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기도! 라맛레히에서 엔학고레로!
본문: 사사기 15:14-20
사사기에 앞서 여호수아서가 있습니다. 여호수아서를 읽으면 정말 신바람이 납니다. 언약궤를 앞세우니 요단강이 갈라지고, 그 견고하던 여리고성이 큰 함성소리에 무너져 내리고 , 가나안 중부지역이 해와 달이 멈춰지는 기도 응답과 함께 점령되고, 하나님이 싸워 주시니 남부와 북부지역이 차례로 함락되고...
그러나 이어진 사사기를 읽으면 마음이 롤로코스터를 탄 것처럼 올라 갔다 내려 갔다 굴곡이 심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가나안 5부족을 비롯한 이웃 나라들에게 침략을 당하며 고통 가운데 살곤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힘들어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사사를 보내 주시고, 그들이 편해짐으로 다시 행악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고, 또 다시 회개하면 사사를 보내주는 순환이 12번이나 있었습니다.
승승장구하던 좋은 여호수아 시절은 불과 15년에 불과합니다. 대조적으로 사사시대는 자그마치 여호수아 시대의 22배 이상이나 되는 340년간 이어졌습니다.
마치 우리들의 신앙과 생활과 흡사하지요? 처음에 은혜받고 너무나 좋고 기뻤던 시간은 왜 그리 짧은지! 초창기 은혜가 지나가고 난 후에 지금까지 신앙과 신앙생활에 많은 up and down 기복이 있고요...
삼손은 12번째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였습니다. 그는 모태로부터 거룩하게 구별된 하나님의 나실인이었습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삼손이 딤나에 살던 블레셋 여인과의 개인적인 결혼과 관련된 문제로 인해 시작된 사건입니다. 삼손으로 인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서로 전쟁하려 했을 때 일어난 일입니다 (삿 14-15장). 힘이 약한 이스라엘인들은 강한 블레셋의 두려운 공격을 피하기 위해 삼손을 포로로 잡아 그들에게 내어 주는 조건을 택했습니다. 삼손도 자기 동족과는 싸우길 원치 않아 대신 인질이 되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하여 삼손은 이스라엘군에 의해 온 몸을 결박당한 채 블레셋에 넘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결박된 그가 레히란 곳에 도착했을 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레히란 도시에 없던 지명이 삼손에 의해서 두 곳이나 생기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두 곳이 어떤 곳인지를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그리고 그 두 곳의 절대적인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아 보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두 곳 중에서 어디에 머물러야 되는지 확인토록 하겠습니다.
1.먼저 라맛 레히란 지명이 생겼습니다
본문 17절 후반 “... 그곳을 라맛 레히라 이름하였더라”
삼손을 결박했던 줄이 불탄 삼 같이 떨어졌습니다. 삼손이 나귀의 새 턱뼈를 보고 손에 취했습니다. 일천명을 죽였습니다. 시체로 두 더미를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시체가 쌓인 그 곳이 라맛 레히로 이름지어졌던 것입니다. '라맛레히'는 즉 '턱뼈를 집어들었다’는 뜻으로 “턱뼈의 산”이란 의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발생할 수 있었습니까? 여호와의 신의 권능이 삼손에게 임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본문 14절 중반). 삼손 자신에게 힘의 원천이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내가” 했다고 말합니다.
본문 16절 “... 나귀의 턱 뼈로 내가 일천명을 죽였도다”
그는 시대에 편승하여 ‘자기 눈에 좋은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삶을 살았던 ‘나’ 중심의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목말라 죽을 지경이 되어 할례 받지 못한 자의 손에 빠질 위기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18절).
여호수아의 아이성 첫 침공의 실패도 마찬가지입니다 (수 7장). 느부갓네살왕의 실각과 실성도 “내가” 했다고 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단 4:28-33).
우리 모두 나의 나된 것은 “내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늘 자각하고 영광돌리며 사시길 축원합니다.
