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아우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편집인 0 2017.02.11 09:24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서명한 성당     ©뉴스파워 김현배


1529년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는 종교개혁을 더 이상 확대하는 것을 금했다. 또한 보름스 칙령이 법률적으로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결정에 대해 개신교 측의 항의가 거세어졌다. 슈파이어 의회 결과로 인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개신교인 루터파는 서로 분리되어 가고 있었다. 동시에 터키 군대는 오스트리아 빈 까지 쳐 들어와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기독교 세계인 양측의 화해와 타협이 절실함을 보여 준 것이다. 1530년에 황제 칼 5세(Karl V. 1500-1558)는 1521년 이후 9년 만에 처음으로 독일로 돌아왔다. 그는 독일 제국 내부의 로마 가톨릭 교회와 개신교의 일치를 도모하여 종교적 통일을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1530년 4월, 황제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 제국의회를 개최한다고 공시했다. 이것이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회의다. 이 의회에서 로마 가톨릭측은 황제에게 교회의 통일성에 반역하여 항의하고 있는 개신교 루터주의 무리들이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오도록 요구하였다. 반면에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그들의 문제가 편견 없이 공정하게 취급될 것을 요청하였다. 
 
이때 황제는 개신교 영주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변호하고 정당화시킬 수 있는 신앙고백을 제시할 것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의회에 어떤 점에서 로마 가톨릭교회와 차이가 있는지를 지적하는 문서를 정리하여 제출해야 했다. 작센의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 1세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발표할 간략한 신앙고백서를 작성하기 위해 루터파 독일 신학자들인 유스투스 요나스, 요하네스 부겐하겐, 필립 멜란히톤을 불러 모았다. 선제후는 그들에게 신앙 고백서를 작성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루터는 자기에게 내려진 황제의 금지령으로 인해 아우구스부르크 회의에 참석할 수 없었지만 가까운 코부르크(Cobourg)에 머물러 있으면서 많은 방문객을 영접하고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특히 스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쳐(Martin Bucer, 1491-1551)가 멀리서 와서 루터와 츠빙글리를 화해시키려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당시에 루터는 시편 말씀을 묵상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으며, 멜란히톤과 다른 복음주의적인 인사들에게 편지를 띄워 강하고 담대하게 버티도록 격려하였다. 
  

▲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작성한 멜란히톤     ©뉴스파워 김현배

 
1530년,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필립 멜란히톤(Philipp Melaneheton 1497~1560)은 루터 신학을 집약하여 28개 조항으로 정리하였다. 이것이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이다. 라틴어와 독일어로 작성한 이 신앙고백서의 내용은 기독교 신앙과 기본 교리로서 루터파의 기본적 신앙을 진술하고 있다. 주요 내용은 “원죄, 하나님, 이신칭의, 교회란 무엇인가, 성경의 권위, 교회의 직분, 성찬식, 세례, 성직자들의 독신제도 반대, 수도원적 맹세를 폐지하는 것” 등 이다. 멜란히톤은 기본적으로 이신칭의의 원칙과 입장에 서 있었다. 그것은 공적인 행위보다 믿음을 강조하였고 루터주의의 복음적 신앙을 표현하였다. 
 
그리고 멜란히톤은 교회의 통일을 염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신앙고백서에 로마가톨릭교를 따르는 사람들을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은 가급적 피하고, 가톨릭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에 중점을 두었다. 그는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와의 신념과도 일치한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다. ‘미사’라는 용어는 계속 사용했는데 그 이유는 익숙한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확실한 교육 효과를 얻고자 꾀했던 것이다. 또한 멜란히톤은 교황수위권의 문제, 성자숭배, 연옥설, 화체설, 만인제사장설 등의 논쟁거리가 되는 문제는 삭제하였다. 즉 교황의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이 모두 생략되어 있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일부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멜란히톤이 작성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에는 개혁 신앙 항목들이 열거되어 있었고, 인쇄된 신앙고백서에는 종교개혁의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1530년 6월 25일, 제후들은 루터파의 신앙 성명서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Confessio Augustana)를 황제 칼 5세에게 제출했다. 
 
루터는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반기며 기뻐했다. 루터가 말하기를 나 자신은 멜란히톤처럼 이렇게 부드럽고 조용하게 글을 전개할 수 없다고 격려했다. 대부분 제국의 루터파 제후들과 도시들도 이 신앙고백서에 서명했다. 작센의 선제후 요한, 헤센의 필립, 브란덴부르크의 게오르그, 뤼네부르크의 에르네스트, 안할트의 볼프강, 로이틀링겐의 시장과 시의회 등이다. 반면에 츠빙글리의 전통을 따르는 스위스 사람들과 스트라스부르크 지방 사람들은 서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별개의 문서로 썼다.
 

▲ 아우구스부르크 성당     ©뉴스파워 김현배

 
개신교 진영은 신앙고백서가 제국의회 앞에서 낭독되는 것을 원했다. 또한 독일어로 낭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개신교측은 칼 5세와 영주들이 모인 제국의회에서 2시간 동안 자신들의 신학적 입장을 밝힌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를 낭독하였다. 하지만 황제 및 다수파를 차지하던 가톨릭은 이 신앙고백서를 거부하였다. 이 문서가 황제에게는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했다. 황제는 즉시 가톨릭 신학자들에게 반박 문서를 준비하게 했다. 
 
