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논단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편집인 0 2017.01.26 08:44
외로운 투쟁에 선 루터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비텐베르크성교회에 붙여진 95개 논제는 약 몇 주일만에 독일 전체 퍼졌다. 이 논제를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루터의 용기에 갈채를 보냈다. 루터의 사상은 더욱 확산되어 갔다. 어두운 시대에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던 사람들 속에서 어떤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대자들의 공격도 거세게 일어났다. 로마 교황청에 완전 비상이 걸렸다. 

우선 가톨릭교회의 면죄부 설교자들은 공개적으로 루터를 이단시 하면서 추적하기 시작했다. 또한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 에크(Johann Eck)의 공격과 선동으로 인해 결국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로 소환되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독일의 추기경 카예탄(Thomas Cajetan, 1496-1534년)의 심문을 받았다. 추기경은 오직 교황만이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교황이 성경보다 높은 곳에 서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루터는 성경에 근거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루터와 추기경이 서로 치열한 논쟁을 하면서 싸웠다. 이때 추기경은 로마로부터 루터를 체포하라는 비밀 지령을 받게 되며, 이 정보를 입수한 루터는 친구들의 충고에 따라 한 밤중에 아우크스부르크 도시를 빠져 나온다. 

당시 황제 선출권을 가지고 있던 비텐베르크의 선제후 프레더릭(Frederick)은 루터가 로마에 있는 이단 재판소에서 심문을 받아야 하는 명령서를 철회하고 독일 땅에서 심문을 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요구하여 루터를 도왔다. 그 선제후는 잠정적이지만 루터를 계속 보호해 줄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막강한 영주들이 로마의 위협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제 루터는 홀로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걸어가는데 험난하기만 했다. 왜냐하면 안타깝게도 가까이 있는 수도회 형제들이나 비텐베르크 대학 동료들이 루터의 편에 서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희미하지만 마지막에는 화형을 위해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자신이 서 있지 않을까하는 두려움도 스쳐 갔을 것이다. 

하이델베르크 논쟁 -“십자가 신학” 

루터가 교황의 권위에 도전함으로써 로마교회는 큰 혼란에 빠지게 되고, 루터 자신은 면죄부와 신학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루터의 면죄부 비판과 관련하여 벌어진 첫 번째 논쟁이 1518년 4월 26일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 건물에서 열렸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와 논쟁을 하게 되는데 자신의 신학을 ‘40개 조항’으로 만들어 정리했다. 루터 당시 신학의 주류는 ‘영광의 신학’이었다. 이 논쟁에서 루터는 인간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려는 영광의 신학을 비판하고 십자가의 신학을 지지하였다. 그는 바울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론에 대해 입장을 밝히게 된다. 결과는 아주 좋았다. 루터가 승리함으로 인해 루터를 지지하는 세력이 늘었다. 마르틴 부처(Martin Butzer)를 비롯하여 앞에 나서기를 주저했던 비텐베르크에 있는 동료들, 그리고 많은 친구들 등 여러 사람의 동조자를 얻었다. 

라이프치히 논쟁 - “교회 최고의 권위는 오직 성경” 
논쟁으로 유명해진 루터는 자연이 계속적인 논쟁에 연루되었다. 개혁을 위한 치열한 한판 싸움인 중요한 논쟁이 1519년 6월 라이프치히(Leipzig)에서 발생하였다.

그때 루터는 로마교회의 위대한 신학자인 요한네스 에크(Johann Eck, 1486-1543)와 논쟁했다. 핵심은 권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에크는 교황과 주교들, 공의회, 종교회의들, 교회 전통의 권위만을 내세웠다. 베드로 후계자인 로마 감독들이 곧 교회의 머리라고 하면서, 로마 교황의 신적 권위를 주장했다. 

반면에 루터는 교회의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의 통치권이 성경에는 전혀 없는 개념이며, 공의회 결정도 오류를 범할 수 있으며, 교황과 공의회는 성경의 권위 아래에 있다고 말했다. 또한 사람이 구원받기 위해서 교황의 최고(지상)권을 믿는 것은 불필요한 일임을 강력히 반박하였다.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는 성경만이 유일한 권위가 된다는 것을 확실히 했다. 그곳에서 루터는 변할 수 없는 진리는 교황이나 공회가 아니라 성경만이며, 성경만이 교회의 최고 권위가 될 수 있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또한 루터는 신구약성경 66권 이외의 외경과 가경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로마가톨릭교회는 외경까지를 성경에 포함시킨다. 결국 에크는 루터에게 존 후스(Hohn Huss)와 같은 이단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 - “거룩한 불” 

추기경 카예탄(Cajetan)과 엑크가 루터 파면에 앞장섰다. 교황은 루터의 반박문 중에서 41개 항목들이 이단적이라고 정죄하면서 1520년 6월 15일, 교황의 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Exsurge Domine)를 발표하였다. 

