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칼럼

사막은 은혜의 땅 14

김태훈 목사 0 2017.01.17 03:26
"태훈아, 그렇게 먹다가 얹혀서 무슨 일 나겠다. 제발 천천 히 먹어라." 
  
밥그릇을 다 비우고 물을 부어서 설거지 한 국물까지 다 마신 후에야 정신이 조금 들었다. 
  
"엄니, 감사합니다." 
  
밥을 한 끼 건네주면서도 어머니는 내심 혹시라도 형이 돌아오면 어쩌나 노심초사하는 표정이 었다. 
  
"그래, 태훈아. 이제 나가서 일자리라도 한 번 알아봐라. 그리고 아침에 오면 밥상 준비해 놓고 기다리마." 
  
그렇게 해서 잠은 노숙을 하고 아침이면 어머니를 몰래 찾아가 간신히 허기진 배를 채우곤 하는 생활이 얼마 동안 계속 되었다. 어렵고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나는 이때처럼 어머님의 사랑이 고맙게 느껴졌던 때가 없었다. 내장이라도 빼내서 자식을 위해 희생해 줄 수 있는 것이 조건 없이 사랑해 주시는 어머님의 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있는 완전한 사랑은 오직 어머니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뿐이라고 믿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루는 형님 집에 늦게까지 머무르며 조카들과 장난을 하고 있는 사이에 형님이 다른 날보다 일찍 집에 돌아왔다. 대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어머니는 아연실색을 하면서 나를 방 안 한쪽구석에 있는 벽장으로 떠밀어 넣었다. 방 안으로 들어온 형님은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한 것을 눈치채고 혹시 누가 집에 다녀갔냐고 물었다. 그러자 철없는 조카들이 막내 삼촌이 다녀갔다고 말했다. 
  
"어머니, 태훈이 녀석은 절대로 집 안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게 하라고 신신당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고 나서 둘째 형님은 어디서 들고 왔는지 흰 횟가루 같은 소독약을 집 안팎에 돌아가며 뿌리고, 아이들의 손발을 비눗물로 열심히 씻겼다. 
  
"폐병 환자가 자꾸 집안에 드나들면 아이들에게 병균이 쉽게 옮겨질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안좋습니다. 어머니, 앞으로 는 절대로 태훈이 집안에 들여놓지 마세요." 
  
나는 벽장 안에 숨어서 형님이 하는 말을 들으며 복받쳐 오르는 설움을 꼭꼭 씹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아, 내가 폐병환자라서 그렇게 박대를 하는구나.' 
  
물론 그때는 이미 폐병에서 다 치유된 상황이었지만 그런 형님의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아무리 배가 고파도 다시는 형님집을 찾지 않았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둘째 형님을 생각하면 그때 들었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가슴속에서 메아리치는 것을 느낀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형의 마음은 한편으로 이해가 되긴 했지만, 그런 냉대와 설움을 당한 기억은 평생 동안 나를 힘들게 했다. 그 후로 오랫동안 둘째 형님과는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조차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서러움과 분노와 실망감과 배신감 등 온갖 느낌들이 혼합된 감정의 칵테일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마음도 하나님께서는 이제 모두 치유해 주셨다. 둘째 형님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가운데 깊이 새겨져 있던 상처를 완전히 치유해 주셨다. 미움이 깊었던 만큼 둘째 형님을 다른 형제들보다 더욱 깊이 사랑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마음의 변화였다. 사람의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가장 큰 기적이다. 
  
노숙자 생활을 하며 전전긍긍하다가 드디어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몇 년 전 처음으로 서울에 무작정 상경했을 때 양복 수선 기술을 좀 배워 두었던 것이 도움이 되어서 옷 만드는 공장에 취직하게 되었다. 우선은 먹고 살 걱정이 해결되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상사에게 근면한 충청도 시골 총각이라는 인정을 받기 시작했고, 직장 생활은 한층 재미있어지고 일이 손에 착착 달라붙었다.  
  
그때쯤 나는 처음으로 여자를 알게 되었다. 같은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었고 얼마간 연애를 하다가 우리 둘은 곧바로 내 자취방에서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그 당시 내 나이 19세였다. 결혼할 수 있는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은 상황이었는데 얼마간 동거를 하다가 둘 사이에 아이까지 덜컥 생겼다. 임신했다는 소식에 기뻤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걱정이 마음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녀의 오빠되는 사람이 자취방을 찾아왔다. 순진한 자기 여동생을 꼬셔서 임신까지 시켜놨다고 노발대발하면서 동생을 끝까지 책임지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돌아갔다.  
  
그날 저녁에 나는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했다. '결혼하면 되잖아. 못할 거 뭐가 있나. 그냥 우리끼리 둘이서 결혼식을 치르고 호적에 이름을 올려서 살면 그게 결혼한 거지, 뭐 별다른 것이 있나?' 며칠 후 우리는 물 한 잔 받아 놓고 조상님들에게 이 결혼을 축복해 달라며 세상에서 가장 조출한 결혼식을 치렀다. 주위에 아무런 하객도 친지도 없었지만 그날 나는 맹물 한 잔에 맹세한 결혼식을 통해 죽도록 가정을 소중히 지킬 것을 마음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 후 나는 그녀의 이름을 내 호적에 올렸다. 그래서 이제는 누구에게도 떳떳한 나의 법적인 아내가 된 것이었다. 
  
첫 아들 성민이를 낳은 후 얼마 동안은 정말 꿈같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공장 일을 마치고 고된 몸으로 집에 돌아오면 눈에 넣어도 아플 것 같지 않은 귀여운 아들 성민이가 재롱을 어떻게나 예쁘게 부리던지…. 나는 그저 아이와 함께 그렇게 오래 있고만 싶었다. 아내도 첫 아이를 낳은 후 다소 몸이 허약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아이의 재롱과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서 마냥 행복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했던 불행의 그림자가 그렇게 갑작스럽게 우리 가정을 덮어 버릴 줄은 누구도 몰랐다. 고향 친구의 집에 병문안 갔다가 동생들과 말다툼 끝에 경찰서까지 끌려갔던 나는 그날 이후 4개월 동안 아내를 위시한 모든 사람들에게 갑자기 실종된 사람이었다. 나를 강제로 잡아 가둔 경찰은 가족들에게 연락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지옥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에는 가족과의 연락이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삼청교육대에서 풀려나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는 아들 성민이를 셋째 형님 집에 맡겨 놓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보았으나 도무지 찾을 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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