독일의 가톨릭 신학자 요한 에크(Johann Eck)는 반박문을 작성하여 크게 읽었다. 황제는 가톨릭 신학자들의 논박을 승인하였고 이 반박 문서를 따르라고 요구했다. 그는 프로테스탄트들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반박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라고 요구했고, 제후들에게는 루터주의에서 빠져나와 가톨릭교회와의 연합 속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였다. 하지만 제후들은 루터주의에 대한 확신 때문에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루터만큼 제후들의 신앙 용기 또한 대단하였다. 개신교 신학자들도 가톨릭 신학자들의 주장에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황제는 루터파의 신앙고백을 받아주었다. 제후들이 끝까지 용감히 맞섰다. 그들은 제후들을 막지 못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 사건은 종교자유의 길을 열어주었다. 기독교 세계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중요성 
 
루터파의 역사에서 볼 때 1530년은 매우 중요한 해였다. 1530년 6월 25일,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가 칼 5세 황제 및 제국의회 앞에서 울려 퍼졌는데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기념일이다. 이 날은 개신교 진영인 루터교의 역사에서 비텐베르크의 종교개혁 기념일인 1517년 10월 31일 다음으로 뜻 깊은 날이 된 것이다. 
 
제국의회에서 낭독한 이 신앙고백은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서 면죄부 판매에 대해서 항의한 이래 동료들과 함께 13년 동안 투쟁하며 지켜온 신앙의 주요 조항들이다. 그들의 신앙을 분명하고 자세하고 체계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루터파는 이 고백서를 바탕으로 자신들이 오직 초대교회의 신앙 위에 서 있음을 고백하면서 중세 로마 가톨릭은 부패하고 오염된 신앙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혔다. 이 신앙고백은 루터파의 신앙을 밝히는 고전적 선언서이며, 루터교의 주요 교리 표준 문서가 되었다. 오늘날도 루터파 교회에서는 다 이 신앙을 지키고 있다. 
 
역사적인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중요성이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주고 있다. 먼저 마침내 종교개혁이 승리를 거두는 순간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고백서는 다른 복음적인 기독교 신경들의 토대가 될 정도로 프로테스탄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개신교 신앙고백서들 가운데 가장 먼저 발표되었고 가장 유명하다. 
 
그 이후 1536년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바젤에 모여 작성한 [제 1스위스 신앙고백서], 1566년 불링거(Heinrich Bullinger)에 의해 작성된 [제 2스위스 신앙고백서], 1563년에 영국국교회가 작성한 [39개조 신앙고백], 1618년 네덜란드 개혁교회의 설교자였던 기도 데 브레(Guido de Bres)의 주도로 작성한 [벨직 신앙고백]과 개혁파 신앙고백으로서 런던에서 열린 웨스트민스터 회의가 맺은 열매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1646년에 작성되었다. 
 
그리고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서의 영적 교훈은 오늘날 교회로 하여금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은 종교개혁의 선물로 신앙고백서와 신조, 그리고 교리를 주셨다.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는 많은 신앙고백서가 작성되었다. 신앙고백에 담긴 진술인 신앙고백서는 기독교 교리를 가장 종합적이고도 간결하게 요약하고 정리한 문서로서 기본적인 교리 문답의 자료가 된다. 
  

▲ 루터가 머물렀던 성     ©뉴스파워 김현배



사실상 성경을 제외하고는 교회에서 사용되는 신앙고백서와 신조만큼 한 페이지에 성경적 진리를 많이 담고 있는 문서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또한 신앙고백은 교파의 특색을 구별 짓는다. 즉 기독교 신앙의 한 형태를 기독교 신앙의 또 다른 형태와 구별한다. 그리스도인에게 참된 신앙에 대한 기준은 신앙고백서와 신조이다.
 
하지만 오늘날 성경적 신앙고백과 신조가 교회에게 버림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지금 현대교회는 그 어느 때 보다 더 이단이 난무하고 비성경적이며 신비주의 영성이 가득한 시대를 지나고 있다. 만일 교회가 견고한 신앙고백과 신조를 무시하고 잃게 되면 무서운 이단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을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은 반드시 신앙고백서와 신조를 공부해야 한다. 교회 안에 많은 성경공부 프로그램이 있지만 교회사 속에서 검증되어온 신앙고백서를 공부함은 필수적이며,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신앙고백서와 신조, 교리공부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영국 교회사에서 일어났던 부흥을 연구해 보면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철저하게 신앙고백과 신조, 교리를 가르칠 때였음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17세기 청교도 목회자 리처드 박스터가 키더민스터에서 목회할 때 교인들에게 철저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때 키더민스터에 놀라운 부흥이 일어났다. 교리가 가득한 신앙고백과 신조가 회복되어야 교회가 살게 된다. 
 
 
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비전교회, GMS 독일선교사,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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