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감리교의 대부, 아펜젤러
원두우가 한국 장로교의 초석을 놓은 분이라면, 한국 감리교의 초석을 놓은 분은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이다. ‘은둔의 나라, 한국’이라는 책을 지은 그리피스는 아펜젤러에 관하여 이렇게 표현했다. “한국의 아펜젤러는 조선을 기독교화하는 데 있어 초석과 같은 존재였다. ... (중략) 그는 여행가로서, 탐험가로서, 교사로서, 조직가로서, 복음 전도자로서, 그리고 성서 번역가로서 다방면에서 활동하였지만, 그의 성품은 언제나 한결 같이 부드러웠다." 그를 관찰하면서 놀라운 것은 첫째는 개척자적인 정신과 신앙을 가지고 한국에서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을 설립하여 주의 복음을 전한 것이요, 둘째는 1902년 목포를 향해 항해하면서 군산 앞바다에서 사고로 배가 전복 되었을 때, 자신보다도 이웃을 향한 이타적인 행동이다. 그는 비록 44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지만, 여전히 한국 감리교회 대부로서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아펜젤러는 1858년 2월 6일, 미국 펜실베니아주 서더톤(Souderton)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선조들이 독일계 미국인이기에 개혁교회에 출석하면서 신앙생활을 하였지만 유아세례는 받지 않았고, 그는 14세에 서더튼 부근 임마누엘 개혁교회에서 물로 물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웨스트체스터 주립대학 재학시절인 18세에 중생체험을 하였으며, 다시 프랭클린 마샬대학에 입학하였는데, 재학 당시 열렬한 신앙생활을 위해 감리교로 이적하였고,이때 그는 이런 말을 하였다고 게일은 자신의 소설 속에서 언급하였다.
“나는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장로교에서는 그렇게 외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마음껏 소리칠 수 없는 감리교로 옮겼습니다.”
졸업 후에는 드류신학교를 1884년에 졸업하고, 그해 12월 17일, 엘라 닷지와 결혼하고 1885년 2월 2일, 파울러 감독에게 목사안수를 받고, 3일에 미국을 떠나 그해 1885년 4월 5일, 제물포에 도착하기 전, 일본 나가사키에서 3월 31일에 떠나 가장 먼저 한국 부산항에 도착했다. 그때가 4월 2일 아침이었다. 그때 아펜젤러의 부산의 형편을 이렇게 적고 있다.
“땅은 마치 경작된 것처럼 매우 비옥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무관심과 절대 나태가 이 나라의 빈곤과 불행의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아펜젤러는 부산에서 잠시 머문 다음에 부산을 출발, 제물포로 향했다. 그때의 날씨는 비가오고, 흐리고, 항해하기에는 별로 좋지 않은 날씨였다. 하지만 심한 배 멀미에도 불구하고 항해를 하여 그달 5일 오후 3시에 제물포항에 도착하였다. 물론 언더우드와 함께 말이다. 이때 제물포항의 첫인상을 이렇게 적고 있다. “백 명이나 되는 더럽고 누더기를 걸치고 모자도 안 쓴 인부들이 배에 있는 화물을 향해 덤벼들었고 계속 야단법석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고함을 지른다.” 아펜젤러가 한국 땅에 입국했을 때, 정치상황은 불안하였다.
그가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드류신학교 시절, 기숙사 동료였던 와드워스(J. S. Wadworth)를 통해서다. 그는 자신이 친구인 아펜젤러에게 그리피스가 저술한 <은둔의 나라>를 보여주자 여기에 감명을 받고 한국선교를 결심하게 되었다.이는 주의 영이 그에게 감동 하신 것이다.
1882년 임오군란(민비정권이 붕괴 대원군이 정권장악, 이때 민비의 수구파는 청나라에 군대요청, 이때 3,000명이 조선이 파병)에 이어 1884년 갑신정변(김옥균을 중심으로 급진개화파가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 그러나 개화파 정권은 3일 만에 막을 내림)으로 인해 한국은 무척 어수선하고 불안정하였다. 외국의 군대가 경성에 주둔. 일본, 청, 러시아의 패권을 다투고 있었던 때. 이러한 때에 아펜젤러가 입국하여 사역을 시작하였으니 목숨을 건 모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냐면 누구도 이들을 지켜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은 이런 기도를 드렸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부활절에 이곳에 도착했다(백낙준 박사는 부활절 아침이라고 했지만, 실은 오후 3시경이다). 오늘 사망의 빗장을 산산이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주께서 이 나라 백성들이 얽매여 있는 굴레를 끊으사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는 빛과 자유를 허락해 주옵소서!”
