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선구자들" 3 -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 무디

조경현 0 2017.02.05 10:09

젊은이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 무디

 

18867월 매사추세츠 헐몬산에서 한 달 동안 성경 컨퍼런스로 모였을 때, 무디(Dwight L. Moody, 1837-1899)가 주강사였으며, 수많은 학생들이 은혜를 받고, 해외선교에 도전을 받았다. 이때 86개 대학에서 250명의 학생들이 참석하여 100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로 나가길 지원하였다. 이들을 마운트 헐몬의 100이라 부른다. 물론 이때 피어선 박사(A. T. Pierson)의 강력한 해외선교 도전 메시지가 있었지만 무디의 역할을 간과할 수 없다. 즉 무디는 젊은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지피고, 피어선은 결단할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셈이다. 사실 이 모임은 무디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YMCA의 파생그룹으로 대학연합회를 이끈 루터 위샤드(Luther Wishard)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무디가 주강사로 초청되어 왔으며, 이렇게 위샤드와 무디, 피어선 같은 인물을 통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게다.

 

하나님의 역사는 종종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 방법을 통해 진행되어 가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무디다. 그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무지 주의 손에 쓰임을 받을 조건이 없었다. 그의 나이 4세에 아버지를 잃었고, 학력이라곤 고작 5년 이어서 영어를 구사하는 것도 부족하였고, 외모 또한 볼품없이 보였으며,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것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남이 가지지 못한 한 가지가 있었으니, 그것은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 바로 그것이었다. 그는 19세기 전환기에 있어 주의 복음을 위하여 가장 효과적으로 쓰임 받았던 인물임이 틀림없다. 필자는 한국교회사를 공부하면서 그런 그의 영향과 흔적을 떨쳐 버릴 수 없어 가장 먼저 무디를 소개하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는 직, 간접적으로 한국교회와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사실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은 적어도 그의 부흥권 안에 있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한국에 입국한 이들이 많았다.

 

187325, 드와이트 리먼은 매사추세츠 노스필드에 6번째 가운데 5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무디의 아버지, 에드윈은 사업 파산으로 알콜에 의존하여 살았다. 결국 무디의 나이 4세에 아버지는 소천하였고, 어머니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라났다. 비록 살림은 넉넉하지 못했지만, 그의 어머니는 독실한 유니테리안파 교인으로서 자녀들을 신앙적으로 키웠다. 무디는 다른 형제들과 함께 5세에 세례를 받았지만, 교회생활은 따분하고 지루하고 심지어는 지긋지긋 까지 하였다. 아마도 즉흥적이고 변화를 좋아하는 무디의 기질 상 맞지 않은 듯하다. 소년 무디는 17세 되던 해, 18543월에 노스필드를 떠나 당시 화려한 도시였던 보스톤으로 나갔다. 그곳에 신발가게를 하던 아저씨, 사무엘 홀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거기서 일하면서 마운트 버논 교회에 출석하였다. 무디는 미래의 성공을 위한 야망을 가지고 보스톤으로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아저씨는 무디를 가게 점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한 가지 조건을 내세웠는데, 그것은 바로 그 교회에 나가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역사에 우연은 없음을 실감한다. 바로 그 가게에서 만난 킴볼 선생님을 통해 무디가 회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당시 마운트 버논 교회의 담임목사님은 커크(Edward Kirk)였는데, 그를 통해 복음설교를 듣기 시작하였다. 무디는 설교를 들을 때마다 목사님이 자신의 마음을 훔쳐본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이러한 때에 주일학교 선생이었던 킴볼은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학생들을 심방하기로 결정하고, 무디가 일하는 점포를 방문하였다. 킴볼 선생은 점포로 들어가기 전에 많은 갈등이 있었지만, 용기를 갖고 무디를 만나 이렇게 질문하였다. “예수가 우리를 사랑하며, 예수가 우리에게 사랑받기를 원합니다.”라고. 이 질문은 무디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결정적인 것이 되었다. 이때가 그의 나이 18, 1855421일이었다. 무디는 이날을 자신의 회심일로 말한다.

 

이때부터 무디의 삶은 평범하면서도 비범하게 전환되었다. 초대교회의 어거스틴이 386년 로마의 한 마을에서 만났던 예수님을 통해 그의 방탕한 삶이 완전히 변화되어 거룩한 구도자가 된 것처럼, 무디의 삶은 점차로 변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는 말하길,

 

예수를 영접하기 전에는 십자가를 향하여 일했으며, 그 후에는 십자가로부터 일했습니다. 그때는 구원을 받기 위해 일했으나 지금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일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회심을 경험한다고 해서 세상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변하는 것이리라. 무디는 회심 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내가 회심한 그날 아침, 밖으로 나가서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땅에 비치는 밝은 햇빛을 그토록 사랑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새들이 달콤한 노래로 지저귀고 있는 순간 이 새들이 그토록 사랑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이것은 무디의 마음가운데 일어난 부흥이었다.