이 칙서가 발표된 후 60일 이내에 루터는 교황청으로부터 자신의 주장을 취소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며, 만약에 취소하지 않을 경우에는 이단으로 선포하겠고 곧 파문에 처해질 것이라고 위협받았다. 

이 교황의 교서는 10월 10일 루터에게 전달되었다. 하지만 루터는 교황의 기소장에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교황청의 권력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명령받은 60일이 지났지만 물러서지 않은 루터는 이 교서를 “저주받은, 뻔뻔스럽고 악마적인 교서”라고 불렀다. 

12월 10일, 오히려 루터는 교황이 내린 교서와 모든 교회법전을 불 속으로 던져 버렸다. 루터는 거짓 사상을 불살라버렸다. 교황교서와 교회법전을 불태워버린 루터는 강의하기 위해 다시 비텐베르크로 왔다. 

수 많은 학생들 앞에 선 루터는 지옥과 순교의 길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 하나님을 위하여 개혁의 선봉에 선 루터에게는 순교조차도 공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점점 더 담대해지고 거세지며 확고해져갔다. 루터는 천 년이 넘도록 든든히 버텨오던 가톨릭교회의 절대교리들을 향하여 도전장을 던진 것이다. 

서슬 퍼런 황제의 권력 앞에서 위대한 종교개혁자 루터가 보여준 영적 파워의 힘은 엄청났다. 루터는 진리에 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바를 분명하게 붙잡고 있었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추구했기 때문에 흑과 백을 분명하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진리와 비진리 사이에 분명한 선을 그었다. 이러한 루터의 영적 파워는 결국 성경의 힘이었다. 루터는 영적전쟁터에서 움츠러들거나 물러서기를 거부했다. 오늘날 약해진 우리들의 신앙에 필요한 것은 루터와 같은 영적파워이다. 

보름스 의회 - “제가 여기 서 있습니다”

결국 루터는 교황으로부터 1521년 1월 3일에 파문을 당했다. 로마 교황청은 독일 의회에 압력을 넣어 루터를 정죄하여 처형하도록 독촉하였다. 

이에 대해 루터의 보호자였던 프리데릭 현제는 루터의 공개적인 심문이 독일 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그래서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는 루터에게 보름스 의회에 출석하라고 통보하였다. 

1521년 4월 17일-18, 독일 보름스 대성당에서 열린 제국의회에서 루터는 심문을 받게 된다. 루터의 친구들은 그에게 가지 말라고 애걸했다. 이때 루터는 두려워하는 친구들에게 “후스는 화형 되었지만 진실은 타버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또한 루터는 친구 슈팔라틴에게 “지붕위에 기왓장들만큼이나 많은 악마들이 기다리고 있다 하여도, 나는 보름스에 가겠다”라고 전했다. 

4월 16일 아침 10시, 루터와 비텐베르크 동료들은 덮개 없는 마차를 타고 보름스에 도착하였다. 루터는 수도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 마차에서 내리면서 루터는 그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라는 찬송을 불렀고,“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것이다”고 말했다. 

그때 회의장 주변은 루터를 격려하기 위해 모여든 5천여 명의 독일 시민들로 붐볐다. 시민들은 외쳤다. “남자답게 싸워라. 죽음을 무서워 말라. 저들이 죽일 수 있는 것은 몸뿐이다. 영생이 있음을 잊지 말라“고 했다. 

루터가 하루 밤을 머문 보름스는 흥분과 기대로 열광의 분위기였다. 첫째날 4월 17일 수요일 오후 4시, 루터는 젊은 황제와 선제후들, 교황의 특사들, 대주교, 주교, 백작, 영주들, 여러 자문들, 제국 각 도시의 대리인, 외국 법정의 대사, 각 계층의 고관 등, 즉 교회와 국가의 최고 권력을 잘 대표하는 사람들 앞에 섰다. 

