀국할 때, 서재필은 그에게 <버들표 목각품>을 선물했는데, 이것은 후에 유한양행의 심벌이 되었다. 따라서 유일한에게 결정적인 사상적 영향을 미친 분은 다름 아닌 한국 최초의 의사였던 서재필임을 알 수 있다.

 

유일한은 어느 날, 자신의 조국인 한국에 귀국하길 결심하게 된다. 그가 미국에서의 모든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이유는 1925년 일시적으로 한국에 입국했다가 조국의 암울한 현실을 보고, 특히 의학계의 비참한 상황이었다. 철마다 찾아오는 돌림병, 난무하는 돌팔이 의사들과 각종 기생충, 결핵, 학질, 피부병 환자 등. 이런 현실을 보고 미국에 돌아간 유일한은 에비슨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 상과 강의를 맡아 달라는 것과 부인 호미라 여사는 세브란스 병원의 소아과 과장을 제의 받았다. 이것이 귀국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였다. 그러나 그는 사업을 시작하기로 마음을 먹고 제약회사 설립에 착수하여 19261210, 종로2가 덕원빌딩에 유한양행을 창립하였다. 이때부터 유일한의 기업철학이 나타난다. 그의 말을 들어보면,

 

기업은 한두 사람의 손에 의해서 발전되지 않는다. 여러 사람의 두되가 참여함으로서 비로소 발전되는 것이다. 그리고 기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은 기업 활동을 통한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다.”

 

이렇게 설립된 유한양행은 비약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1936620일에는 주식회사 유한양행으로 발족되었고, 1940년에는 봉천 출장소를 만주유한공사로 승격시켜 만주와 중국에 10여개의 공사, 지점, 사무소, 출장소, 주재소를 설치하여 급속한 확장을 이룩하였다. 1937년부터 1941년까지 제약허가 33, 상표등록 59건 등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활발한 기업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506.25 전쟁으로 그동안 일궈온 기업은 하루아침에 폐허가 되었다. 하지만 낙심치 않고 1953727, 휴전이 된 후에 유한양행은 다시 재건하기 시작, 1958년 증자를 통해 설비의 복구, 확장, 그리고 새로운 시설의 도입에 따른 운영 자금 조달을 주 목적으로 한 것으로서 4150만환에 이르렀고, 1959년에는 34백 만환으로서 급증하였다. 1960년대에는 의약품계에도 경쟁적이었다. 하지만 알약 23, 물약 6, 주사약 12, 고약 4, 항생물질 10, 농약, 가축용약 16종 등, 71종에 달하는 의약품을 생산함으로 계속 성장하였다.

 

유한양행이 점점 성장하고, 안정적이 되자 유일한은 교육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1954년 그는 사재를 털어 재단법인 <고려공과기술학원>을 설립, 이 학원이 1960년에는 학국직업학원으로 바뀌었다.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 2년 후엔 <유한중학교>를 각각 설립하였다. 그의 육영사업은 기업이윤의 사회 환원과 맥을 같이하는데, 그가 죽기 이전에 이미 유한양행의 주식 40% 이상을 교육기관에 기증됐고, 나머지는 <한국사회 및 교육신탁기금>에 넘겨졌다. 유한공업고등학교는 처음부터 장학생들을 모집하여 학생들이 우수하였다. 이 제도는 1회부터 11회 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는데, 1974년 고교 평준화가 되면서 지역별로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하지만, 197711회 졸업생이 졸업할 때까지 수업료 완전해택을 본 학생수는 1,679명이다. 유일한은 청지기적 삶을 몸소 실천해 보인 것이다. 유일한의 신앙에 대한 조카의 증언을 들어 보면,

 

백부님께서는 교회에 나가시지는 않았지만 혼자 있을 때 종종 미군 라디오 방송에 나오는 빌리 그레함 목사의 설교를 듣곤 했어요. 그분은 유한양행을 자신의 소유물로 여기지 않고 그것은 하나님의 재산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재산을 관리할 의무만을 가지고 계실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유일한의 삶을 표현한다면 첫째, 기업은 사람이 만든다는 것이다. 그는 19261210, 유한양행을 창립한 이래 폭넓게 상품을 취급한다는 의미에서 <유한양행>이라 하였다. 따라서 유한양행은 약품뿐만 아니라 화장지, 생리대, 락스, 아이보리 비누, 치약 등 다양한 상품을 취급하였다. 심지어 껌, 초콜릿, 아이스크림까지 수입, 판매하면서 회사를 확장해 나갔다. 그리고 19531, 유한양행은 시설확장을 위해 증자가 필요하였는데, 이때 400만주를 총자본금으로 확장하였다. 회사의 자본은 계속 증가되었고, 1963년에는 주주의 수도 459명으로 늘어났다. 또한 유한양행은 종업원지주제도를 채택하여 사원의 경영참여의식을 높이기도 하였다. 유한양행의 이런 행보는 후에 삼양사, 해운공사, 해동화재, 남한제지 등에 영향을 미쳤다.