 

무디는 이제 젊은 청년으로 자랐다. 무디의 외모는 키 1미터 70센티, 그의 어깨는 넓고 경사가 졌으며, 눈은 부드럽고 회색이었으며, 머리숱은 많고 검은 갈색이며, 근육이 있고 힘이 가했다. 킴볼 선생이 말하는 무디는 온화하고 친근감을 주는 인상이라고 하였다. 무디는 이제 보스톤을 떠날 때가 되었다. 그리고 1856915, 시카고로 가는 기차표를 5달러를 주고 구입, 매사추세츠 피츠버그에서 3일 반을 여행하여 시카고로 옮겨왔다. 그가 시카고로 옮긴 이유는 자신의 야망과 꿈을 이루기 위해서, 많은 돈을 벌기 위함이었다. 우리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까지도 사용하셔서 당신의 꿈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가 시카고에 도착하여 나간 교회는 플리머스에 있는 회중교회였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로 주일학교를 성장시키기 시작하였다. 심령에 부흥이 일어난 무디는 1858, 술집에서 주일학교를 열어 도시에서 방황하고 불우한 가난한 아이들을 초청하여 빈좌석을 가득 채웠다. 이때부터 그의 부흥사역이 본격적으로 출발되었다.

 

1860년에 무디는 주의 복음 사역을 위하여 자신의 사업을 그만두고, 어린이들을 위한 주일학교와 YMCA를 운영하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그가 목사안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저 선생으로 불리는 것을 원했다. 물론 당시 미국에 프린스톤과 같은 유명한 신학교들이 있었지만, 아마도 자신의 학력이나 배경을 고려하여 독자적인 전도자로 사역하길 원했을 것이다. 사역을 진행하면서 무디는 1862년 영국 태생 유그노 에마 레벨과 결혼하였다. 그녀는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겸손한 여인이었으며, 교양과 센스가 있는 보배로운 배우자였다. 그녀는 무디가 복음사역을 하는 동안 잔일에 신경을 쓰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내조하였다. 그가 주의 사역을 위하여 위대하게 일할 수 있는 중요한 이유가운데 하나를 꼽으라면 아마도 좋은 어머니와 지혜로운 아내를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무디는 총회 여름성경학교 컨퍼런스가 마치고 학생들을 집으로 초청하였을 때, 이런 말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남자가 가질 수 있는 가장 큰 복은 좋은 어머니와 좋은 아내입니다.”

 

무디 사역은 1870년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닌 젊은 일꾼, 샌키를 만남으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무디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설교와 샌키의 찬양은 강력한 호소력으로 사람들의 영혼을 흡입하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복음사역을 위한 환상적인 커플이었다. 이들은 18736, 영국의 리버플에 도착하여 집회를 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집회성공은 1874년 스코틀랜드에서 일어났다. 그들의 영향력으로 다른 군소도시에서 잇달아 집회를 열었고, 회심자들은 지역 교회로 연결, 목회적 양육을 받게 하였다. 영국 전도집회는 18753월부터 7월까지 런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가난한 자나 부자 모두 집회에 참석하여 수 천 명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되었다. 무디는 당시 30대 후반으로서 널따란 가슴, 짧은 목, 검은 구랫나루, 회색의 눈을 지닌 얼굴로 볼품이 없었지만, 더구나 문법도 틀리는 영어를 구사하였다. 그러나 그는 먼 곳을 볼 수 있는 건강한 시야와 확성기 없이도 12,000명이 들을 수 있는 음성과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마음이 그에게 큰 자산이었다. 그의 설교를 듣는 이들은 바로 그것을 통해 감동과 감화를 받았다. 무디와 샌키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에서 약 285차례 집회를 가졌다.