그가 내한 하여 이룬 업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교육과 출판, 교회설립과 성경번역, 연합사역, 독립운동지원 등 헤아릴 수 없다. 특히 배재학당은 고종의 윤허를 얻어 1885년 8월 3일에 한국의 최초의 근대교육기관으로서 당시 서당을 중심으로 하는 한문교육에서 탈피해 서구의 학문과 지식을 전수할 교육기관으로서 대단한 역할을 하였다. 이 학교를 거쳐 간 유명한 인물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위시하여 소설가 나도향, 국어학자 주시경, 시인 김소월, 독립운동가 지청천 등이 있다. 당시 배재학당은 영어로 수업을 하였으며,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지름길이었다. 사실 배재학당 초기에는 아펜젤러의 작은 방에서 세 학생을 대상으로 매일 한 시간씩 영어를 가르쳤다. 학생들은 점차 늘어났고, 그러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지는 못했다. 배재학당이 정식으로 학교인가 난 때는 1886년 6월 8일이며, 1887년 2월 21일, 고종은 학교이름을 <培材학당>이라 지어 하사하였으니 이는 인재를 키우라는 의미이다. 아펜젤러는 이 학교의 목적은 통역관이나 학교의 일꾼을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의 교육을 받은 사람을 내보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정동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1887년 10월 9일, 지금의 정동교회 전신인 벨엘교회당을 세우고, 본격적인 전도사업을 전개하였다. 물론 배재학당을 세워 학생들과 함께 예배도 드리고 세례도 베풀었으나 한국인을 위한 교회는 정식교회는 아니었다. 한국에 도착한 선교사들은 1885년 6월 28일 알렌 선교사 부부, 헤론 선교사 부부, 그리고 스크랜톤 대부인 등이 모여 첫 주일예배를 드렸다. 그 후 7월에 서울에 도착한 아펜젤러 부부, 원우두가 이에 가담하여 서울연합교회를 창립(창립예배는 11월 3일)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 11일 주일에는 한국에서 개신교 첫 번째 성만찬예식이 거행되었다. 아펜젤러의 기록을 보면,
“지난 주 일요일, 11일 우리는 기도와 간증 모임에서 성찬식을 거행하였습니다. 내가 알기로는 이것이 개신교에 의해 거행된 한국 최초의 성찬식이었습니다. ...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제가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었습니다. 참석한 인원은 11명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외국인을 위한 교회였기에 한국인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였다. 그리하여 1887년 9월 예배당을 위한 한옥 한 채를 구입, 10월 9일, 벧엘에서 첫 예배를 드림으로 이것이 정동감리교회의 첫 예배이며, 창립교회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벧엘교회는 교인수가 증가되므로 새로운 예배당을 필요로 하였다. 1888년 5월 벧엘예배당이 폐쇄되고 오늘날의 예배당이 1897년 10월 3일에 입당하였다. 나는 언젠가 그가 설립한 정동에 있는 ‘정동감리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세운 교회이다. 물론 몇 번의 폭격과 화재 등으로 개축하긴 했으나 감격적이었다. 교회를 둘러보면서 마치 그가 그곳에 함께 있는 듯 그의 숨결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물론 그가 한국에 입국하여 병원, 학교, 교회설립 등 수많은 사역을 감당하였다. 그러나 그의 나이 44세, 1902년 6월 11일, 목포, 성경번역위원회 모임으로 가는 항해 중 군산 앞바다(대청도 부근) 배가 전복되어 순교 당했지만, 그의 사역의 족적은 결코 잊혀 지지 않을 것이리라.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을 텐데. 왜 하나님은 그렇게 젊은 나이에 그를 천국으로 인도해야만 했을까? 이 사고사건을 좀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1902년 6월, 아펜젤러 일행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위원회 모임을 향해 제물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출발하였다. 6월 11일 밤, 목포를 향하는 증기선 쿠마가와 마루는 군산 앞바다에서 안개로 인한 시야가 흐려 마주 오는 기소가와호와 충돌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배 안에는 그의 번역 조사 조한규와 여학생 한 명도 동승하였다. 그리고 광산기술자 한 명, 2-3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충돌한 배는 곧 침몰하기 시작하였고, 아펜젤러는 갑판 위로 올라가 바다를 바라보니 자신과 동승했던 조사 조한규와 여학생을 구하기 위해 바다로 뛰어 들었다. 이는 아펜젤러의 이타적인 삶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에 온지 17년 만에 하나님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의 죽음은 당시 한국에서는 물론 미국에서도 대서특필되어 함께 애도의 시간을 가졌다. 정말 아까운 인재가 이 땅에서 사라진 것이다. 1885년 4월, 그가 한국에 언더우드와 함께 입국하여 17년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천국으로 돌아갔지만, 그의 한국에서의 사역은 역사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우리에게 귀감이 된다.
원두우가 한국장로교회의 대표자라면, 아펜젤러는 한국감리교회를 대표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한국 땅을 밟았으니 이보다 더 영광스런 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개척자는 늘 외롭고 모험을 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우리 하나님은 그런 기질의 사람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 사용하시는 것이다. 아펜젤러는 개척자였다. 정동감리교회와 배재학당을 세우고, 성경 번역일을 하였으며, 다양한 사역을 위해 모험하였다. 개척자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두 번째로 그는 조직가였다. 대한기독교서회를 비롯해서 엡윗청년회 조직, 죠선크리스토인회보 창간, 등 다양한 사역을 조직하여 실행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는 이타적인 사람이었다. 마지막 군산 앞바다 선박충돌 사고 당시에도 그는 자신의 조사인 조한규와 여학생을 구조하기 위해 물속에 뛰어 들므로 참변을 당했던 것이다. 이는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의 검붉은 눈동자,
늘 한 영혼 구원을 위하여
노심초사하였다.
시퍼런 바닷물 속에 허우적
거리는 이들 보는 순간,
뛰어 들어 살리려 했는데
그만 힘이 부족하여 그 육신
가라앉고 말았으니 아깝다.
좀 더 심장 박동 소리 듣길
원했는데 하나님의 뜻은
바로 거기까지였는가.
비록 44세 젊은 나이지만,
최선을 다해 주님의 대사로
지상에서의 사명 다 마치고
천국으로 옮겼으니 장하도다.
당신이여, 이제 우릴 위해
천국에서 주님과 함께
기도하며 응원하고 있으니
감사하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