 

한편, 유일한은 사회봉사에도 관심이 있어 유한재단을 설립하였다. 유한재단은 교육지원과 함께 장학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유일한은 본 재단 설립이전부터 성적이 우수한 대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하였고, 1952년부터는 고려공과학원을 설립, 1964년에는 유한공업고등학교를 비롯한 유한중학교를 설립, 운영하였다. 유일한 박사가 별세할 때, 소유주식이 14만주가 인수되었는데, 유한중고교 재단인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신탁기금은 96만주 가운데 23723(24%)를 소유한 유한양행의 최대주주가 되었다. 그는 96282주를 유한중고교 재단에 기증, 연세대 재단에 41천주, 유한공고에 4만주, 유한양행 사우공제회에 27218, 보건장학회에 17368주를 각각 기증하였다. 그는 참으로 기증의 달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직계가족인 아들 유일선에게 자립할 것을 강조, 한 푼의 유산도 상속치 않았다. 다만 딸 유재라에게만 유한중고교 안에 있는 자신의 묘지 5천 평을 주어 유한동산을 가꾸어 줄 것을 당부하였고, 손녀 일링에게는 학자금 1만 달러를 물려주었을 뿐이다.

 

기증의 달인, 유일한 박사는 1971311, 향년 76세로 영면하였다. 그는 그의 말년 10년 전부터 자신의 사업보다는 교육과 공익사업에 더욱 심혈을 기울였다. 그가 남긴 유언은 다음과 같다.

1. 손녀 유일링에게는 대학까지의 학자금으로 1만 달러를 준다.

2. 딸 유재라에게는 유한공고 안에 있는 묘소와 주변 땅 5천 평을 물려준다.

3. 자신 소유 유한양행 주식 14941주는 한국사회 및 교육원조 신탁기금에 기증한다.

 

재산처분에 대한 내용은 이것이 전부이다. 유한양행 부사장까지 지낸 아들 유일선에게는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것은 대학까지 가르쳤으니 독립적으로 살라는 의미였고, 또 부인에게는 딸 재라에게 노후 복리를 위해 도와주라고만 했을 뿐이고, 딸 재라에게 땅을 물려준 것은 상속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탁이었는데, 그는 죽어서라도 학생들이 학원에서 뛰어 노는 것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사회문제 가운데 하나는 물질에 대한 과욕이다. 그런데 유일한은 개인돈과 회사돈을 철저하게 구분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사소한 액수라도 회사돈엔 절대 손을 되지 않았다. 회장으로서 당연히 쓸 수 있는 돈도 개인돈으로 지출하였다. 어쩌다 회사돈을 쓰고 남으면 반드시 경리부에 반납하였다. 이런 유명한 일화가 있다. 유한양행에서 사장까지 지냈던 이건웅씨가 독립해서 사업을 하다가 실패하여 어려움 가운데 있었을 때, 아들 등록금을 못 낼 형편이었다. 이를 안 회사 간부는 사장에게 보고하고 사장은 유 회장에게 도와주자고 건의했는데, 유 회장은 펄쩍 뛰며 화를 냈다. “유한양행이 자선사업하는 곳이냐. 어려운 사람들 다 도와주면 회사는 어떻게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개인 계좌에서 돈을 꺼내 조용히 도와주게 했다는 것이다.

 

유일한 박사는 실로 한국개화기에 개화된 아버지의 영향으로 도미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의 손에 다듬어져 미개한 한국에 귀국하여 근대화하는데 이바지한 시대에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가 한국에 최초로 제약회사를 세우고, 후에 육영사업과 공익사업에 진력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에 고스란히 환원하고 후손들에게는 그 정신만 무려준 것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하며,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것은 첫째는 그가 받은 기독교정신의 영향이었으며, 동시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세상은 어찌하든 많이 모아라, 후회 없이 즐겨라고 가르치지만, 주님의 자녀들은 정직하게 모아 후회 없이 주를 위해 사용할 것을 가르친다. 지금도 그가 남긴 이 말이 나의 귀에 쟁쟁하다.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 남기는 그 무엇이다.” 

 

 

구세의 약관에 거대한 나라,

미국을 향해 태평양을 건넌

소년 유일한.

그는 외소한 동양인으로서

외로움 고독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하기 위해 그리도 애를

썼으니

그곳에 함께 하신 주님 그를

붙잡아 주셨으리라

입신양명하여 고국에 돌아와

최초의 제약회사, 유한양행

창립하여 민족과 동포들 위해

사회로부터 얻은 재물은

사회로 환원하라는 기업철학

세웠으니

결국, 말년에 재물 모두 사회

환원한 것, 우리에게 참 귀한

가르침이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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