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이제는 우리가 더 강해질 차례다
본문 : 창세기 39:1-6
새로운 환경, 낯선 여건에 처하면 처음엔 어벙벙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당황하게 합니다.
요셉이 노예로 팔려갑니다. 낯선 환경이 어색하기만 합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답답할까요! 하나님 중심에서 살던 자가 낯설은 이방 문화에 적응해야 합니다. 죽은 신 앞에 함부로 떠들고 지나갈 수 없습니다. 처음엔 멋 모르고 아무렇게 지나가다가 엄청 두들겨 맞기도 했습니다.
이방신 앞에서는 경거 망동해서는 안된다고 호되게 훈계도 받습니다. 요셉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이방신이 있는지 처음에는 좀 헷갈렸을 것입니다. 모든 게 혼란스럽고 복잡하지만 차분하게 눈이 뜨이기 시작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 노예의 삶은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삶입니다.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셉이 결코 비참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시간들은 맞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
어느덧 코로나 라는 역병을 맞이한지 2년이 지나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습니다. 여전히 코로나 터널에 갇힌 채 새해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경험해 보는 역병 속에서 살아남았다면 이제는 살아 남은자가 코로나를 지배해야 할 차례입니다.
코로나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코로나가 우리들의 삶에 미친 영향은 참으로 엄청납니다.
코로나는 우리들의 생활 리듬을 바꿔 놓았습니다. 삶의 스타일을 완전히 바꿔 놓았습니다.
공동체에서 개인 위주의 삶으로, 밖에서의 삶을 안으로 방향을 돌려 놓았습니다.
지금 상황에서는 옛날로 돌아가는 방식은 이젠 불가능합니다.
코로나 라는 역병 앞에서 많은 사람들은 슬슬 피해 다녔습니다. 그래서 혼자 집 안에서 꼭 박혀 나들이도 하지 않았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좋은 습관도 생겼지만 나쁜 습관도 생겨 났습니다. 남을 바라보는 의심증 입니다.
지난 2년 동안 우리를 슬프게 했던 순간들도 많았습니다 . 가까운 분들이 생명을 잃고, 뜻밖의 슬픈 소식을 수도 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가족을 잃은 유족들에게 하나님은 계속해서 위로해 주시고 함께 해 주실 줄로 확신 합니다.
이제는 2년 동안 코로나와 함께 하면서 어떻게 퇴치할 것인지 어느 정도 알았습니다. 더 이상 코로나에 짓눌려 사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리드해 가는 지혜로운 성도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2022년은 검은 호랑이 해 라고 합니다. 호랑이의 포효처럼 우리를 불안케 하는 현실을 압도해 갈 것인지 아니면 고양이처럼 쥐죽은듯이 질질 끌려 갈 것인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특별히 2022년은 코노라 여파로 인해 나노 사회가 될 것이라고 추측을 합니다. 나노 라는 말은 굉장히 작은 입체 분자 라는 의미로서 개인을 의미 합니다. 철저한 개인위주로 자기만을 위한 삶을 만들어 가는 스토리를 엮어 갈 것입니다. 물론 개인 사회가 주축을 이룰 것이지만 그 와중에도 끼리끼리의 작은 모임들은 지속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요셉이 노예로 팔려가는 비참한 인생 스토리를 보여줍니다.하지만 거기가 끝이 아닙니다. 꿈 많은 사람이 꿈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팡파레의 삶을 보여 줍니다.
첫째, 끌려가고 팔려가는 요셉에게서 보여지는 건 비참한 모습 밖에 없다. 그런데…
1절에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요셉은 질질 이끌려 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꿈이 다 사라진 것 처럼 보입니다. 거기에다가 돈을 주고 거래 되는 물건 취급 받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완전 몰락처럼 보입니다.
요셉 스스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비참할 뿐입니다. 아 내 인생은 끝이구나..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요셉 본인도 낯선 곳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도 되었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는 낯선 곳에서 혈혈단신 입니다.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자기를 대변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막막한 광야입니다.
애굽이라는 광야
광야의 특징은 아무도 도와 주는 이가 없다, 즉 혼자다 라는 의미입니다. 당시 애굽은 강대국입니다. 외형적으로 볼때는 화려한 곳입니다. 더군다나 요셉이 노예로 팔려간 곳은 애굽의 2인자 집이다. 그런 곳이 요셉에게는 광야입니다.
노예로 보디발의 집에서 새로운 삶이 시작 됩니다 다. 즐거운 출발이 아닙니다. 신나고 꿈을 갖게 하는 시작이 아닙니다. 육체적으로 힘든 삶이 시작됩니다.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야 합니다.
종들 사이에서도 보이지 않는 위계 질서가 있습니다. 고참 종이 있고 말단 종이 있기 마련입니다.
온 갖 힘들고 고된 일은 다 요셉에게 떠 넘겨집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먹기라도 잘 하면 에너지가 넘쳐 일하기가 쉬울 겁니다. 하지만 노예이다 보면 먹은 것 제대로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삶이 지치면 생각도 불안해 진다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성급하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이젠 내 인생 끝났구나.. 라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삶을 보세요. 처음엔 시련도 겪습니다. 자기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생이 흘러 갑니다. 그렇다고 성급히 결론 내리지 않습니다.
시편 기자의 고백으로 요셉의 심정을 표현해 본다면 시 126:5-6처럼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반드시 기쁨으로 그 곡식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 아멘 요셉은 이런 심정을 갖고 매사에 임합니다. 그러니 움직임은 어떠했을까요?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요셉이 보여준 가치
말단 노예으로 시작된 요셉은 어느 새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받고 가정 총무로 임명을 받습니다.
어떻게 말단 노예가 하루 아침에 총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을까?
말단 노예가 일약 가정 총무가 되는 영적 비밀
우리는 곰곰이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요셉이 이렇게 초고속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이 뭘까? 2절에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입니다.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오고, 돈을 주고 팔리고 하는 모습들은 실패한 인생의 모습처럼 보여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보이지 않는 손길이 운행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영적 손길 입니다 .
애굽이라는 광야에서 홀로 사는 요셉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 눈에는 혼자인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홀로 내버려 두시지 않으십니다.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감성적으로 자신의 상황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된다는 점입니다. 요셉은 분명 감지합니다. 결코 자기 혼자가 아님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이 들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다시 일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심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시면서 주신 영적 에너지들이 뭘까요?
먼저 요셉에게 안심하라 는 안정감을 주심니다. 요셉아 안심하라. 안심하라 …
너가 지금 처음 겪는 상황에 결코 겁먹지 말라.
둘, 지금 처한 문제들을 풀 수 있는 지혜 주심 입니다.
요셉에게 가장 절실한 문제는 언어 소통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으로 듣는귀는 허락하십니다. 말할 줄 아는 혀의 힘도 주십니다.
물론 언어의 장벽이 있지만 지혜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깨닫게 합니다.
요셉은 말단 노예로 시작해서 가정 총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요셉은 어떤 삶의 가치를 보여주었는지 우리는 쉽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보여준 가치는 그의 마음 자세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가치 라고 하면 삶의 현장속에서 중요시 하는 것입니다. 바로 청렴, 성실, 기여 그리고 배려 입니다.
예수의 분신인 요셉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요셉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돈 주고 매매 됩니다. 낯선 곳으로 끌려온 신세지만 그 곳에서 요셉은 예수의 분신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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