트리어 대주교의 법률고문인 요한 폰 에크(Johann von Eck)는 황제를 대신해 라틴어와 독일어로 질문을 하였다. 제국의회 앞에 불려 나온 루터는 긴 책상 위에 자신의 책 25권 정도 가득 쌓여 있는 것을 보았다. 에크는 두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 책들은 당신이 쓴 책인가?”, 또 “그 책에서 쓴 내용의 사상을 그대로 견지할 것인가? 아니면 철회할 것인가?.” 즉 그 저술들을 다 취소하라는 요구를 하였다. 

이때 루터는 그 책들의 저자가 자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취소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한 것은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이 문제를 대충 처리할 수 없어서 답변할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요청하였다. 황제는 루터에게 하루라는 시간을 더 주었다. 

다음날 4월 18일 목요일, 루터는 전날보다 더 자신 있어 보였다. 기도와 묵상으로 자신을 강하게 세웠다.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횃불이 켜지고 루터는 보름스 의회 법정에 들어섰다. 에크는 전날 던졌던 질문을 약간 수정하여 그 책들을 철회하겠느냐고 물었다. 

마침내 루터는 입을 열어 모든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큰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그는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신기원을 이루는 위대한 선언을 하였다. 

“저는 복음의 진리를 단순히 전달하는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교황권의 부패와 잘못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에 폭정과 사악함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책들은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성경의 증언을 통하여, 또는 분명한 이유로 논박하지 않는다면 철회할 수 없습니다. 교황이나 공의회는 여러 번 오류를 범했고, 자체로 모순되는 말을 한 것은 명백한 일입니다. 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말씀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저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정복당해 있어서 저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습니다. 저는 아무 것도 철회하고 싶지 않고 또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 하나님,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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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세워진 기념 표지석 ©뉴스파워 김현배

루터가 출두한 지점에 새겨진 기념 표지석
1521년 마르틴 루터의 재판이 열렸던 건물의 터, 바로 그 현장에 세워진 하일스호프공원(Heylshofgarten)이 있다. 이 공원 내에는 루터가 소환되어 출두한 지점의 바닥에 기념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HIER STAND 
VOR KAISER UND REICH
MARTIN LUTHER 
1521 
(1521년, 마르틴 루터가 여기 황제와 제국 앞에 서 있다)

보름스 칙령 

로마 교황청은 할 수만 있었다면 존 후스처럼 루터도 화형에 처하고 싶었을 것이다. 황제는 열렬한 교황주의자인 제롬 알렉안더(Jerome Aleander, 1480-1542)에게 이단자 루터를 정죄하는 포고령을 작성하도록 지시했다. 5월 8일에 완성된 포고령에 황제는 5월 26일에 서명했다. 이어 독일 제국의회는 1521년 5월 26일 보름스 칙령을 공포하였다. 

마침내 루터는 국가와 교회로부터 위법자로 정죄되면서 파문을 당했다. 그에 대한 모든 법적인 보호를 박탈하였다. 그의 모든 책들은 이단으로 정죄되었고 불로 태우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그의 책을 인쇄하거나 판매하거나 읽는 일체의 행위가 금지 되었다. 

또한 루터를 지지하는 모든 사람을 불법자로 규정했다. 루터를 돕거나 소식을 주고받는 일도 금지되었고 루터와 관계 맺는 모든 사람들은 구속되거나 소유를 몰수하는 처벌을 받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과 황제, 대학들로부터 사회의 이단자로 찍혀 비참한 죽음을 눈앞에 두게 되었다. 

루터는 정말 용기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1천년 동안 유럽을 지배해 오던 황제의 권위와 교리 그리고 교권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죽음을 무릎 쓰고 개혁에 헌신하였으며, 사람을 믿지 않았고 사람의 힘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중세기 로마 가톨릭교회의 총체적인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기독교의 근본 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며, 사도적 신앙과 예배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이다. 즉 성경으로 되돌아가며, 십자가로 다시 돌아가며, 신약 성경에 나타난 표준으로 돌아가는 운동이다. “오직 성경,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이 구호는 종교개혁자들이 부르짖는 중요한 영적 모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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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배 목사는 독일 국가교회는 쇠퇴하고 있지만 자유교회들은 신실하게 부흥하고 있다고 전했다. ©뉴스파워


글 : 김현배 목사 (베를린 비전교회, 뉴스파워 유럽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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