 

미국에서의 첫 번째 집회는 187511월 브루클린을 비롯해서 필라, 뉴욕, 시카고, 보스톤 등지에서 대형집회를 개최하였다. 집회는 오후에 성경공부, 저녁에는 부흥집회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전형적인 사경회의 패턴으로서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이 무디의 집회에서 차용한 듯 보인다. 무디의 집회는 당시 전형적인 집회와는 많이 달랐다. 전통적인 캠프집회, 즉홍적인 집회가 아닌 무디는 집회의 준비, 집회 후의 양육문제 등을 지역교회 목회자와 논의함으로 협력하였다. 이런 무디집회는 교회와 사회에 영향력을 미쳤으며, 당시의 부자들, 철도 사업자 나다나엘 바우톤, 백화점 사장인 존 파웰, 목재 사업의 개척자 하비, 농업회사의 사장 키루스 매코믹 2세 등은 무디를 지원하여 학교를 비롯한 출판사, 잡지, 통신성경학교, 야간대학, 라디오 방송, 영화사, 선교항공학교, 방송국, 대학원 등을 건립하기도 하였다. 무디는 당시 많은 돈을 움직였지만, 돈에서 해방된 사람이었다. 토리는 말하길,

 

수백만 달러의 돈이 무디의 손에 들어갔다. 하지만 거쳐 갔을 따름이지 그가 착복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1899, 11월 캔자스 시티에서 복음을 증거 하던 중 병을 얻은 무디는 고향 노스필드로 돌아와 마지막 날들을 보냈다. 그해 1222, 20세기를 며칠 앞두고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헤어져 천국으로 향했다. 그는 전날 밤, 가족들과 사람들에게 말하길, “땅이 사라지고 하늘이 나를 위하여 열리는구나.” “정말 아름답구나. 마치 환상의 세계 같구나. 만약 이것이 죽음이라면 정말 즐거운 것이구나 하나님이 나를 부르고 있어. 나는 가야 돼. 나를 다시 부르지 말라그렇게 무리는 하나님의 곁으로 떠났는데, 그의 장례식은 절망이 보이지 않고 확신에 가득 찼다. 사랑하던 사람들은 모여 영원한 본향으로 향하는 무디를 지켜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그가 그해 뉴욕시 집회에서 한 말은 무디가 이 세상이 아닌 영원한 세상에서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다.

 

언제가 무디가 죽었다는 소식을 신문에서 읽게 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마디도 믿지 마세요. 그 순간 나는 지금보다 훨씬 더 살아 있을 것입니다.”

 

19세기 미국의 해외선교의 주도적인 리더들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 와일더(Robert C. Wilder), 스피어(Robert E. Speer)는 모두 학생자원단체(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출신이었다. 한국에 입국한 수많은 선교사들 역시 이 단체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학생자원단체의 기초는 1886년 헐몬산 여름 수련회였다. 그리고 1888년 이 단체가 조직되었다. 무디는 위샤드에 의해서 헐몬산 집회에 주강사로 초대를 받아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붙인 인물이다. 따라서 학생자원단체에 태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은 무디며, 그는 학생자원단체와 해외선교를 위한 끊임없는 격려를 통해 기독교 확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19세기 지도자였던 것이다. 그가 없이는 과연 한국선교가 가능 했을까 라는 의구심을 들게끔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가 직접적으로 한국에 복음을 들고 선교사로 오진 않았지만, 보내는 선교사로서 하나님의 일을 충분히 감당한 그 시대에 영적 거장임이 틀림없었다.

 

우리는 그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예수를 믿는 이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을 사랑함은 자신을 이웃을 위해 내어 주는 실천이다. 무디는 보스톤과 시카코 시절부터 회심한 후에 주일학교 학생들을 위해 주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었으며, 둘째는 헌신의 달인이었다. 그가 회심 한 후 자신의 잘 나가는 사업을 접고 무디는 복음을 전하는데 오로지 헌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하는 일에 대해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마다치 않고 헌신하였다. 여러 번 대서양을 건너 영국을 대중집회를 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는 물질을 소통시켰다. 무디가 대중집회를 통해 인기를 끌 당시 수많은 독지가들이 무디에게 와서 선한 일을 쓰라고 기부하였을 때, 그는 사심이 아닌 주님의 마음을 가지고 노스필드와 시카고에 학교를 세우고, 출판사, 방송국 등을 설립하였다. 이 모든 무디의 사역은 기도영성에 기초하고 있었으며, 그의 내적 부흥이 식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가난과 외로움은 그에게

고난이 아니라 성숙을 향한

친구이었습니다.

주님은 그를 그렇게 단단히

빚어 나가셨으며,

때가 되매 무디는 하나님의

은총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주님, 그에게 사랑의 맘 주어

주신 말씀 토할 때,

사람들, 감동의 눈물 닦으며

주님 앞에 항복했습니다.

지금도 그의 소리 남았으며,

여전히 이 땅의 젊은이들은

그의 나라 임할 때까지 나가

외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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