2.두번 째로 레히에 엔학고레라는 샘의 지명이 생겼습니다
본문 19절 후반 “... 그 샘 이름은 엔학고레라 이 샘이 레히에 오늘까지 있더라”
자신만만해 하던 삼손에게 죽음에 직면한 갈증이 찾아 왔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가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종의 손을 사용하셔서 이 큰 구원을 베푸신 것입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본문 18절). 그러자 하나님은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삼손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로 하여금 샘 솟는 물을 보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금 깨닫고, 회복과 소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본문 19절 전반). 바로 그 자리가 ‘엔학고레 (엔 하코레 En Hakkore)’ 입니다. 삼손은 ‘엔학고레’에서 ‘내’가 아닌 ‘여호와’가 자신의 삶의 주인이요 존재 이유임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심각한 갈증이 일어날 때 우리의 영원한 ‘엔학고레’ 즉 ‘부르짖는 자의 샘’이 되시는 하나님(생수의 근원, 렘 2:13)과 예수 그리스도(생수, 요 4:14), 성령님(생수의 강, 요 7:38)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삼위 하나님 만이 우리의 능력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그 분만이 우리를 소생시키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에서 삼손은 어떻게 ‘라맛 레히’에서 ‘엔학고레’로 옮겨갈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기도”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그는 부르짖었습니다 (히, 카라, 외치다) 본문 18절 전반 “삼손이 심히 목마르므로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
삼손은 12 사사들 중에서 가장 긴 이야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13-16장의 4개장) 그가 기도하는 장면은 딱 두 번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 장면과 눈이 뽑힌 가운데 조롱 당하던 최후의 순간에 마지막 힘을 달라는 기도를 드릴 때입니다 (16:28).
삼손은 절체절명의 순간이 아니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찾지 않았기에 그의 삶은 늘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방황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통해 위대한 일을 하셨지만, 정작 그 자신은 대부분 허망한 삶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삼손이 늘 하나님을 찾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과 자기 정욕을 향한 갈증이 아닌 하나님을 향한 갈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물이 없어 느끼는 육신의 갈증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가 목말라 느끼는 영적인 갈증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영적인 갈증을 위해 하나님은 육신의 갈증을 때로는 사용하시곤 하십니다. 인간은 육신의 갈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을 때에 결국 하나님을 향해 갈증을 느낄 수 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라맛 레히는 신앙이 담기지 않은 이름의 지명입니다. 자기 자랑만 잔뜩 담은 이름입니다. 마치 ‘턱뼈의 산’이란 뜻과 같이 자신의 쌓아진 업적을 기리는 송덕비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이런 이름은 속히 지워 버려져야 합니다.
반면에 엔학고레는 신앙적 이름의 지명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로 부르짖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을 청하는 이름입니다. ‘엔학고레’는 간절히 부르짖으며 기도하는 자에게 주어지고 마시게 되는 샘입니다. 이런 이름은 우리 심령 속에 또렷이 새겨져야 합니다.
여호수아가 옷을 찟고 티끌을 무릎쓰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패전의 문제를 알게 되고 해결됐습니다. 그 후에 아이성을 다시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느부갓네살왕도 어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즉 기도드렸다는 의미 아니겠습니까? 그랬더니 총명이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바벨론의 왕으로 복귀되었습니다.
요나도 기도드림으로 큰 물고기 뱃속에서 토해져 살아났습니다. 다시금 선지자로서의 직무를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욘 2:1-2).
그렇습니다. 기도는 멸망과 죽음에서 회복시켜 소생케 합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삼손처럼 ‘내가 천 명을 무찔렀다’ 이런 자랑과 교만의 장면에서 ‘하나님, 저를 도와주세요’ 이런 겸손과 기도의 장면으로 옮겨지길 축원합니다. ‘나’가 중심이 되어 자랑함으로 죽음에 처함이 아니라,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 기도함으로 소생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는 ‘자기교만과 멸망의 자리’를 ‘은혜와 소생의 자리’로 바뀌게 만드는 비결책입니다.
우리 모두 늘 기도의 현장에 있도록 하십시다. 그리하여 무력하고 당장 죽을 지경에서라도 늘 기력이 회복되어 소생하는 은혜가 넘쳐 나시게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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